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자매들은 고향집에 모이기만 하면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자매들과 엄마랑 모여앉아 시간 가는 줄을 잊곤 했다. 각자 멀리 떨어져 살다가 한 자리에 모이면, 마치 미루었던 숙제라도 하는 것처럼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하느라 침을 튀겼고 수다로 회포를 풀었다.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거듭해도 새로운 이야기인양 주거니 받거니 했고 그저 함께 하는 시간이 좋고 또 가는 시간이 아쉬워 밤을 새우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처럼 모이면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렇게 모이면 연례행사처럼 그랬다.

 

이번 추석에는 서울에 있는 언니네도, 서창에 사는 바로 밑에 동생네도, 먼 이국땅에 사는 막내 여동생네도 참석 못하고 울산에 사는 남동생가족과 부산 넷째 동생부부, 그리고 우리 부부가 거제도 부모님 집에 모였다. 일곱 남매가 각자 떨어져 살아가면서 한꺼번에 모이기란 이렇듯 쉬운 일이 아닌가보다.

 

일곱 남매가족들이 다 모이면 지붕이 떠나갈 듯 들썩들썩하겠지만 그럭저럭 모이니 화기애애한 가운데 얘기꽃을 피우며 하얗게 밤을 새우면서 즐거워했다. 어린 조카 지혜를 만난 남편은 지혜사랑 듬뿍 받으며 즐거워했고 부모님은 손자손녀가 나날이 달라져가는 모습에 흐뭇해했다. 모두들 잠든 후에도 엄마랑 올케랑, 나랑, 넷째동생이랑 네 여자는 새벽 늦게까지 도란도란 얘기하며 늦게까지 깨어 있었다.

 

다음날은 마침 주일이어서 조금이라도 자야했다.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못다 한 이야기는 내일 또 하자며 새벽 늦게야 우린 잠이 들었다. 새벽 일찍 남동생네 식구들은 울산으로 돌아가고, 주일아침엔 온 가족들이 함께 정든 교회로 향했다. 마을 한 가운데 바닷가에 면해 있던 옛 교회에서 지금 있는 교회로 옮겨간 것은 꽤 오래되었다. 지난 98년도에 옮겼으니 10년도 더 넘은 것 같다.

 

추억 많은 고향교회에서 친구를 만나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다녔던 정든 교회에서는 얽힌 추억도 많다. 교회가 우리 마을에 생기기 전에는 면소재지에 있는 교회로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6학년까지 고개 넘어 걸어서 다녔고 1978년, 중학교 1학년 되던 해부터 처음으로 마을에 교회가 생겨서부터는 고향교회에서 키가 자라고 마음이 자랐던 깊이 정든 교회다.

 

부모님이 오랫동안 타 지역에서 지내는 동안 고향마을도 교회도 잊고 지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들어가 사시면서부터 내 발걸음도 활발하게 고향마을에 닿기 시작했다. 지금의 교회는 마을로 접어드는 바로 입구에 있어 고향에 오면 맨 먼저 우리를 반겨서 좋다.

 

무릎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정든 교회, 지금 있는 교회는 어렸을 적부터 정들어온 옛 교회는 아니지만 그 교회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고향교회라는 것만으로도 어린시절 추억이 떠오르고 애착이 가는 곳이다. 발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교회에 얽힌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고향교회라 절로 마음 가는 교회다.

 

부모님이 또 이 교회에서 예전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니 더더욱 그렇다. 십대 초반에서 십대 후반까지 정이 들었고 추억이 쌓인 고향마을의 교회...우린 한 차 가득 타고 가 교회안마당에서 내렸다. 많은 차들이 주차해 있는 걸 보니 객지에서 고향을 찾은 사람들이 제법 많은가보다.

 

찬송소리가 들려오는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낯익은 얼굴, 반가운 얼굴이 바로 앞에 있다. 친구 영희였다. 이게 얼마만인가. 수년 전에 만났던 이후, 전화 통화를 한지도 벌써 3년이 훨씬 지났다. 어쩜, 몇 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고향친구란 어제 만났던 것처럼 친근하고 편안하다. 어제도 그제도 우린 만나왔던 것처럼 은근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내가 먼저 발견하고선 "영희야!" 하고 불렀고, 친구는 "어머!"하면서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예배가 곧 시작할 시간이라 "예배 마치고 보자!" 하고 우린 예배실로 들어섰다. 남편과 나는 친구와 인사를 주고받느라 먼저 교회 안에 들어간 부모님 곁에 나란히 앉았다.

 

참 오래만이다. 어릴 적부터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성가대원도 하고 학생회 활동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보냈던 그 시절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예배를 마친 뒤 교회 1층 식당에서 모두 모여 점심을 먹으면서 친구랑 그동안 밀렸던 얘기를 나누었다.

 

친구는 10월 말 경이면 미국으로 들어간단다. 국내에 있을 땐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아도 잘 살고 있겠거니 하며 살아왔지만 막상 국내를 떠나 먼 이국땅으로 간다고 하니 마음이 애틋해진다. 살아가는 동안 또 다시 친구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에 마음이 짠하다.

 

서로 또 연락하자며 전화번호를 주고받고 헤어졌으나 내내 마음속에 친구가 남아 있다. 이 친구는 우리 마을에서 열 명의 여자동창들 중에 유일하게 우리 둘이서만 교회를 다녔고, 우리 마을에 교회가 없었던 시절엔 걸어서 재를 넘어 면소재지에 있는 교회까지 걸어서 다녔었던 친구다.

 

마을에 교회가 들어서서는 함께 교회생활을 해왔던 친구라 추억도 많고 어떤 친구보다 애틋한 정이 든 친구다. 밝고 긍정적인데다가 악기란 악기는 거의 못하는 것이 없고, 언제나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런 친구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라 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아쉬웠다. 곧 미국으로 들어간다 하니 그 전에 다시 만나 밥이라도 함께 먹어야겠다.

 

고구마도 파고, 고동도 잡고!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밭으로 향했다. 남자들은 바닷가 고동 잡으러 가고, 우린 고구마 파러 밭으로 향했다. 화창한 가을 날씨, 밀물 때가 되기 전에 얼른 고동을 따야한다며 남편은 남동생과 제부 이렇게 셋이서 바닷가 방파제에 고동을 잡으러 가고 엄마랑 아버지랑 여동생이랑 나랑은 밭으로 향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어 서둘러야했다. 어느새 들녘은 황금빛 벼들이 익어 고개를 숙이고 추수를 기다리고 있고 마을을 둘러싼 산 빛은 단풍으로 물들고 있었다. 부모님의 밭은 밭 가득 이것저것 심긴 채소들로 질서정연하면서도 풍성했다.

 

감나무에는 감이 주렁주렁 열렸고 짙은 초록색을 띤 유자는 알차게 영글어가고 있었다. 고구마 밭에서 고구마 줄기를 걷어내고 호미로 고구마를 파기 시작했다. 보랏빛이 도는 붉은 보푼 고구마가 호미로 땅을 헤집자 모습을 드러냈다. 고구마 줄기를 죽죽 걷어내고 둔덕진 흙 속을 호미로 헤집을 때마다 붉은 고구마가 얼굴을 내밀었다.

 

어둠이 내리기까지 우리는 제각기 갖고 갈 고구마를 파서 자루에 채웠고 엄마는 저기 아래 배추밭에서 배추랑 파랑 뽑고 아버지는 염소 밥을 줄 풀을 갖다 날랐다. 한참을 고구마 밭에서 고구마를 파다보니 벌써 저녁 어스름이 내렸다. 배추밭에서 파랑 배추를 뽑아온 엄마는 우리가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고구마를 파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고는 '고만 파거라! 넘 살림 거덜내겠다!" 하고 말했다.
 

우린 "헤헤~" 웃으며 그때서야 우린 호미를 손에서 놓았다. 11월쯤이나 되어서야 수확할 고구마들인데 그때까지 먹을 것만 좀 파가라고 했더니 많이 판다며 나무랐다. 역시 내가 생각해도 딸들은 다 도둑년들이다. 동생은 제 갖고 갈 고구마가 든 무거운 자루를 어깨에 들쳐 메고 차를 세워둔 곳까지 걸어가는데 쿡쿡 웃음이 나왔다.

 

"먹고 살겠다고 하는 것 좀 보소!" 했더니 동생 자신도 우스운지 가다 주저앉아 배꼽을 잡고 웃었다. 어둠이 내릴 때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앞 바닷가에 나와 앉아 있는 두 남자, 다정해 뵈는 저 남자들은 누굴까. 남편과 재부가 나란히 바다를 바라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나보다. 참 보기 좋은 모습이다. 남자들이 잡아온 고동은 굵직굵직한데다 한 솥 가득 찼다.

 

고동을 좋아하는 남편은 얼른 고동을 먹고 싶다 해서 저녁식사를 하기 전에 가스 불에 올려 먼저 고동을 삶았다. 인기가 많아 고동은 게 눈 감추듯 금방 한 솥이 동나버렸다. 인기만점이었다. 저녁상을 물린 뒤 남자들은 편을 갈라 윷놀이를 시작했고 여자들은 거실에 앉아 밭에서 뽑아온 쪽파를 다듬었다.

 

윷놀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 가을밤은 익어가고!

 

아버지와 제부가 한 팀이 되고, 남편과 남동생이 한 팀이 되어 윷놀이를 벌렸다. 시간이 갈수록 윷놀이의 열기는 점점 뜨거워졌고 동생과 나는 서로의 남편을 응원하느라 목청을 높였다. 엄마도 질세라 아버지를 응원했는데 '여~보~ 힘~내세요~우~리~가 ~있잖~아요~'엿가락 늘어지듯 길게 늘어진 목소리로 아버지를 응원하다가 갑자기 응원가가 사라졌다.

 

엄마가 드디어 사태를 파악한 것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각자 다른 편이니 남편인 아버지를 응원할 수도 아들을 응원할 수도 없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 팀이 질 때마다 안타까웠던지 그래도 다시 응원가를 부르며 아버지 기를 세워주려고 애썼다. 남편은 내가 응원을 하다가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안방에서 고개를 내밀고 나를 찾았다.

 

"여보, 응원이 필요해!" 그러면 나는 또 달려가 서로 손뼉을 짠~하고 마주치고 나서 파이팅을 외쳤고, 파를 다시 다듬느라 앉으면서 "여보, 혹시 제 응원하는 목소리가 아니 들려도 언제나 당신을 응원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파이팅!"하고 외치면 여동생은 눈을 흘기며 닭살 부부라고 놀려댔다. 아니 닭살부부의 원조가 우리를 더 닭살부부라고 부른다면?! 누가 더 닭살부부지?!

 

안되겠다 싶은지 여동생도 파를 다듬다 말고 엉덩이를 들썩이고 일어나 제 남편을 응원하느라 오만가지 방정을 다 떨었다. 엄마도 응원을 신나게 하는 우릴 보고 웃음을 거두지 못했다. 윷놀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열기가 뜨거웠고 파를 다듬고 나서 손을 털고 일어나 각자 팀을 응원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시끌벅적 모처럼 화기애애한 열기 속에서 가을밤은 맛있게 익어갔다. 밤늦게야 잠이 들었던 우리는 이튿날 새벽 일찍 일어나 돌아갈 채비를 했다. 골목 밖을 나서니 동녘하늘이 붉게 물들면서 바다를 물들이고 있었다. 동생부부와 우린 오전 7시배를 예약해 두었기에 서둘러 부모님께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 부모님은 막상 우리가 간다고 하니 시원섭섭한 모양이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차를 운전해 여객선터미널로 향했다. 좀 이른 시간에 도착한 우리는 표를 사고 나서 선창가에 서서 찬바람을 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곧 여객선이 도착해 배에 올랐다. 선상식당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라면과 김밥으로 가볍게 아침을 먹었다.

 

동생 부부와 우리는 진해 안골에 내리면서 동생네는 부산으로 우리는 양산으로 서로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기쁜 우리 추석연휴, 멋진 추석이었다. 아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태그:#추석연휴, #가족, #고향, #친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전5:16~17)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