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름은 로제타", '내 이름은 로제타' / "넌 일자릴 구했어", '난 일자릴 구했어' / "넌 친구가 생겼어", '난 친구가 생겼어' / "넌 정상적인 삶을 살아", '난 정상적인 삶을 살아' / "넌 시궁창을 벗어난다", '난 시궁창을 벗어난다' / "잘 자", '잘 자.'

와플가게에서 일하는 착한 청년 리케의 집에서 벽을 향해 돌아누워 잠을 청하면서 로제타가 '로제타'에게 나지막이 속삭이는 장면입니다.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을 기약하며 발버둥치는 어느 청년실업자의 일상을 시종일관 불편하게 보여 주는 영화 <로제타>의 한 장면입니다.

한 편의 영화에서 청년실업 정책으로 다시 태어난 <로제타>

 청년실업자 로제타의 절망의 일상을 차갑게 그려내 벨기에 정부로 하여금 ‘로제타 플랜’을 시행하도록 한 수작 <로제타> 포스터.

청년실업자 로제타의 절망의 일상을 차갑게 그려내 벨기에 정부로 하여금 ‘로제타 플랜’을 시행하도록 한 수작 <로제타> 포스터. ⓒ RTBF & 스튜디오 카날 플러스

제52회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인 황금종려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벨기에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는 한 편의 영화를 넘어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으로 다시 태어나며 기염을 토해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로제타의 뒤를 쫓으며 그 숨결과 시선과 움직임을 '들고 찍기'(핸드헬드)로 완성했음에도 다큐멘터리보다 더 리얼하고 더 절박하게 벨기에의 청년실업을 고발한 이 영화는 이듬해인 2000년 벨기에 정부로 하여금 청년실업 대책인 '로제타 플랜(Rosetta Plan)'을 시행케 합니다.

로제타 플랜은 벨기에에서 2000년부터 정부와 노동계와 기업 간에 시행한 '청년고용할당제'를 말합니다. 이 정책은 50인 이상 민간 기업이 전체 노동자의 3%에 해당하는 청년실업자를 추가 고용하도록 의무화하고 이를 위반하는 기업에게는 1인당 74유로(약 12만 원)의 벌금을 부과한 것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벨기에 정부는 로제타 플랜을 수행하는 기업에는 신규고용 1명당 사회보장 부담금을 분기당 2만 벨기에 프랑씩 감면해 주는 등 당근과 채찍을 병행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로제타 플랜 시행 첫해에 약 5만 건의 고용계약이 체결되었고 벨기에 정부는 1350억 원에 달하는 예산을 투입한 반면 MB 정부는 청년실업 대책이랍시고 행정인턴 1만5000개를 내놓은 게 전부입니다.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노동자나 도시 하층민, 사회적 약자 등 빈민 거주지역이나 파업 현장, 공장 등을 돌며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으로 영상작업을 시작한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형제 감독은 이 영화에 캐스팅되기 전 실제로 실업자였던 18살의 에미릴 드켄을 여주인공으로 자존심 강하고 당당했던 청년실업자 <로제타>가 실업과 가난의 굴레에 짓눌려 무너지는 과정을 차갑게 스크린에 담아냅니다.

손톱 끝에 촘촘히 박힌 가난과 실업의 굴레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직장에서 쫓겨나게 되자 “가장 열심히 일한 내가 해고될 수 없다”며 저항하는 로제타를 경찰이 강제로 끌어내고 있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직장에서 쫓겨나게 되자 “가장 열심히 일한 내가 해고될 수 없다”며 저항하는 로제타를 경찰이 강제로 끌어내고 있다. ⓒ RTBF & 스튜디오 카날 플러스


로제타는 뭇 사내에게 몸을 팔아 먹을거리를 얻는 알코올중독 엄마(앤 에르노스)와 낡고 지저분한 트레일러에서 단 둘이 삽니다. 추운 겨울이지만 한 벌 뿐인 점퍼에 얇은 치마를 입고 다니던 직장에서 정규직 사원을 꿈꾸며 열심히 일했지만 수습기간이 끝나자마자 길거리로 내쫓깁니다. 수돗물은 끊기고, 냉방에 굶주림까지 엄습하자 견디지 못한 로제타는 엄마가 수선한 헌 옷을 내다 팔아 그 돈으로 주식인 와플 한 조각을 사 끼니를 때웁니다.

사느냐, 죽느냐 원초적 생존 앞에서 아귀처럼 오직 일자리만 찾는 로제타에게 어느 날, 일자리가 보입니다. 와플가게 종업원 리케(파브리지오 로지오네)를 만나 그의 소개로 와플 공장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게 됩니다. 로제타와 리케의 이 만남은 그러나 벼랑 끝에 몰린 실업상태가 사실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임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숟가락으로 지렁이들을 파내어선 동네 저수지에서 깨진 병에 지렁이를 넣어 잡은 물고기로 허기를 채우던 로제타를 대신해 저수지에서 병 낚시를 꺼내주던 리케가 진창 속으로 빠져들며 살려달라고 외치지만 로제타는 숲속으로 도망칩니다. 리케가 익사하면 그의 일자리는 내 차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제타는 망설임 끝에 익사직전의 리케에게 나뭇가지를 건네 구해줍니다.

 와플공장 아르바이트를 소개해주고 데이트를 신청하며 살갑게 대해주던 남자친구 리케의 부정을 고자질해 쫓아내고 그의 일자리를 차지한 로제타가 와플가게로 찾아 온 리케에게 담담하게 와플을 팔고 있다.

와플공장 아르바이트를 소개해주고 데이트를 신청하며 살갑게 대해주던 남자친구 리케의 부정을 고자질해 쫓아내고 그의 일자리를 차지한 로제타가 와플가게로 찾아 온 리케에게 담담하게 와플을 팔고 있다. ⓒ RTBF & 스튜디오 카날 플러스


노동의 권리가 곧 생존의 권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로제타는 마침내 비참한 현실과 타협하기에 이릅니다. 아르바이트로 일한 와플 공장에서마저 쫓겨난 뒤 사방팔방 일자리를 찾다 포기한 로제타는 와플가게에서 자기 와플을 몰래 구워 판다는 리케의 말을 듣고 사장에게 고자질해 해고시킨 뒤,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야 맙니다. 리케의 오토바이를 타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데이트를 즐기다 서로에게 한 발자국씩 다가서면서 사랑의 감정을 싹 틔웠지만 생존의 기로에서 연애는 사치일 뿐,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러나 꿈에 부푼 생활도 잠시. 집을 나간 엄마가 산송장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로제타는 질기디 질긴 생존의 끈을 끊으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달걀 한 개를 삶아 먹고, 가스를 열어 엄마와 함께 죽음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가스마저 떨어지고, 관리사무실에 가 가스통을 사들고, 죽음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습니다.

로제타의 절박한 하루하루를 그녀의 '거친 숨소리'에 담아내던 카메라는 삶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역설 속의 분노와 희망을 교차시키듯, 죽음의 가스통을 옮기다가 주저앉으며 참고 참았던 울음을 토해내는 로제타를 일으켜 세우는 리케를 바라보는 그녀의 견딜 수 없는 시선에서, 엔딩 크레딧을 끌어 올립니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로제타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 온 엄마와 함께 자살을 결심하다 와플가게에서 쫓겨난 뒤 주위를 맴돌던 리케가 말리자 형언할 수 없는 눈길로 쳐다보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로제타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 온 엄마와 함께 자살을 결심하다 와플가게에서 쫓겨난 뒤 주위를 맴돌던 리케가 말리자 형언할 수 없는 눈길로 쳐다보고 있다. ⓒ RTBF & 스튜디오 카날 플러스


청년실업, 각자 알아서 살길 찾으라는 나라의 대통령

살아간다는 것, 아니 살아 있다는 것, 아니 살아 낸다는 것의 참담함 속에서 죽음보다 더 무거운 '실업의 무게'를 짊어지고 한 줄기 생존을 찾아 발버둥치는 청년실업자의 일상을 무겁게 그려낸 영화 <로제타>. "나는 단지 당신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이라구요!"라고 호소하는 로제타를 통해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세상과의 투쟁은 신자유주의의 삭풍이 유럽도 비켜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해줍니다.

유럽이 그럴진대 하물며 대한민국은? 통계청이 12일 발표한 <2009년 10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청년실업률은 7.5%로 전체 실업률 3.2%의 두 배를 넘고 있으며, 비경제활동인구의 비중은 전체의 52.3%로 사상최대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청년실업의 현주소를 보여 주고 있는 셈입니다.

현실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은 16일 방송된 라디오연설에서 "(청년실업 문제는) 청년들이 패기를 갖고 벤처기업을 창업하고, 중소기업과 해외 일자리에 더 많이 도전하는 것이 해법"이라며 당사자들이 알아서 하라는 식의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줬습니다. 이 대통령의 이런 청년실업관은 사실 올해 초 SBS가 주최한 '대통령과의 원탁대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에서 이미 드러났습니다.

당시 토론회에 패널로 참여한 서울대 조국 교수가 이 대통령에게 "벨기에처럼 한국판 로제타 플랜을 실시할 계획이 없느냐"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조 교수는 MB 정부의 청년실업 해소 방안인 '행정인턴제'는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라며 로제타 플랜을 제안했으나 이 대통령은 꿈적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음 날 열린 장·차관 워크숍에서 "그 교수는 임시직을 안 해 봐서 하는 소리"라며 "임시직이더라도 굶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라고 불쾌감을 토로한 후문이 보도되어 저잣거리에 '역린을 건드렸으니 조 교수에게 후과가 따를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를 질펀하게 싸질렀습니다.

청년들의 울림이 클수록 '한국판 로제타 플랜' 시행될 수 있어

불과 석 달 뒤면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또 다시 '한국판' 로제타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옵니다. 상위 1%를 위해 헌신하는 정부와 사람 값어치 깎는 데 혈안이 돼 있는 기업들이 혈맹을 맺은 나라에서 이들 한국판 로제타들이 영화 <로제타>에서 로제타가 절규한 것처럼 "왜 이렇게 살아남기 어려운 걸까. 번듯하지 않아도 좋아 직장만 있다면. 절망의 늪에 빠져 보지 않았다면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위로 따윈 입 닥쳐!"라고 맞대거리 한다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과 이성을 지키라고 충고할 자격이 있을까요?

 로제타의 병 낚시를 꺼내다 저수지에 빠져 익사 일보직전에서야 로제타가 건네 준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간신히 살아 나오는 리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로제타는 정말 리케를 죽이려고 한 것일까?

로제타의 병 낚시를 꺼내다 저수지에 빠져 익사 일보직전에서야 로제타가 건네 준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간신히 살아 나오는 리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로제타는 정말 리케를 죽이려고 한 것일까? ⓒ RTBF & 스튜디오 카날 플러스


로제타의 이 외침은 남자친구 리케를 저수지에서 죽이려 한 장면에서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엄마가 가출하기 전 몸싸움을 하다 저수지 진창에 빠져 간신히 살아나온 로제타가 단순히 미끄러져 리케를 놓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수지에 빠지면 죽을 수 있다는 점을 로제타는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점점 진창 속으로 빠져들며 "로제타! 살려줘!"를 연신 외치는 리케의 비명을 듣자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로제타의 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가난하지만 엄마가 몸을 팔아 얻어 온 스테이크를 내다버리고 생활보조신청도 거부할 정도로 당당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로제타가 일자리를 얻기 위해 살인도 저지를 수 있다는 이 대목은 '실업으로 인한 절망'의 끝자락이 어느 정도인지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마치 실업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버둥대면 댈수록 천천히, 아주 천천히 깊이를 알 수 없는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청년실업의 유예정책에 불과한 인턴제나 노동비용 삭감으로 변질된 일자리 나누기(잡세어링) 등은 '기업 프렌들리'라는 가이드라인을 결코 넘어서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고용 없는 성장으로 일자리의 양은 물론 질도 떨어진 상황에서 한국판 로제타들이 만년 실업자나 비정규직으로 내몰리지 않으려면 '한국판 로제타 플랜(청년고용할당제)'를 도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한국판 로제타들이 정부와 기업이 청년고용할당제를 시행하도록 청년의 목소리를 조직하여 큰 울림으로 광장을 뒤흔들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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