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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호묘채' 시장의 전경. 시장은 중국에서 가장 큰 묘족 마을이다.
 ▲ '천호묘채' 시장의 전경. 시장은 중국에서 가장 큰 묘족 마을이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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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언덕에 층층이 쌓아 올려진 시장의 민가들.
 산과 언덕에 층층이 쌓아 올려진 시장의 민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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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기후, 1년 3모작 가능한 마을 '시장'

시장(묘족어, 한자 표기는 '西江')은 살기 좋은 고장,
푸른 숲과 작지만 넉넉한 전답이 드넓게 펼쳐져 있고,
가가호호 붙어 있는 집들 아래로는 맑은 개천이 흐르며,
마을 곳곳 아름다운 노래 소리가 울려 퍼져 찾는 이를 흥겹게 하네.
- 레이산(雷山)의 한 묘족 가요 중에서

중국 구이저우(貴州)성 첸둥난묘족동족(黔東南苗族侗族) 자치주 레이산현. 중국에서도 오지인 첸둥난자치주 동북부에는 소수민족 묘족의 성산 레이궁산(雷公山)이 있다. 해발 2178m의 레이궁산 복부에 자리 잡은 마을 시장은 중국에서 가장 큰 묘족의 거주촌락이다.

2008년 현재 시장에는 1286가구, 6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 가운데 외지에서 온 극소수의 한족 공무원을 제외하고, 묘족의 인구 비율은 98%를 넘는다. 천 가구의 묘족이 사는 큰 마을이라 하여 '천호묘채'(千戶苗寨)라고도 부른다.

시장은 험준한 산골 오지지만, 천 가구의 주민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천혜의 옥토다. 뒤로는 레이공산이, 앞으로는 바이쉐이허(白水河)가 있어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물이 쾌적의 입지조건을 제공한다. 사시사철 따스한 기온 덕분에 1년 3모작이 가능하다.

산골 깊숙이 위치해 외부인의 침입도 피할 수 있다. 실제 지난 1990년대까지 레이산 현청에서 시장까지 가려면 자동차로도 3시간 넘게 시간이 걸렸다. 거리상으로 보면 불과 37㎞에 불과하지만, 그 거리감은 컸다.

2002년 지방정부가 1300여만 위안(한화 약 22억1000만원)을 투자하여 포장도로를 놓으면서 그 시간은 절반으로 단축됐다. 한결 편리해진 교통 사정은 '묘족 문화의 생태 박물관'인 시장을 바깥 세상에 속속들이 선보이고 있다.

편리해진 교통 사정으로 시장을 찾는 관광객들이 늘어나 이를 맞이하는 상점들도 문을 열었다.
 편리해진 교통 사정으로 시장을 찾는 관광객들이 늘어나 이를 맞이하는 상점들도 문을 열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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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골목길 바닥은 동물과 자연으로 양각되어 수놓아져 있다.
 시장 골목길 바닥은 동물과 자연으로 양각되어 수놓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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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록대전에서 한족에게 패한 치우천황, 민족 대이동

시장의 역사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묘족의 전설에 따르면, 기원 전 3000여년 전 치우천황 셋째 아들이 이끌던 부족은 지금의 장시(江西)성 일대에서 거주했다.

탁록(涿鹿)대전에서 아버지 치우천황이 화하족(華夏族·한족)에 패하자, 민족의 엑소더스가 이뤄졌다. 셋째 아들은 부족을 이끌고 정든 고향을 등져서 남쪽 지방으로 이동했다.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묘족 민요는 장시성에서 구이저우에 이르는 긴 여정을 노래하고 있다. 민요는 패퇴한 민족의 이동사가 아닌, 묘족으로서 정체성을 찾고 묘족문화의 체계를 다지는 자기발견의 역사를 담고 있다.

긴 여정 끝에 시장에 도착한 묘족은 오랜 세월 동안 중국 왕조의 통치 영역에서 벗어나 있었다. 많은 왕조가 중원에서 흥망하고 전란이 중국 대륙을 휩쓸었지만, 시장의 묘족은 '관외'(管外) 지역으로 자처하면서 독립성을 유지했다.

18세기 청나라 옹정제에 이르러 시장은 중앙정부의 직접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묘족을 천시하는 듯한 '지장'(鷄講)이란 명칭으로 정식 행정구역에 편입된 것이다.

20세기 전반기 구이저우를 통치했던 군벌은 행정력 강화를 위해 시장에 대한 동화 정책을 취했다. 하지만 깊은 오지인데다 왕래마저 불편한 지리적 위치는 시장에 대한 외부의 영향을 차단했다. 리푸중(李福忠) 전 시장초등학교 교장에 따르면,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시장에는 간간이 장사를 위해 시장에 오는 외지인이 있을 뿐 외부와의 교류가 전무했다.

1966년 발발한 문화대혁명은 묘족의 원생태지 시장을 그대로 두질 않았다. 험난한 산길을 따라 시장까지 들어온 홍위병들은 묘족을 괴롭혔다. 조상숭배사상과 전통문화를 '사구'(四舊, 구사상·구문화·구풍속·구습관)로 규정하여 철저히 파괴했다.

리푸중은 "문혁 10년간 시장 묘족은 숨죽인 채 조상을 모시며 묘족의 전통문화와 풍속을 근근이 이어갔다"고 회고했다.

먀오녠을 맞아 마을 어귀에서 시장을 찾는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묘족 여성들.
 먀오녠을 맞아 마을 어귀에서 시장을 찾는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묘족 여성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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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중앙광장에서 관광객을 위해 포즈를 취하는 젊은 묘족 여성. 묘족은 외지인을 반기고 환대하는 풍습을 지니고 있다.
 시장 중앙광장에서 관광객을 위해 포즈를 취하는 젊은 묘족 여성. 묘족은 외지인을 반기고 환대하는 풍습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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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족 최고 명절 '먀오녠', 집집마다 돼지 잡고 조상에게 제사 지내

묘족에게 있어 가장 큰 명절은 '먀오녠'(苗年)이다. 먀오녠은 묘족 역법으로 따지면 음력 9월 25일에서 10월 5일 사이다. 먀오녠에 묘족은 한 해의 수확을 기뻐하고 조상에게 제사를 올린다.

시장에서 먀오녠은 한 해에 3차례씩 벌어지는데, 각각 카이터우녠(開頭年)·다녠(大年)·웨이녠(尾年)으로 나뉜다. 카이터우녠은 음력 10월 첫째 묘일(卯日)이다. 떡을 만들고 돼지고기를 잡아 조상에게 감사의 제사를 올린다. 오늘날 카이터우녠은 지방정부 방침에 따라 음력 10월 1일에 맞추어 지내고 있다.

다녠은 음력 10월 둘째 묘일부터 3일 동안 지낸다. 닭과 오리를 잡고 찹쌀밥을 지으며 집집마다 술을 만든다. 잡은 고기와 지은 술은 먼저 마을 제사당, 다리, 농토, 숲, 바위 등에 뿌리며 자연과 조상에 감사를 드린다. 그 뒤 친척과 이웃을 청하여 함께 나누어 먹는다.

웨이녠은 음력 12월에 3~5일 동안 지내는데, 가장 길고 떠들썩하게 보낸다. 웨이녠에는 집집마다 돼지를 잡고 조상에게 감사의 제사를 지내지만 샤머니즘적인 행사는 지내지 않는다. 웨이녠에 잡은 돼지 머리는 집안 대청의 조상 신위 앞에 놔두어 조상의 은덕을 온 가족이 함께 기리게 된다.

량톄웨이(梁鐵威) 시장 천호묘채 관장은 "개혁개방 이후 먀오녠 명절행사가 복원되었지만 그 내용과 절차는 간소화됐다"면서 "허례허식을 줄이는 차원에서 웨이녠은 대폭 간소화하고 다녠 때에 웨이녠 행사를 앞당겨 지낸다"고 소개했다.

시장 묘족이 조상을 기리고 자연을 숭배하는 데는 민족 대이동의 역사와 시장의 자연적 조건에서 비롯됐다. 기나긴 여정을 거쳐 시장에 정착한 묘족은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내어 지금의 살기 좋은 생활환경을 조성했다.

묘족은 자연을 파괴하기보다는 이를 섬기고 존중해 왔다. 지금의 생활 토대는 누리게 해준 조상에게 감사하고 기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먀오녠을 맞아 화려한 성좡(盛裝)을 차려 입은 시장의 부녀자들.
 먀오녠을 맞아 화려한 성좡(盛裝)을 차려 입은 시장의 부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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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을 꽂아 머리카락을 꼬아 올린 묘족 할머니들. 화려한 성좡과 멋들어진 조화를 이룬다.
 빗을 꽂아 머리카락을 꼬아 올린 묘족 할머니들. 화려한 성좡과 멋들어진 조화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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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사철 관광객 들끓는 곳, 농사일보다 관광업에 열성인 주민들

오늘날 시장은 더 이상 산골 오지의 묘족 마을이 아니다. 한결 편리해진 교통사정으로 시장은 사시사철 관광객이 들끓는다.

이 때문에 현지 주민들은 생업인 농사일보다 관광업에 더욱 열성이다. 외지 관광객과 함께 딸려 들어온 외래문화 때문인지 평소에 일부 부녀자를 제외하고 전통의복을 입고 다니는 주민은 보기 힘들다.

퇴직하기 전 한달 교사 월급이 1000위안을 넘지 못했던 리푸중도 신종사업으로 대박을 터뜨리고 있다. 리는 살던 가옥을 개조해 숙박업에 종사하며 한 해 5만 위안(약 850만원)을 넘게 번다.

베를 짜고 자수를 놓으며 어렵게 생활해 왔던 저우잉(여) 집안도 생활이 윤택해졌다. 관광객에게 묘족 전통의상을 팔면서 생계수단이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묘족 최고의 은 세공술을 자랑하는 시장 은장(銀匠)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진작부터 레이산 현청이나 구이양(貴陽)으로 떠났다.

2008년 현재 시장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는 농가는 118호에 달한다. 매 가구당 5만 위안 이상을 거두고 있다. 시장 주민 1인당 평균소득도 3200위안(약 54만원)을 돌파했다. 시장을 찾은 관광객은 110만 명을 넘어섰다. 관광산업이 파생시킨 수입만 2.5억 위안(약 425억원)에 달한다.

관광산업이 조용하던 산골마을 시장을 풍족하게 하면서 물질문명을 확산시키고 있지만, 아직까지 묘족만의 정체성은 침범하지 못하고 있다. 먀오녠 행사에서 볼 수 있듯, 도도한 서구문명과 한족문화의 물결이 묘족의 혼과 정신, 문화풍습은 대체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될 경우 미래는 장담하기 힘들다.

2007년 7월 시장을 찾은 저명한 문장가 위치우위(余秋雨)의 고언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위는 "시장의 가치는 거센 풍상에도 묘족의 전통사상, 문화풍속, 생활방식 등을 지키고 발전시킨 데 있다"면서 "정부당국은 묘족의 정체성을 더욱 존중하고 돈벌이를 위한 개발정책을 밀어붙이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먀오녠을 맞아 조상에게 드릴 제사를 위해 돼지고기를 잡는 묘족 남성들. 조상에게 드린 제사상을 위한 돼지는 가장 값지고 살이 오른 것을 골라잡는다.
 먀오녠을 맞아 조상에게 드릴 제사를 위해 돼지고기를 잡는 묘족 남성들. 조상에게 드린 제사상을 위한 돼지는 가장 값지고 살이 오른 것을 골라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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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족은 명절 때 집집마다 마련한 음식을 장탁연에 차려서 친척, 이웃과 함께 나눠먹는다.
 묘족은 명절 때 집집마다 마련한 음식을 장탁연에 차려서 친척, 이웃과 함께 나눠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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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Tip

시장에 가려면 첸둥난묘족동족자치주의 주도 카이리(凱里)에 먼저 가야 한다. 카이리는 구이저우의 수도 구이양에서 고속버스로 2시간 거리다. 카이리에서는 시장으로 바로 가는 시외버스가 있는데, 첫차는 9:30, 막차는 16:00으로 2시간 간격으로 운행된다. 버스비는 25위안(약 4250원)이고 2시간이 조금 넘게 소요된다.

시장은 2008년부터 입장료를 받기 시작했다. 입장료는 100위안(약 1만7000원)인데, 2010년 4월까지는 60위안만(약 1만200원)을 받고 있다. 초등학생과 노인은 무료다. 시장 내에서는 마을 곳곳을 다니는 전기차가 운행 중인데, 차비는 5위안(약 1190원)이다.

시장 곳곳에는 전통 민가를 개조한 게스트 하우스가 있다. 시설은 조금 열악하지만, 묘족의 삶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방값은 1인당 20~40위안으로 저렴하다. 방에는 따로 화장실이 딸려 있어 지내기는 나쁘지 않다.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묘족식으로 만든 저녁식사를 마련하는데, 식비는 보통 10위안(약 1700원)이다.

만약 명절 기간에 시장을 찾는다면 장탁연(長卓宴)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장탁연은 묘족이 명절이나 중요한 마을 행사 때 집집마다 마련한 음식을 긴 탁자에 차려서 친척, 이웃과 함께 나눠먹는 식사의식이다.

1년 내내 평안하라는 의미를 지녔고, 짧게는 100에서 길게는 250m 길이의 연회상을 차린다. 묘족은 손님에게 술을 권하는 정도를 넘어서 강요하는 술문화를 지녔기에 음주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BS U포터,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중국, #구이저우, #귀주, #묘족,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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