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겉표지
▲ <흔적> 겉표지
ⓒ 랜덤하우스

관련사진보기

퍼트리샤 콘웰의 2004년 작품 <흔적>은 '스카페타 시리즈'의 13번째 작품이다. 첫 작품 <법의관>이 발표된 것이 1990년이니까 무려 15년 동안 이 시리즈를 이어온 것이다.

주요 등장인물들에게도 그 시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커다란 변화는 11번째 작품 <마지막 경비구역>을 전후로 해서 일어난다. 퍼트리샤 콘웰은 그동안 자신의 작품 속에서 주인공 주변 인물들을 계속해서 죽여왔다.

하지만 9번째 작품 <카인의 딸>에서 FBI 프로파일러이자 스카페타의 연인인 벤턴 웨슬리가 죽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 못했을 것이다. 스카페타 시리즈의 팬이라면 예상은 고사하고 벤턴의 죽음조차 원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퍼트리샤 콘웰도 벤턴의 죽음을 놓고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자신이 만들고 10년 가까이 키워온 캐릭터를 자신이 죽인다는 것도 꽤나 마음 아픈 일이다. 결국 살인범에게 벤턴이 고문 끝에 살해당한다는 초강수를 두었지만, 이건 어쩌면 '장고 끝의 악수'였을지도 모르겠다.

벤턴이 죽고 나서 콘웰은 수많은 독자들에게 '왜 벤턴을 죽였냐?'라는 항의를 받았을 것이다. 스카페타 옆에 벤턴이 없다는 것이 상상이 안되고, 벤턴이 없는 스카페타 시리즈도 타이어가 펑크난 채 달려가는 자동차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15년 동안 변화해온 스카페타 시리즈

독자들의 항의는 둘째 치고, 콘웰 자신도 벤턴이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허전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12번째 작품인 <데드맨 플라이>에서 벤턴을 다시 살려낸다. 아니 애초에 죽지도 않았으니 다시 살아났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겠다. 정부기관이 벤턴에게 전혀 다른 이름과 신분을 정식으로 주고, 벤턴은 죽은 것으로 위장해왔다. 무려 5년동안.

<데드맨 플라이>에서 벤턴이 이렇게 살아서 다시 나타날거라는 것도 아무도 상상 못했다. 절벽 밑으로 떨어져 죽었지만 '알고 보니 살아있었더라'라며 귀환했던 셜록 홈즈처럼, 벤턴도 다시 무대로 돌아온다.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우연히 벤턴을 발견한 스카페타는 무릎이 휘청 꺾이는 충격을 받는다. 놀랍기는 독자들도 마찬가지다. 콘웰은 자기 작품들 속 그 어떤 반전보다도 더욱 대단한 대형 반전을 만들어낸 셈이다.

콘웰이 왜 벤턴을 다시 살려냈는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죽일 때처럼 살릴 때도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90년 이후로 콘웰은 매년 한편씩 스카페타 시리즈를 발표해왔다. 하지만 <마지막 경비구역> 이후로 <데드맨 플라이>가 나올 때까지는 3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큼 고심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또 한 가지 중요한 변화는 시점이다. 1편부터 꾸준히 사용해왔던 1인칭 주인공 시점을 버리고, <데드맨 플라이>에서부터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도입된다. 사건의 스케일도 점점 커지고 주요 등장인물들도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각기 다른 일들을 동시다발적으로 해나간다. 그런 상황을 제대로 묘사하려면 3인칭 도입도 불가피한 일이다.

현직을 떠난 스카페타와 마리노

아무튼 이런 변화가 마무리되고 시리즈의 4인방인 스카페타, 마리노, 벤턴, 루시가 13번째 작품 <흔적>에서 제대로 뭉치게 된다. 버지니아주 법의국장 자리에서 쫓겨난 스카페타는 플로리다에 새롭게 정착했다. '마지막 경비구역'이라는 사설 수사기관을 설립한 루시는 연예사업에도 손을 대고 있다.

형사직을 그만둔 마리노는 스카페타와 함께 컨설턴트 일을 하고 있고, 벤턴은 새로운 자신만의 아파트에서 뭔지 모를 사건을 담당하고 있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어김없이 사건은 발생한다.

스카페타는 새로 부임한 버지니아주 법의국장에게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약 2주전, 열네 살짜리 여자아이가 침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사망하기 전에 감기를 앓았는데 분명한 사망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부검도 해보았지만 정확한 사인을 모르겠다. 그러니 스카페타 박사가 버지니아에 와서 자문해달라. 이런 내용의 전화다.

자신이 예전에 열정을 가지고 일했던, 하지만 이제는 쫓겨나버린 곳으로 잠시 초대받았으니 오만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것이 당연하다. 스카페타는 거절하고 싶지만 상대방이 워낙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결국 스카페타는 마리노와 함께 버지니아주 법의국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엉망으로 변해가는 법의국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새로운 국장이 어떤 인물인지 모르겠지만, 스카페타가 있던 시절과는 달리 여러가지 면에서 통제가 안되는 듯 보인다. 그런 와중에서 스카페타는 죽은 여자아이의 시신을 직접 부검하는데...

버지니아로 돌아온 전직 법의국장

스카페타 시리즈의 특징 중 하나는 생생한 인물들이다. <흔적>에서도 마찬가지다. 마리노와 루시는 자신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스카페타는 섬세하고 상처받기 쉽다. 벤턴은 언제나 냉정침착하다.

사건이 터졌지만 이전 작품들과 달리 스카페타와 마리노는 의외로 여유있어 보인다. 그것은 그들이 모두 현직을 떠났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범인의 성향과도 연관이 있다. 예전에 스카페타와 마리노는 세계적인 범죄조직, 테러단체와 대결했던 적이 있었다. <흔적>에서는 그러지 않는다. 범인은 무언가 사소한 동기를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단독범일 뿐이다.

귀환한지 얼마되지 않아서인지 이 작품에서 벤턴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콘웰이라면 이후 시리즈에서 벤턴에게 어울리는 배역과 자리를 정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시리즈의 4인방은 서로를 깊이 아끼지만 때로는 티격태격한다. 이들이 팀웍을 이뤄가며 하나씩 사건을 해결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 스카페타 시리즈의 진정한 매력은 이 부분에 있다.

덧붙이는 글 | <흔적> 퍼트리샤 콘웰 지음 / 홍성영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



흔적

패트리샤 콘웰 지음, 시공사(1996)


태그:#흔적, #퍼트리샤 콘웰, #스카페타 시리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