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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대항쟁 당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역사는 이들을 보듬어주지 못했다.
▲ 부상자를 옮기는 학생들 건대항쟁 당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역사는 이들을 보듬어주지 못했다.
ⓒ 10.28건대항쟁계승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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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록되는 자와 누락되는 자

역사란 무엇일까? 고등학생 시절 배웠던 국사 교과서를 마음 속으로 다시 펼쳐보자. 어떤 이는 역사란 현재까지의 모든 사건들의 합이라 말하고 어떤 이는 의미 있는 사건들이 선택되는 것이라 말한다. 역사의 구심점을 놓고서도 어떤 이는 영웅으로 불리는 리더의 기상을 드높이며 어떤 이는 이름 없는 백성들을 중심에 놓아 민중사관이란 이름을 짓기도 한다. 역사서를 저술하는 '이념'에 비추어보면 일본 우익이라는 사람들은 식민지배를 반성하지 않으며 적반하장 격으로 되레 우리더러 감사를 느끼라 한다. 보수의 탈을 쓴 뉴라이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일본 우익의 생각을 반성없이 베끼기에 혈안되어 있다.

우리의 얼룩진 현대사와 우리의 왜곡된 역사 교과서는 민주정부가 출범하면서 이북 지도자의 독립운동이 기술되기 시작했고 제주 4.3사건과 같은 역사의 오명을 뒤집어썼던 비극도 민주주의의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한때 영웅으로 불리던 자들은 독재자의 이름으로 냉정히 재평가된다.

이명박 정권. 민정당의 후신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고 다시 권력을 탐하면서 민주주의는 다시 붉은 낙인으로 찍히려 한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는 법. 교육의 힘이 아무리 크다 한들 진실의 힘만 못한 법이다. 역사를 변혁한 386세대가 반공사상의 유신교과서로 공부했던 사실이 그 방증이다.

앞서 '선별'이라는 얘기를 했었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어 역사에는 기술되지 못하였지만 우리의 현대사를 논할 때 꼭 빠질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있다. 황석영씨의 <오래된 정원>에 등장했던 사건. 반독재 자주통일 외쳤던 수천 명 대학생들의 처절한 아우성. 바로 1986년 10.28 건대항쟁이다.

비록 2009년을 살아가는 많은 국민들, 심지어 건대 학생들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날의 함성과 결의, 그 목적성과 저항은 전국적 대학생 구성체의 시초이자 1987년 6.10 함성의 핵이었다. 이번 연재기사를 통해 그 사건을 재조명하려 한다. 아직 경험이 미숙하여 깊이가 부족하지만 항쟁 선배님들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 펜을 잡겠다.

건대항쟁의 주축, '애학투련'

건대항쟁의 농성 과정과 당사자 증언, 이와 관련한 전두환 정권의 계략과 같은 심층적 내용은 다음 회부터 상세히 연재하도록 하고 항쟁에 대한 기본적 소개부터 하는 것이 순서겠다.

건대항쟁의 주축이 되었던 애학투련은 누구일까? 흔히들 <민청학련>이나 <전대협>과 <한총련>은 기억하지만 애학투련이라는 이름은 낯설어 한다.

애학투련은 1980년 전두환의 광주학살 이후 불씨가 붙게 된 한국의 학생운동 과정에서 생겨난다. 광주 학살의 배후가 미국이라는 풍문이 암암리에 퍼져나가고 이때의 민중운동은 이론과 노선 정립을 위한 활동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결과물이 흔히 자민통이라고 하는 '자주' '민주' '통일'이다. 이는 한국변혁운동의 3대 좌표가 되어 반미자주화투쟁이 전개의 핵심이 된다.

노선 정립 후 대학생들은 전두환 정권에 맞서 전국적 대학생 조직 결성의 필요성을 느끼고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흔히들 현대적 관점에서 과거 운동권 세력을 분석할 때 같은 맥락의 노선과 지향점이 있기에 표현 자체의 낯설음은 덜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우리 민족이 남북으로 갈린 이후 최초의 한국변혁이론을 통한 노선을 기반으로 만든 단일 전국적 대학생 연합체의 결성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계보로 치자면 애학투련은 이후 <전대협>과 <한총련>, 그리고 현재의 <한대련>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또한 장기집권을 위해 반공논리를 더욱 강화하던 전두환 군부를 향해 '반공이념 분쇄'라는 공격적 구호는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 명분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레드 콤플렉스가 만연한 사회에서 전두환 정권은 역으로 좌익용공분자로 매도할 준비를 착실히 해나갔다.

애학투련 발족선언문

(1)애학투의 투쟁목표

하나, 미제의 식민지 통치를 분쇄하고 그 앞잡이 전두환 군부독재를 타도하여
민족자주와 민중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한다.

둘,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침략을 분쇄하고 민족의 자립화를 이룩한다.

셋, 전두환 일장의 독재정치를 타파하고 사회의 민주화를 이룩한다.

넷, 한반도의 분단구조를 철폐하고 한민족의 염원인 조국통일을 실현한다.

다섯, 우리 4천만 민중의 민주적 권익을 옹호하고, 교육의 자주화와 민주화를 이룩하며 진보적인 교육제도를 쟁취한다.

여섯, 우리 4천만 민중의 민주적 권치 쟁취투쟁에 적극 동참한다.

일곱, 모든 민족 민주세력과 광범히 연대하여 함께 투쟁한다.

여덞, 세계의 평화를 옹호하며 제국주의의 모든 호전적 침략을 분쇄한다.

(2)과거 투쟁조직의 오류를 극복하는 선언

"지난 85년 전학련, 삼민투는 백만학도들에게 일방적으로 따라 줄 것을 강요하여 고립되어 버렸으며 진정 우리 백만학도 모두와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대표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폭력적인 투쟁에만 매달려 스스로 고립됨으로서 적들의 탄압에 그만 붕괴되어 버렸습니다." 이에 애학투는 이러한 과거의 오류를 극복하고자 대중적인 공개투쟁 기구로서의 애학투의 위상과 그 조직원측을 다섯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하나, 애학투는 일부의 학우들 것만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전체 애국학도의 단체이다. 따라서 각 지역마다 단위를 구성하여 그곳에서 민주적 과정에 의해 선출된 대표들로서 지도부를 구성한다.

둘, 민주집중제의 일반적 원칙을 철저히 준수한다.

셋,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그에 대한 공개적 논쟁을 통하여 강력한 사상의 통일을 이룩한다.

넷, 행동통일의 원칙을 지키고 그 전제하에 비판할 점을 과감히 비판한다.

다섯, 작은 차이를 내세워 분열을 초래하는 자세를 척결한다. 이러한 원칙을 제시하며 한편으로 애학투에 불참한 '제헌의회 소집'을 주장하는 학우들에게 단결과 동참을 촉구하고 있다.

1288명 '공산혁명분자'로 몰려 구속

1986년 10월 28일 전국 단위 26개 대학에서 구성된 애학투련 대학생들은 건국대로 향했다. 정보를 입수한 전두환 정권은 즉각적인 공권력 투입을 결정했다. 학교를 감싸며 진압을 시작하는 전경을 향해 위협을 느낀 애학투련 소속 대학생들은 사회과학관, 학생회관, 본관, 도서관, 교양학관에 연합점거농성을 시작했다. 계획농성이 아니었기에 애학투련 대학생들은 추위에 떨고 굶으며 농성을 이어나가야 했다.

'안전귀가보장'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을 경찰은 신경쓰지 않았다. 사흘 후 '황소30'이라는 이름의 진압작전으로 애학투련 대학생들은 무차별 폭력진압을 당했다. SY44 최루탄이 끊임없이 발사되고 사다리, 입구를 통해 전경들은 진입했으며 소방차는 물을 내뿜고 헬기는 쉴새 없이 소이탄을 투하했다. 이와 같은 전방위적 입체 진압에 대학생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불과 90분만에 상황 종료된다.

헬기 2대가 저공비행하며 소이탄을 투하했는데, 국내 시위진압에 헬기가 사용된 첫 사례였다. 이후 한총련 사태, 평택 쌍용차 사태에서 헬기가 사용되기도 했다.
▲ 헬기 진압 헬기 2대가 저공비행하며 소이탄을 투하했는데, 국내 시위진압에 헬기가 사용된 첫 사례였다. 이후 한총련 사태, 평택 쌍용차 사태에서 헬기가 사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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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밤, 나흘 낮 66시간 50분 동안 진행된 이 항쟁으로 1447명이 연행되고 이 가운데 1288명이 '공산혁명분자'로 몰려 구속됐다. 역사상 단일사건으로는 최대의 연행, 구속사건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각본 아래 건대항쟁은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난동사건(건대사태)'으로 둔갑되었고 방송과 신문은 이를 그대로 보도했다. 이 기세를 힘입어 금강산 댐 수공설을 퍼뜨린 전두환 정권은 반공의식 확산과 이를 통한 정권의 유지에 힘을 기울였다. 이때 천 만 명의 인원에 달하는 북한 규탄대회가 일어날 정도로 전두환 정권의 계략은 성공적이었다.

'자주' '민주' '통일'의 기치를 내걸고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던 애학투련은 순식간에 공산혁명분자로 몰리게 된 것이다. 이들의 발족 선언문, 구호, 유인물을 살폈을 때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란 용어도 없으며 북한을 찬양하는 내용도 찾아볼 수 없는데도 말이다.

건대항쟁 당시 경찰은 헬기, 소방차 등을 투입하여 90분만에 진압했다.
▲ 진압된 대학생들 건대항쟁 당시 경찰은 헬기, 소방차 등을 투입하여 90분만에 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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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역사를 뒤돌아 볼 때 자주국가를 향한 헌신은 늘상 고무적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 이르러 반공의식과 친미적 외교로 인해 자주국가를 위한 노력은 빨갱이 낙인이 찍히기 일쑤였다.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 그들이 국가발전에 얼마만큼 기여를 했건 간에 그들은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통일을 반대하며 자주외교에 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모순과 부조리가 만연한 우리의 현대사를 민중사관으로 비추어볼 때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국민들의 노력을 헛되이 흘리지 않았으면 한다. 아니, 결코 흘려보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태그:#10.28, #건대항쟁, #애학투련, #건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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