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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속에 묻혀 있다 화려한 조명 아래로 나온 59년 전 유품들 - 단추, 시계, 빗, 곰방대, 도장, 구두주걱, 비녀, 또...
 땅 속에 묻혀 있다 화려한 조명 아래로 나온 59년 전 유품들 - 단추, 시계, 빗, 곰방대, 도장, 구두주걱, 비녀, 또...
ⓒ 높빛평화예술제기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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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밋밋한 단추들, 멈춰버린 시계, 안약 병, 이빨 나간 빗, 녹슨 곰방대, 비녀, 도장 몇 개, 그리고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옛 물건들.

왜 이런 물건들이 전시장을 차지하고 있을까

별스러워 보이지 않는 이 물건들이 왜 미술관 전시대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을까? 값나가는 백자나 청자도 아니고 수천년 전의 희귀한 생활자료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이 평범한 물건들이 전시장 한복판을 버젓이 차지하고 있는 걸까?

희생자들이 허리에 두르고 있던 혁대들 앞에 웬 탄피 비슷한 것이 보인다.
▲ 비비 꼬인 혁대들 희생자들이 허리에 두르고 있던 혁대들 앞에 웬 탄피 비슷한 것이 보인다.
ⓒ 높빛평화예술제기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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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웬 고물상의 고철 부스러기?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오래 된 혁대들에 녹슨 버클이 달린 것이 보이고, 그 앞에는 M1 소총의 것으로 보이는 탄피가 몇 놓여 있다. 왜 이런 물건들이 미술관 전시장을 차지하고 있을까?

희생자들이 신고 있던 신발이 얼키설키 쌓여 있다.
▲ 닳고 해진 신발 희생자들이 신고 있던 신발이 얼키설키 쌓여 있다.
ⓒ 높빛평화예술제기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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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흙이 덕지덕지 묻은 오래 된 신발들이다. 전시장의 이 물건들이 후세인들에게 전하려는 말은 무엇일까?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이곳까지 나들이를 했을까?

손목을 묶고 있던 삐삐선이다. 삐삐선을 8자 모양으로 만들어 두 사람씩 두름으로 엮었다.
▲ 삐삐선 손목을 묶고 있던 삐삐선이다. 삐삐선을 8자 모양으로 만들어 두 사람씩 두름으로 엮었다.
ⓒ 높빛평화예술제기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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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상의 철사줄 뭉치로 보이는 이 물건들은 삐삐선이다. 대부분이 8자 형이고 간혹 O자 형도 있다. O자 형은 한 사람의 두 손목을 묶은 것이고, 8자 형은 두 사람의 손목을 하나씩 묶은 것이다. 어째 느낌이 영 묘하다.

네 단의 유품 전시대 뒤로 관련 사진들이 보인다.
▲ 유품 전시대 네 단의 유품 전시대 뒤로 관련 사진들이 보인다.
ⓒ 높빛평화예술제기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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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특이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 전시장 같은 분위기가 난다. 여기는 고양시 성사동과 화정동 사이에 있는 고양어울림누리 미술관이다. 이곳에서는 지난 9월 16일부터 2009 높빛평화예술제라는 이름으로 아주 특별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전시장의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59년 전 부역혐의자로 몰려 비명에 숨져간 고양금정굴사건 희생자들의 유품 중 일부다. 왜 이 물건들이 이곳에 있으며, 이 물건들이 후세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일주일만에 한국판 킬링필드로 변한 금정굴

2009년 9월 16일 저녁 6시 30분, 2009 높빛평화예술제가 막을 올렸다.
▲ 전시회 개막식에 함께한 사람들 2009년 9월 16일 저녁 6시 30분, 2009 높빛평화예술제가 막을 올렸다.
ⓒ 높빛평화예술제기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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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년 전 희생자들과 함께 땅 속에 묻혀 있던 이 유품들이 세상 빛을 본 것은 14년 전인 1995년 가을이다. 당시 민간인학살 사실 자체를 부인하던 세상에 맞서 유족들은 그 증거물로 금정굴 학살현장을 파 유해를 발굴했다. 금정굴 현장은 일주일 만에 한국판 킬링필드로 변했다. 유족들은 이래도 외면할 거냐고 물었다. 그러나 책임 있는 당국은 모두 야멸차게 얼굴을 돌렸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함께 나온 유품들과 함께 서울의대 연구실로 실려가 임시보관됐다.

그뒤로도 무심한 세월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금정굴 유족들은 다른 지역의 유족들,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사회단체, 연구자들과 함께 민간인학살의 실체를 세상에 알리며 관심과 문제의 해결을 촉구했다. 갖은 곡절 끝에 지난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정리기본법이 제정되고 진실화해위가 구성되어 국가 차원의 진실규명에 나섰다. 2007년 6월 진실화해위는 금정굴사건에 대해 '경찰 책임하의 불법집단살해'임을 밝히고 국가와 지방자치체에 유해안치, 평화공원 조성, 명예회복 등의 후속조치를 시급히 취할 것을 권고했다.

평화예술제 개막작으로 2008년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연주상'을 수상한 음악 <예산족> 중 '도살풀이'와 '별달거리'를 전승일 감독이 애니메이션화한 작품이 상영되었다.
▲ 예산족 애니메이션 프로젝트 평화예술제 개막작으로 2008년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연주상'을 수상한 음악 <예산족> 중 '도살풀이'와 '별달거리'를 전승일 감독이 애니메이션화한 작품이 상영되었다.
ⓒ 전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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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제야 조상님들의 낯을 뵐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이제 곧 양지바른 곳에 조상님들의 유해를 안치하고 남들처럼 떳떳하게 성묘도 지낼 수 있게 될 거라고 믿었다. 금정굴 일대에 자그마한 평화공원을 조성하여 후세들에게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도 전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피해회복과 명예회복 조치도 곧바로 취해져 나라의 떳떳한 성원으로서 당당하게 어깨 펴고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진실규명 이후 2년이 지나도록 사실상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고 있다. 가장 시급한 유해안치마저도 아직 계획이 수립되지 않았다며 마냥 미루고 있다. 국가가 59년 전 자신의 국민을 집단으로 불법살해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서도 후속조치는 취하지 않는 심각한 직무유기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59년 전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해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지난 59년 동안 형극의 세월을 살아온 유족들의 피해는 이중삼중으로 가중되고 있다.

평화예술제의 한 프로그램인 '평화그림 함께 그려요'에 참여한 학생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벽에 붙이고 있다.
▲ 함께 만들어가는 평화 평화예술제의 한 프로그램인 '평화그림 함께 그려요'에 참여한 학생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벽에 붙이고 있다.
ⓒ 높빛평화예술제기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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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년 깊은 한의 상징물인 금정굴 유해 역시 14년 전 서울의대 창고로 실려간 뒤 한 번도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채, 책임 있는 당국의 직무유기와 세간의 무관심 속에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지난 9월 7일 14년째 추석 성묘를 병원 창고에서 지낸 금정굴 유족들은 희생자 유해와 함께 있던 유품의 일부에나마 세상 빛을 쐬어주며, 이 답답한 현실을 세상에 알리기로 뜻을 모았다. 이번 평화예술제에서 유품 전시가 한복판을 차지한 사연은 이렇듯 기구하고도 각별하다. 버젓한 전시회에서 민간인학살의 유품들이 중심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마도 한국 최초가 아닐듯 싶다.

물론 이번 평화예술제는 유품 전시회가 아니다. 레퍼토리는 참으로 다양하다. 다양한 애니메이션 작품들도 상영되고, 평화라는 주제로 모아지는 작가들의 다양한 사진과 그림, 설치미술도 전시되고 있으며, 함께 하는 시인들의 걸개시화전도 열리고, 어린이 평화책 순회 전시회도 겸하여 아이들이 편안한 공간에 앉아 평화로운 세상에 푹 빠질 기회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어린이와 청소년을 포함한 모든 관람객이 자신의 평화에 대한 생각을 그림이나 글 속에 담아 전시하는 '평화그림 함께 그려요' 코너도 마련돼 있다.

희생들의 유품은 우리에게 말 없이 묻는다

평화로운 공간은 평화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칠 수 있게 한다.
▲ 평화책들에 둘러싸여 평화의 그림을 평화로운 공간은 평화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칠 수 있게 한다.
ⓒ 높빛평화예술제기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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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빛평화예술제기획단에서는 이런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을 소통의 도구로 삼아 전쟁과 학살이라는 무거운 주제가 우리 생활 속에 어떻게 접목되어 평화와 상생으로 승화될 수 있는지 모색하고 있다. 참여하는 어린이들, 학생들, 그리고 어른들이 마음으로부터 반목과 비극을 청산하고 평화와 생명을 무엇보다도 소중한 가치로 받아들일 때 이 땅의 진정한 평화도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세상에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평화책을 읽고 평화의 그림을 그리는 어린이와 학생들의 손길과 눈빛에서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본다. 그러나 현실은 아직도 각박하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가치가 지배하는 풍조, 그리고 우리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이 더불어사는 세상의 기반을 잠식할 때 우리 사회에 평화는 깃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학살 사진을 둘러보는 학생들의 표정이 무척 진지하다.
▲ 학생 단체관람객들 학살 사진을 둘러보는 학생들의 표정이 무척 진지하다.
ⓒ 높빛평화예술제기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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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나온 59년 전 민간인학살 희생자들의 유품은 우리에게 말 없이 묻고 있다. 당신들이 원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평화세상을 원한다면 우리를 기억하라고. 14년 동안, 아니 59년 동안 이들을 이렇게 방치해둔 채 입으로만 인권과 평화를 주워삼는 것이 얼마나 허황한 일인지?

덧붙이는 글 | 2009년 높빛평화예술제는 제59주기 고양지역 민간인학살 희생자 합동위령제전의 일환으로 9월 16일부터 30일까지 고양어울림누리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고(총감독 전승일 011-267-7954), 9월 26일 낮 1시에는 금정굴 현장제례, 1시 반에는 정발산역 인근 장항근린공원(구 미관광장)에서 '금정굴 넋들을 위한 무천제'. 3시에는 같은 곳에서 합동위령제(제17회 금정굴 희생자 위령제 겸 제2회 고양부역혐의사건 희생자 위령제)가 열린다.



태그:#금정굴, #높빛평화예술제, #민간인학살, #전시회, #위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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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문제의 실상을 널리 알리고, 장기적으로는 한국사회의 제반 문제를 심도 있게 짚어보고 싶습니다. 글쓰기 분야: 사회평론 일반, 민간인학살, 시민사회운동 주요 이력 (필명 이무열) - 고양시민회 대표, 민간인학살진상규명범국민위 사무처장, - 저서 <러시아사 100장면> <그래도 사람은 하늘이다> <세계사 작은사전> <현대역사 100> - 역서 30여 권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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