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문화재에 얽힌 유래의 신빙성

 

생경하고 어색한 가시방석의 문화재

 

우리 눈에 잘 띄지 않고 특별한 의미도 부여받지 못하는 작고 평범한 석조물이 있다. 광주 유덕동 주민센터 주차장 한쪽에는 석조여래좌상이 덩그러니 서 있다. 문화재 보존정책의 심각성을 느끼게 해주는 유물 중 하나이다.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21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문화재라고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작고 평범하며 훼손상태는 심각한 수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주변 환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 더구나 주차장 옆에 있어 위태롭기 짝이 없다. 대부분 유물은 원래 있던 곳이 없어지면 박물관이나 학술 연구기관으로 옮겨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좌상은 예상치 못한 주차장 한쪽에 서 있다. 생경하고 어색한 가시방석 위에 서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석조 유물은 기온 차이로 인한 팽창과 수축, 비바람에 의한 풍화작용으로 인해 자연적인 마모가 진행된다. 더불어 사람들의 부주의와 무관심으로 전체에 생체기를 입고 서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찰 불당 안에 금장을 하고 모셔져 있는 불상은 어쩌면 부귀영화를 누리는 행복한 불상일 것이다. 그러나 석조로 된 불상은 대부분 밖에 있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마모현상과 함께 인위적 훼손까지 더해 문화재 보존의 심각성을 느끼게 해준다.

 

이 마애여래좌상은 대략 조선 전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하며 500~600년의 시간을 견디고 지금 모습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극락면의 번화한 소재지에 있다가 지금의 유덕동 주민센터로 옮겨져 온 지가 70~80년이 되었으며, 옮겨 와서도 학계나 일반인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불상이다. 온 몸 곳곳에 길게 나 있는 금 자국들은 그간의 간난신고를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틈새에서 자라나는 검은 이끼들은 검은 망토를 걸치고 모진 세월을 견디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은 한정이 없다.

 

불상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비록 일부분만 남아 있지만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추었다. 문양은 화염문(火焰文)과 연꽃 봉오리 모양이다. 통통한 얼굴은 훼손이 심하여 윤곽만 남아있고 목에는 삼도가 있으며, 옷은 통견(通絹)이다. 오른손 모양은 엄지와 검지를 가볍게 말아 쥔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의 상생인(上生印)을 하고 있고, 왼손은 마모되어 모양을 판단하기 어렵다. 직사각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좌(臺座)가 있으나 같이 조성한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형태가 선명하게 보존되어 있지는 않지만, 숱한 고비를 넘긴 경험 많은 할아버지처럼 마애여래좌상은 우리의 먼 조상의 숨결과 삶이 스며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표지판마저 확인 안 된 '-- 카더라'식 설명

 

이 불상의 학문적인 연구는 일단 학자들 몫으로 돌려놓자. 문제는 예배의 대상이 되어야 할 불상이 부적절한(?) 주민센터 주차장에 서있게 된 사연이라도 정확하게 정리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물론 마애여래좌상이 현 위치에 있게 된 내용이 안내 표지판에 소개되어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일부 사실과 다르다는 견해도 있어 나름대로 조사하여 소개해 본다.

안내표지판에는 1939년 서구 운천저수지 근처 백석골 절터에 있던 것을 이곳 주민들이 현재 위치로 옮겼다고 소개되어 있다. 예전 극락면 소재지로서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하고 상주인구가 많은 이곳에 마땅히 치성을 드리고 소원을 빌만한 대상이 없어 이 불상을 모셔왔다는 얘기가 전래된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우연히 알게 된 그 곳 토박이 송세준 할아버지는 당시 면사무소 일을 보시던 부친으로부터 다른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해주었다. 부친은 나중에 부면장까지 오르고 은퇴하셨다. 할아버지 설명에 의하면 이 마애여래좌상은 운천저수지 쪽에서 실어온 것이 아니라, 동운동 "운암마을"에 사는 이용빈(나중에 극락면장을 함)씨의 집 앞에 있던 것을 '구루마'(손수레)로 실어와 지금 위치에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연도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르고 있어서 이 이야기가 마애여래좌상의 처음 위치에 대한 내용인지, 아니면 두 번째 옮긴 위치의 이야기인지는 정확히 가늠할 수가 없다. 1939년도에는 부친의 나이가 34세 정도로 그때 면사무소의 일을 보던 그 분의 총기는 잘못 기억할 나이가 아니어서 유래에 관한 부친의 설명은 상당한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야기와 다른 전래가 표지판에 기록된 것은 어떤 근거에서였을까. 할아버지의 설명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마애여래좌상에 관한 유래를 위해 조사 나온 관계자가 있었다. 그 동네에 살고 있던, 송세준 할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의 할아버지가 주변에 떠돌던 '그랬다더라'는 얘기를 전해주었고, 그대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송세준 할아버지는 이후 이 안내 표지판의 내용이 사실과 다름을 유덕동 사무소에 알리고 그 내용의 수정을 수차례 건의했으나 현재까지 수정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문화재는 이름이나 외형의 모양만 가꾸고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많은 이야기를 통해 배경과 유래도 함께 보존되면서 우리는 그로부터 우리 조상의 모습과 정신을 발견하고 비로소 우리의 온전한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문화재는 외우는 대상이 아니라 듣고 이해하는 대상이자 나를 발견하는 대상이다. 유래를 조사할 때도 다양하게 조사하고 될 수 있으면 정확한 이야기를 수집하여 전해야지 일부의 '설'로만 듣고 말일이 아니다. 사소해 보이는 내용이지만 확인을 거쳐 정확한 내막을 알아내는 과정을 통해서 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온전히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태그:#문화재
댓글

사회적기업으로 문화재를 과학적으로 예방관리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단체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