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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기회를 엿보던 한 대원이 홀로 돌격을 외치며 기습작전에 나선다. 소총을 내갈기며 위협하자 평온했던 도시가 순간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이어 기다렸다는 듯이 상륙장갑차가 도시로 밀려온다. 독일에서 원정 온 대원도 지원사격에 합류한다. 모함인 상륙 지원함에서 지원사격이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온 대원들이 치열한 저지를 뚫고 단숨에 방어선을 무너뜨린다. 육지에서 상륙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하늘에선 후방 교란작전에 나선다.

 

다들 극장에서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장면이다. 그런데 이런 무시무시한 일이 스크린 밖의 현실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세종시(행정중심복합도시) 수정 논란을 대하는 정부의 대응양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난 8월 정운찬 국무총리 내정자가 세종시 수정 필요성을 돌연 선언했다. 파장은 컸다. 당시 '세종벌'에선 수년에 걸친 오랜 논란과 토론 끝에 여야합의로 통과된 특별법에 따라 토지보상을 마무리하고 순조롭게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 총리의 선언에 놀란 연기주민 등 충청권 주민들이 두 주먹을 움켜쥐고 거리로 몰려나왔다. 저항이 시작되자 일부 언론과 한나라당 의원, 학자들이 한꺼번에 '행정비효율'을 외치며 세종시 수정론에 가세했다. 물리력의 우세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아는 이들은 '이전하기로 한 행정기관 대신 대기업이나 큰 대학이 들어서게 하겠다'고 달랬다.

 

그 사이 '슈뢰더' 전 독일 총리가 날아와서 자국의 사례를 예로 들며 이명박 대통령에게 '수도는 분할하면 안 된다'고 충고했다. '슈뢰더' 전 독일 총리가 비행기 타고 한 시간 이상 날아가야 하는 본-베를린과 달리 세종시는 서울에서 불과 열차 타고 40~50분 거리인 것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계속된 공세에도 충청권 주민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이명박 대통령이 방송을 앞세운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함포사격'에 나섰다. 이 대통령의 '세종시 대화'는 '돌격 명령'으로 바뀌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세종시민·관합동위원회를 비롯해 정부 관료들이 일제히 세종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청와대 수석에 이어 정운찬 국무총리, 국토해양부 장관, 국무조정실장, 행안부장관 등이 하루가 멀다 하고 대전과 세종시를 방문해 기업과 대학, 연구기관을 세트로 줄 테니 행정기관과 맞바꾸자고 제의하고 있다. 또 이 대통령까지 방문행렬에 합류할 예정이다. 

 

어르고 뺨치고, 협박하고 교란하고

 

협박도 뒤따랐다. 권태신 국무조정실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지난 16일 정부대전청사에서 4급 이상 공무원 4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는 중앙부처 이전 백지화를 전제로 세종시로 오는 것"이라며 "세종시 원안을 고집하면 광주나 대구 등 다른 지역에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정부가 수정 대안을 1월경에나 내놓겠다고 밝힌 마당에 국무조정실장이 미리부터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를 받으라는 것도 어이없지만, 어르고 뺨치는 고위관료의 태도가 정말 가관이다.     

 

후방교란도 끊이지 않고 있다. 정종환 국토부장관이 그 예다. 정 장관은 17일 온양 그랜드호텔에서 아산지역 주요 인사 100여 명과 오찬을 하며 "아산시 등 다른 시·도의 발전도 신경 써야 하는데, 모든 것을 세종시에 넣는다면 다른 지역은 얼마나 상심이 크겠냐"며 편 가르기에 나섰다. 이달곤 행안부장관은 17일 충남도청 공직자들과 만나 "지금은 전국적으로 인구가 늘지 않아 신도시를 만들어 부각시킨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며 세종시 수정 필요성을 강조했다.

 

내부교란도 계속되고 있다. 공주대 김재현 총장은 박형준 청와대 정무수석과 만난 이후 공주대 세종시 이전 연구를 지시하더니, 세종시 원안수정을 지지하는 선진충청포럼 주최 세미나에 주제발표자로 나서 '공주대를 세종시의 국립대로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민들은 행정중심이 빠진 상태에서는 국립대학 이전이나 교육도시 조성은 논의 대상이 아니라고 목이 터지라 외치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대학 이권 챙기기와 세 불리기에 이번 논란을 드러내놓고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행정연구원과 한국행정학회는 '9부2처2청'을 세종시로 이전할 경우 행정비효율로 연간 3조~5조 원, 향후 20년간 총 100조 원 이상의 비용이 발생할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지난 2005년 교통연구개발원이 발표한 '수도권교통혼잡비용'이 연간 12조 원(2004년 기준)에 이른다는 연구결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있다. 일부 정치인과 학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세종시를 미국의 실리콘밸리 같은 첨단과학산업도시로 만들자는 제안을 쏟아냈다.

 

대통령 한마디에 법전 내팽개쳐도 되나

 

'아닌 밤중에 홍두깨'지만 논란이 되는 사안에 대해 치열하게 논의하고 토론할 수는 있다. 하지만 행정은 법률에 의거해 행해져야 하는 게 원칙이다. 아직 정부의 세종시 수정 대안도 나오지 않았고 국회 통과까지는 긴 과정이 남아 있다. 국회 통과 여부도 불투명하다

 

법치에 따른다면 헌법 수호의 최고 책임자인 이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관료 모두 지금은 '9부2처2청'을 세종시로 이전하기로 돼 있는 행정복합도시건설특별법이 정한대로 일해야 한다. 적어도 법이 개정되기 이전까지는 법대로 일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제까지는 법에 따라 행정중심복합도시를 차질 없이 건설하겠다던 정부 관료들이, 대통령의 한마디에 법전을 내팽개치고 군사작전을 벌이듯 세종시 수정작전에 나서는 것은 볼썽사납다. 정부 관료들에게 호소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제발 법대로만 하자.

 


태그:#세종시, #행정복합중심도시, #이명박 대통령, #정부관료, #군사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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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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