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가로등이 생기고 그림에서 실사로 간판이 변했을 뿐 극장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 2009년 8월 극장의 모습 가로등이 생기고 그림에서 실사로 간판이 변했을 뿐 극장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 최형원

관련사진보기


"허 참, 오늘 말일이라 바쁜데 하필 오늘 왔네. 거기 인터넷 하고 있어요. 인터넷."

공짜냐는 물음에 "손님들 서비스로 한 달 전에 놓았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매표 카운터에서 고지서를 챙기던 동광극장 고재선 대표(53)는 나무라는 말 뒤로 서둘러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건네준다.

"일이 있을 땐 극장 문을 늦게 열기도 해요."

오늘은 오후 4시 20분부터 상영을 시작했다.

잠들어 있던 극장은 주인이 돌아오자 금방 환하게 되살아났다. 고 대표는 휴게실 불을 켜고 팝콘을 튀겨내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작은 휴게실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것도 그의 몫이다.

"지금은 다 자동화가 돼서 나 혼자서 해도 돼요. 방학 땐 또 아들들이 도와주고."

영사기는 모니터로 체크한다. 작년에 매표기 전산화가 도입되며 통신사(KTF) 할인까지 이루어진 후에는 정말로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당시에는 재개봉관으로 동시상영을 했었다.
땡삐와 첩혈쌍웅의 한 장면이 그림 간판으로 걸려있다.
▲ 1993년 재개관 당시의 동광극장 당시에는 재개봉관으로 동시상영을 했었다. 땡삐와 첩혈쌍웅의 한 장면이 그림 간판으로 걸려있다.
ⓒ 최형원

관련사진보기


잘 나가던 시절, 극장은 최고의 사교장소

사실 고 대표의 고향은 동두천이 아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오랜 시간 극장을 운영해 온 것일까.

"아버님이 여기서 극장을 하셨어요. 그러다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서울에 살던 내가 이리로 들어와 극장을 하게 된 거죠."

당시 아버지는 동두천 시내에서 '문화극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아버지 일을 물려받아 스무 살 무렵부터 극장 운영을 시작했다. 동광극장은 30세 무렵인 1986년에 인수했다. 동광극장 운영만 23년째, 문화극장까지 포함하면 극장 주인으로 33년째 일해 온 셈이다.

"그 전부터 여기가 극장이었던 건 맞아요. 86년에 건물 천장을 뜯을 때 보니까 상량에 1959라고 쓰여 있더라고."

극장 근처에 45년째 살고 계시는 김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눴다. 일흔을 넘긴 할머니는 20대에 시집와서 이곳에 살 때부터 극장이 있었다고 말했다. 할머니 기억과 1959라는 숫자를 믿는다면 극장 역사는 50여 년을 헤아리는 셈이다.

전에 '한창 잘나가던 시절'엔 미군 손님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의정부보다 더 번화한 거리였던 동두천 시가지는 미군 부자와 멋쟁이들로 넘쳐났었고 극장엔 영화를 보러 온 손님들로 가득했었단다.

"원래 극장 입구도 여기가 아니었어요. 도로가 새로 나면서 도로 쪽으로 입구가 바뀐 거죠. 예전 입구 쪽에 가면 극장 이름이 시멘트로 조각돼 있는데 아직도 남아 있어요. 붓으로 쓴 글씨가 대부분인 시절인데 특이해서 남겨뒀지."

극장을 물려받을 생각도 없었던 그는 하던 일이다 보니 열정이 생겼고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그렇다 해도 제법 번듯한 독립 건물로 한 자리를 지켜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손님이 없는 평일 낮에 고대표는 극장을 비우고 볼 일을 보러 가기도 한다. 
오후가 되어야 제법 손님이 들기 때문이다.
▲ 자전거를 타고 온 손님이 안내문을 읽고 있다. 손님이 없는 평일 낮에 고대표는 극장을 비우고 볼 일을 보러 가기도 한다. 오후가 되어야 제법 손님이 들기 때문이다.
ⓒ 최형원

관련사진보기


1993년 추석 즈음 4개월여 대공사를 끝내고 재개관을 했었다.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힌트를 얻은 와이드 스크린과 팔걸이가 두 개인 좌석은 지방의, 그것도 재개봉관에서는 파격이었다. 멀티플렉스가 생겨나기도 훨씬 전이었다. 시야와 사운드가 좋다는 칭찬에 의욕적인 답변이 돌아온다.

"지금 멀티플렉스만큼은 못하지만 그때는 정말 최고였죠. 좌석도 스크린을 가리지 않게 내가 직접 재어서 다 배치했었다니까. 사람들한테 좀 더 좋은 시설을 제공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의욕적으로 사업을 해보고 싶기도 했었는데……."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광극장은 2002년까지 재개봉관에 머물다가 2003년 1월 1일 비로소 개봉관이 되었다. 간판 그림도 2000년이 마지막이었다.

"그래도 재개관 이후 손님들이 많이 찾아주고 좋아했었어요."

더 일찍 개봉관이 되지 못해 못내 아쉽다.

동광극장은 전국에 남은 유일한 단독 건물의 단관 개봉관이다. 보강 취재를 하며 영화진흥위원회에 단관개봉관 자료를 문의하니 그나마도 2007년 전국 영화관 자료였다. 일일이 전화를 걸어본 결과 멀티플렉스가 아닌 전국 단관개봉관은 전멸이었다. 옛날극장은 모두 폐관 아니면 휴관, 혹은 철거라는 이름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현재 약 10여개 미만의 극장이 존재하지만 상가건물에 입주해 있었고 동광극장만큼 오래된 역사는 아니다.

부산의 한 극장에 상영프로그램을 문의하니 "여기는 저 성인영화 합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몇 번의 한국영화 부흥기를 거치며 그토록 많았던 극장들이 어쩌면 그렇게 전멸해버릴 수 있는지 씁쓸했다. 역사적 가치라는 것은 편리함이라는 한마디에 손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었나 보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면 저절로 추억에 빠져든다. 촌스럽게 느겨질수도 있지만 지난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들이다.
▲ 휴게실과 매점의 모습 극장 안으로 들어가면 저절로 추억에 빠져든다. 촌스럽게 느겨질수도 있지만 지난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들이다.
ⓒ 최형원

관련사진보기


건물은 허름해졌지만 상영관은 아직도 자랑스러워 

상영관은 고 대표의 자부심이다. 상영되던 <해운대>를 잠시 관람해보니 넓은 화면은 어느 자리에서도 잘 보였고 사운드 또한 돌비 디지털 시스템으로 관람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이런 극장에?'라는 선입견을 날려 주기에 충분했다. 세월의 켜가 묻은 외관과 비교해본다면 놀라울 정도다.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킨 동광극장의 의미를 묻자 "그냥 동광극장이지 뭐"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시민회관이 없던 시절엔 여기서 연극, 연주회 각종 공연과 정당 행사도 하고 눈물의 졸업식도 했었어요. 강당이 없던 시절이니까 비나 눈이 오면 극장을 빌려줬었지. 시설이 되는 곳이 여기밖에 없었으니까."

이제는 사람들이 기억해 줄지 모르지만, 지역문화에 이바지한다는 보람과 자부심에 대관은 전부 무료였다고.

"극장 사업도 대기업이 장악한지 오래에요. 우리 같은 극장이 사라질 수밖에 없어요. 영화사에서도 포스터나 홍보물 같은 것도 잘 안주는데 뭐. 멀티플렉스보다 못한 건 당연하죠. 그래도 그건 그거대로 우린 우리대로 또 맛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그런 걸 인정해 줬음 하는 거지. 무조건 '옛날 극장이라서 안좋다' 이런 말 말고요."

오래된 극장이어서 재미없고 인기없는 영화를 하는 것도 오해다. 관객이 많지 않다 보니 영화배급사와의 수익을 맞추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상영을 해야 한다. 단관 개봉관의 비애란다. 단가가 너무 비싼 외국 영화를 못 받는 것도 손님이 줄어든 탓에 수익을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극장을 지키고 싶은 마음, 동참하는 사람들 생겨났으면

"왜 아직 시작 안 해?" "주인이 안왔데." "그럼 깎아 달라 그래. 하하" 관객은 많지 않지만 영화를 보러 온 손님들의 마음은 그래도 신이 난다. 손님이 찾아오면 언제고 영화는 상영된다.
▲ 상영을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 "왜 아직 시작 안 해?" "주인이 안왔데." "그럼 깎아 달라 그래. 하하" 관객은 많지 않지만 영화를 보러 온 손님들의 마음은 그래도 신이 난다. 손님이 찾아오면 언제고 영화는 상영된다.
ⓒ 최형원

관련사진보기

고 대표의 꿈은 소박하다. 지금까지처럼 아기자기하게 극장을 운영하는 것. 그가 운영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극장이 사라지는 건 슬플 것 같다고 말한다.
"추억의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으로라도 남았으면 좋겠어요. 힘들지만 지금까지 이어온 세월이 있는데…… 영영 없어져버리는 건 좀 그렇고. 하는데까지는 해봐야지."

허탈한 웃음 속엔 죽마고우가 되어버린 극장의 운명을 염려하는 애정이 엿보였다.

가족과 함께 극장을 찾은 조정윤 학생(보영여고 3학년)은 극장에 대해 "시내보다 시설은 좀 떨어지지만 영화 보는 건 차이가 없어요. 사람은 좀 없지만"이라고 말했다. 고 대표도 극장을 찾은 사람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 오길 바라는 건 마찬가지 마음이다.

관객들은 분명 까다로워졌다. 동광극장좌석 280여 석은 매 회 1/10 정도 채워질 뿐이다. 단독 건물로서 옛 모습을 간직한 단관 개봉관은 전국에서 동광극장이 유일하다. 그 사실이 동광극장의 현재가치이다.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식 낭만은 필요하다. 동광극장이 다시 한 번 50년 후에도 존재하길 바라는 욕심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늦게 온 손님에게 매표를 하며 고 대표는 "못 본 부분은 다음 회에 더 보고 가라"며 일일이
당부했다. 옛날 극장에는 영화뿐 아니라 정도 남아있었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풍경으로 동광극장이 남아있다.

동광극장도 결코 경영난에서 자유롭지 않다. 고 대표의 끈기로 근근이 운영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동광극장마저 없어진다면 우리나라에 옛날극장은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럼 어디 가서 그 시절 추억을 찾을 수 있을까? 드라마나 영화 세트장도 아니다. 동광극장은 실제하며 영화 <삼거리극장>처럼 다시 극장이 살아날 날을 기대하며 관객이 찾아오길 기다린다.

추석 명절이 다가왔다. 옛날부터 명절하면 영화가 최고였다. 동광극장의 올 추석프로는 <내 사랑 내 곁에>. 옛날 극장과 제법 어울리는 멜로 영화다.


태그:#동광극장, #영화, #추석, #내 사랑 내 곁에, #단관개봉관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