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은 했지만 대통령은 아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이지만 사실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지난 달 29일 헌법재판소의 미디어법 판결을 조롱한 패러디 글 일부입니다. 절차와 과정의 정당성이 없는 결과는 정당성을 얻기 힘들다는 게 민주주의의 정신이라고 한다면 헌재의 결정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죽은 셈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한나라당이 미디어법 날치기에 사생결단을 하고 헌재가 맞장구를 쳐줌으로써 미디어 시장을 재벌 대기업에 '예속'시켜 언론을 경제 권력의 논리로 '길들이'는 한편 조중동을 중심으로 한국 언론을 재편하여 한나라당의 정권 재창출을 도모하려는 신보수주의의 무한팽창 시대의 전주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미디어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킨 한나라당과 파트너 조중동의 '로망'은 같은 반도의 땅 이탈리아의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난해 4월 치른 이탈리아 총선에서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우파 연합이 압승을 거두면서 세 번째로 총리직에 취임한 베를루스코니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밤새워(?) 분석하고 연구해 벤치마킹할 만한 인물입니다.

특히 족벌언론을 뛰어 넘어 '미디어 권력'을 꿈꾸는 조중동에게 언론재벌 베를루스코니는 살아 있는 교과서입니다. 조중동에게 미디어는 정치적, 경제적 이익과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이자 지배블록을 공고히 다져주는 지상 최대의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권력이여, 영원하라~'라는 슬로건 앞에 조중동식 미디어는 '친구' 아니면 '적' 둘 중 하나일 뿐, 민주주의나 국민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미디어가 누구의 손에서, 어떻게 운영되는가에 따라 한 국가의 운명과 국민의 삶이 극에서 극으로 갈라지는 시대에 언론의 자율성과 객관성이라는 언론 본연의 역사적 책무가 정치권력과 자본 앞에 무너지면 이는 '언론의 거세'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여론의 거세이자 진실과 정의의 거세입니다.

60년 정치인생 동안 총리만 7번, 줄리오 안드레오티

 이탈리아의 부패한 정치권력의 이면을 파헤친 영화 <일 디보>의 포스터 장면

이탈리아의 부패한 정치권력의 이면을 파헤친 영화 <일 디보>의 포스터 장면 ⓒ 일디보

'언론의 거세'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거세'하는 대신 미디어 권력의 부활을 예고하고 미디어가 부패한 권력에 휘둘려 다시금 미디어 권력을 어떻게 재창출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탈리아 영화 <일 디보>입니다.

베를루스코니로 대변되는 이탈리아 미디어 권력의 뿌리는 이탈리아에서 60년간 정치를 하는 동안 총리만 7번한 줄리오 안드레오티로 귀결됩니다. 올해 90살로 이탈리아 종신 상원의원이기도 한 그는 지난 2006년 베를루스코니의 우파연합이 상원 의장후보로 밀기도 한 인물입니다. 베를루스코니의 전신(前身)이라 해도 무방한 안드레오티. 오늘 영화 <일 디보>의 주인공입니다.

<일 디보>를 통해 한국의 미디어법 사태를 읽기 위해서는 먼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라는 인물에 대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베를루스코니는 밀라노의 한 지방 부동산 개발업자로 시작해 시 외곽에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면서 떼돈을 번 전형적인 건설업자였습니다. 돈 세탁과 탈세 및 공무원 매수 등으로 법원을 들락거리다 98년에는 2년 9개월의 징역형까지 선고 받았습니다.

언론사업 등으로 영토를 확장한 끝에 이탈리아 3대 민영방송, 인터넷 미디어 그룹인 '뉴미디어', 잡지 '파노라마'를 비롯한 출판 그룹, 영화제작 및 배급사인 '메두사', 전국 최대의 슈퍼마켓 체인, 프로축구단 'AC 밀란' 등을 보유한 이탈리아 최대 재벌대기업, '베를루스코니 왕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멀티미디어 대재벌인 핀인베스트 회장이던 94년, 전진 이탈리아당(FI)을 창당해 국민연합, 북부리그 등과 우파 연정을 출범시키면서 첫 총리가 되는 베를루스코니는 총리가 되자 검찰의 부패 추방(마니폴리테, 깨끗한 손) 수사를 중단시킵니다. 마니폴리테는 정치권력의 부패를 조사했고, 베를루스코니도 해당자였습니다. 총리가 된 그의 숙청대상 목록 제1호는 당연히 검찰이었습니다.

베를루스코니는 검찰의 사정 수사가 총리인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자기 소유의 TV 네트워크와 막강한 권력을 총동원해 공격적 방어에 나섭니다. 이 같은 미디어 권력의 십자포화로 결국 마니폴리테의 기수인 안토니오 피에트로 검사는 뇌물수수 혐의로 옷을 벗습니다.

피에트로 검사의 고백입니다.

"1994년 (베를루스코니의) 언론은 부패를 조사하는 검사를 무차별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과장, 허위, 왜곡 등 마음대로 썼다. 그 전까지 국민들은 모두 검사의 편이었다. 그러나 썩은 언론의 비난이 이어지자 등을 돌렸다. 언론의 위력이었다."

미디어법 개정 이유는 언론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 어디서 들어봤더라

 이탈리아에서 60년간 정치를 하면서 총리만 일곱번 한 줄리오 안드레오티(토니 세르빌로분)는 올해 90살로 이탈리아 종신 상원의원이자 미디어 권력의 화신 실베오 베를루스코니의 스승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에서 60년간 정치를 하면서 총리만 일곱번 한 줄리오 안드레오티(토니 세르빌로분)는 올해 90살로 이탈리아 종신 상원의원이자 미디어 권력의 화신 실베오 베를루스코니의 스승이기도 하다. ⓒ 씨네 21


그 뒤 베를루스코니는 스스로 면책특권을 부여합니다. 마니폴리테의 뇌물수수 등 범죄혐의가 휴지조각이 된 것은 당연지사. 이번에는 신문까지 거머쥐기 위해 방송사업자가 점유율에 상관 없이 신문사를 사들일 수 있도록 법을 고칩니다. 이 법안을 통과시킬 때 그가 내세운 논리가 언론 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였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소리 아닌가요?

영화 시작 전 이탈리아 용어집 자막이 나오는 <일 디보>. '프로파간다 P2 로지 : 반공산주의 비밀결사체. 냉전기간에 창단. 회원 972명. 정치인, 기자, 사업가, 군인, 정보기관 요원들로 독재정권 수립이 목적.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도 회원.'

이어서 줄리오 안드레오티(토니 세르빌로)의 짧은 회상으로 시작하는 <일 디보>. 마피아에 의해 살해당하는 은행가, 기자, 경찰청장, 치안판사. 모두 안드레오티가 내무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숨진 이들입니다. 그리고 붉은 여단에 납치당해 살해되는 기독민주당 총재 알도 모로까지. 마치 갱스터 장르의 걸작 <대부>를 보듯이 숨가쁘게 전개됩니다.

그리곤 깊은 밤. 일곱 번째 총리직 복귀를 앞두고 경호대의 호위를 받으며 도심을 걷는 기독민주당 총재 안드레오티 총리. 지나가던 벽면에 길게 적힌 '학살과 음모는 크락시와 안드레오티의 작품'이라는 글귀 앞에 잠시 멈춰 뚫어져라 본 뒤, 스쳐 지나갑니다.

여기까지 채 10분도 안 된 상영시간이지만 <일 디보>의 절반 이상을 본 것이나 진배 없습니다. 이탈리아 최고 권력과 마피아와 마키아벨리의 현신으로 일컬어지는 안드레오티의 정치 역정을 함축해 주기 때문입니다. 아, 또 있군요. '안드레오티가 다스리는 신성제국에 살고 있다'고 강조하는 그의 참모들까지.

마피아의 총구로 각 방면의 정적을 가차 없이 살해하는 총리. 대통령을 최종 정치 목표로 한 총리. 핵심 참모들과 각료들을 나무가 자라기 위해 필요한 거름 정도로 치부한 총리. 그러면서도 총리실을 내방해 선물을 하는 국민들에게 답례품과 돈까지 주며 환대하는 총리. 음모와 소탈함이 교차하는 두 얼굴, 마키아벨리의 현신답습니다.

'파반느 50번'부터 까미유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가 흐르는 가운데 상원에서 선출하는 대통령투표. 정적을 교통사고로 위장해 제거하지만 스칼피오가 당선하고 안드레오티는 대통령에서 떨어집니다. 그리고 마니폴리테 수사에 따른 정치가들과 기업인들의 연이은 자살 행렬….

마니폴리테 수사에 따라 결국 안드레오티는 조사위원회에 출두해 하루 종일 진술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답변은 "기억 안 납니다." 조사위원회에서 드러난 사실 하나. 이탈리아 최고 권력의 헤게모니를 쥐락펴락하는 이너서클 'P2 로지'의 실제 수장이 안드레오티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뇌물수뢰죄와 살인교사죄 등으로 안드레오티는 결국 법정에 서게 됩니다.

영화는 엔딩 크레딧 직전에 자막을 올리며 재판 결과를 알려 줍니다. 하급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기도 하지만 결론은? 프로체스 팔레르모(마피아 재판)과 이탈리아 대법원은 안드레오티의 뇌물수뢰죄는 물론 246명에 이르는 살인교사죄에 대해서도 2003년 10월 30일 무죄를 선고합니다.

줄리어스 시저의 별명 '일 디보', 신이 내린 사람이라는 뜻

 이탈리아 검찰의 마니폴리테 수사에 따라 안드레오티가 법정에 출두하면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이탈리아 검찰의 마니폴리테 수사에 따라 안드레오티가 법정에 출두하면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 일디보


<일 디보(IL Divo)>. 줄리어스 시저의 별명이기도 한 이 말은 이탈리아어로 '신이 내린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팝페라 그룹 '일 디보'가 '남성 디바'를 의미한다면, 안드레오티는 '정치가 디바'쯤 될까요? 정치가들의 격언 하나.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라.' 반면, 안드레오티는 이렇게 말합니다. '침묵하려면 자신에게도 침묵하라'고. 침묵만이 권력의 화신인 자신을 위장하는 '검은 정치'의 속성이니까요.

좌와 우로부터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전설 같은 정치가를 다룬 영화라서일까요? <일 디보>는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습니다. 장면 하나 하나에 클라이맥스 수준의 긴장감을 농축시킵니다. 미장센을 위한 영화마냥 소품과 클래식 음악과 배경까지 완벽하게 구성해 놓습니다. 영화를 '본다'기보다는 '직시'하지 않으면, 스크린을 쫓아가기 어려울 정도로 현란하며 압축적입니다.

그런 한편 영화는 장르 영화의 기법을 충실히 묘사합니다. 안드레오티의 참모들과 마피아들이 슬로우 모션으로 온갖 똥폼을 잡으며 등장하는 모습은 낄낄거리게 합니다. 그런 이들이 정치 공작과 정적 살해 등을 할 때는 가차 없이 잔혹합니다. 팝과 클래식이 절묘하게 배합된 경쾌한 리듬은 블랙코미디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색깔이 분명합니다. 구부린 등, 비쭉 솟은 귀, 포커페이스의 달인 같은 얼굴. 영화는 그런 모습의 안드레오티에 걸맞게 이탈리아 정계의 이면을 폭로하면서 '검은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유력일간지 발행인이 총리실에서 그와 나누는 대담은 그 중에서도 백밉니다. "총리는 둘 중에 하나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영리한 범죄자거나(한 번도 잡히지 않았으니까), 아니면 역사상 가장 박해받는 사람이다." 안드레오티의 화답은? "선을 지키기 위해 권력으로 악을 행한다."

이런 안드레오티의 지배 권력을 향한 음모와 지략과 정적 제거 수법과 전통은 고스란히 베를루스코니에게 전수됩니다. 1992년부터 시작된 마니폴리테 개혁 돌풍에 위기감을 느낀 이탈리아 극우 세력과 보수 기득권층은 새로운 선택을 합니다. 미디어를 통한 대중여론 조작으로 정치권에 혜성같이 등장한 베를루스코니였습니다.

2000년 총선에서는 경제 불황에 찌든 국민들을 향해 언론과 TV 드라마와 연예프로까지 총동원합니다. 캐치프레이즈는 두 가집니다. '당신들도 나처럼 부자가 될 수 있다'와 '강한 이탈리아 건설.' 선거 결과 이탈리아 유권자들은 국가적 자존심을 세워줄 지도자로 베를루스코니를 선택했습니다.

그렇다면, 2009년 대한민국 미디어법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미디어법 헌법재판소 한나라당 조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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