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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지난 봄과 여름의 상심은 깊었다. 내세울 만한 애국자도 아니고, 우국지사도 못되는 주제에 국가와 민족을 걱정한 들 쇠터럭 하나라도 움직일 수 없음을 알지만, 그러나 전임 대통령이 퇴임한 지 겨우 1년 몇 개월 만에 절벽에서 몸을 던진 참담한 사고를 보면서 내몰린 죽음이었다는 생각 때문에 분노를 쉽게 삭일 수 없었다.

그리고 민족의 어른이었던 또 다른 대통령의 서거는 비록 노환이라고 하더라도 안타깝고 허전하기만 했다. 이순(耳順)의 나이를 의식하며 애써 초연해지려 했지만 우리가 지켜야할 소중한 가치를 잃었다는 상실감 때문에 정원에 핀 꽃도 무심한 풍경이었고 감자를 캐고 앵두, 자두, 매실 등 과일을 보고도 감동을 느낄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아마 "참견하고 간섭하기 좋아하다 신세 망친 사람"이라는 아내의 말처럼 눈에 거슬리는 것은 그냥 넘기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계절 탓인지…. 이제 아팠던 기억은 점점 엷어져간다.

잔디깎기란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 잔디깎기 잔디깎기란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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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를 깎는다. 넓은 잔디밭을 조성한 목적은 집을 지을 경우를 대비하여 정원의 기초 조경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잔디밭을 조성하니 좋은 점이 또 있었다. 잔디를 심은 곳에는 다른 풀이 자라지 않아 전체적으로 김매기를 해야 할 면적이 줄었다는 점이다. 또 지나가던 사람들이 잔디밭과 주변에 심어진 꽃과 나무를 넘겨보면서 시원해서 좋다고 부러움을 말할 때도 잔디밭 가꾸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잔디밭을 가꾸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계급적인 관점에서 왜 농지에 잔디를 심느냐는 물음과 함께 호사가들의 취미 아니냐는 따가운 말을 남기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응대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잔디 깎기를 한가한 놀이로 보는 시골 노인들의 시선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사실 잔디밭은 부자들의 별장에나 어울리는 사치품도 아니다. 잔디깎기는 부귀와 영화를 쫓고 배부른 먹거리를 찾아가는 일도 아니다. 잔디밭을 가꾸는 일은 꽃밭을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잔디는 그냥 잔디일 뿐이다.

잔디밭 가꾸기가 쉽지 않은 까닭은 또 있다. 아무리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지만 2주 또는 3주에 한 번쯤 줄잡아 3시간쯤 잔디 깎는 기계를 밀고 다니다 보면 만만한 놀이요 운동이라는 생각보다 강도 높은 노동이라는 생각이 더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체적인 희생과 내면의 진통 없이 해와 달과 별을 만나고, 잠자리의 군무를 보며 가을날 풀벌레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 저절로 이루어지겠는가.

적어도 잔디 깎기는 잔디를 키우는 일이다. 쌓기는 어려워도 허물기는 쉽고, 기르기는 어려워도 죽이기는 것은 더 쉬운 법, 잔디 깎기는 옆으로 왕성하게 뿌리를 뻗어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잔디의 성질을 살리는 일이다. 제 몸을 깎아 자기를 살리는 정돈의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때문에 잔디 깎기는 자연에 대한 반역이 아니다.

무릇 한 송이 꽃을 피우는 일에도 씨앗을 심고 풀을 매는 수고로움이 따르기 마련이고, 한 그루 나무를 키우는 데도 기나긴 기다림이 있어야 한다. 기다림은 더러 고통이지만 그보다는 다가오는 날들을 다듬는 희망이다. 잔디 깎기 역시 희망을 만드는 일이다.

지나온 길을 반추하고 다시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따라 가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나만의 공간이 빛나도록 다듬는 고단한 예술 작업이다. 그리고 아직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고작 잔디나 깎으면서 갖가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자기도취일 수 있다. 그러나 잠시 모진 세상에서 다가올 미래의 희망을 수놓는 것도 좋은 일 아니겠는가!

아직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국회로 들어간 야당은 제 소리를 못 내고 있다. 정부와 여당에는 자리만 지키는 구신(具臣), 임금의 뜻만 쫓는 유신(諛臣), 알랑거리는 간신(姦臣), 골육지친을 이간시키는 참신(讒臣), 권세를 전단하는 적신(賊臣), 국민을 짓밟고 국가의 위신을 추락시키는 망국지신(亡國之臣)들이 날뛰는 형국이다.

독선과 전횡을 일삼으면서 화해와 통합을 말하고, 용서를 왜곡하는 정치를 보면 가슴이 뒤틀리지만 잔디를 깎듯 그들을 토벌하기란 쉬운 일이던가!

정원의 잔디밭에서 잔디를 깎는 내 모습을 아내가 잡았다.
▲ 잔디밭 일부 정원의 잔디밭에서 잔디를 깎는 내 모습을 아내가 잡았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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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를 깎는다. 거짓과 음모와 배신의 세월이 어서 끝나기를, 그리고 잔디밭처럼 고르지는 않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고루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기원하며 잔디를 깎는다. 그날을 위한 기다림과 만남의 광장을 만든다.

텃밭의 토란잎에 쌓이는 가을볕을 본다. 이제 곧 여름의 백일홍도 지고 말리라. 벗이여, 다음 주말에는 잠시 들려 반나절쯤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잔디밭에서 뒹굴다 가게나.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서하라는 필명으로 한겨레 필통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잔디깎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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