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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 정철.
 카피라이터 정철.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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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만이다. 질풍노도의 이십대에 만났다가 헤어져 인생 길 흐릿해진 쉰 줄을 앞두고 만났는데도 크게 변하질 않았다. 먼발치에서도 알아봤다. 안짱다리 특유의 걸음은 그대로이다.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과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선선한 웃음, 그리고 안경 너머의 순한 눈빛에서 안도했다.

'아, 돈독 오르지는 않았구나!'

정철(48·정철카피 대표), 그는 괜찮은 '카피라이터'가 되어 있었다. 서로 돈 떼어먹은 적 없으니 소식 두절할 필요는 없었는데 갈피 잡지 못한 인생이다 보니 연락 끊겼던 것이다. 안부를 묻게 된 것은 작년 촛불정국의 한 귀퉁이를 밝힌 그의 <오늘의 촛불>에 이끌려서다. 25년 전 기억을 더듬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그가 이렇게 물었다.

"거길 집이라고 해야 하나요? 방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는 그렇게 기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집은 망한 집이었다. 나의 골방은 조폭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으슥한 주류도매상 창고를 끼고 돌아가면 나오는 어두컴컴한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그 방은 낮에도 전등을 켜야 했는데 문학청년 행세를 하던 나는 그 골방에서 골초가 되어서 소주를 제법 죽였다. 그 시절 그는 나의 몇 안 되는 문학 동지였고 술꾼이었다.

그는 그때도 이렇게 말한 것 같다.

"경제학과에 멋모르고 들어갔는데 경제학이 그렇게 수학과 밀접한 학문인 줄 몰랐다. 그래서 4년 내내 국문과, 신방과, 사학과 동네에서 놀았다. 즉 무늬만 경제학 전공이었다. 대학 4학년 때 단편소설로 고대문학상을 탔다. 그래서 소설을 써볼까 한다."

작가를 꿈꾸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카피라이터가 됐다고 했다. "카피를 쓰기 시작하면서 내가 소설보다 카피, 즉 긴 글보다 짧은 글에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때도 그는 카피라이터의 싹수가 보였던 것 같다. 흉어기의 항구에서 들이키던 소주는 황량했지만 그가 던지는 재기발랄한 말마디는 꽤 청량해서 우울함을 바다에 토할 수 있었다.

그를 가리봉으로 불러내 독한 배갈 '독고리(=병)' 4~5병을 비우면서 나눈 이야기를 곱씹어보니 카피라이터로 제법 잘살았던 것 같다. 기업 카피뿐 아니라 선거철이면 정치 카피도 제법 했지만 '한나라당' 카피만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건 전라도 사내였기 때문이 아니라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정당이었기 때문에 돈 보따리를 싸들고 와도 거래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의 촛불' 주역은 MB... 예수 왈 '나랑 친한 척하지 마라!'

'오늘의 촛불' 스물네 번째 '예수'편
 '오늘의 촛불' 스물네 번째 '예수'편
ⓒ 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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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해야겠구나!'

아내와 딸과 함께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면서 생각했단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어둠을 밝히자는 생각으로 지핀 게 '오늘의 촛불'이다. 그는 그런 스타일이다. 무거움도 가벼움도 아닌 즐거움과 자유로움, 그렇게 마음 가는대로 촛불 카피를 시작했는데 혼자 보기 아까웠던 한 후배가 그의 카피를 긁어다 아고라에 올렸단다. 

'어어, 이거 뭐야! 장난이 아닌데!'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 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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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블로그 '뇌진탕'에서 시작한 '오늘의 촛불'에 네티즌 수만 명이 몰려들면서 화제가 됐다. 촛불은 50회에 걸쳐 연재됐다. 첫 번째 카피의 제목은 '자유의 여신상'이다. 전쟁광 부시를 잘못 뽑아 망신살 뻗친 미합중국 자유여신상이 MB를 실수로 뽑은 대한민국 국민을 위로하는 형식인데 내용은 이렇다.

너희도 대통령 때문에 힘들지?
우리도 같은 이유로 힘들어 죽겠다.
그냥 팔자려니 하고 몇 달만 참자.
뭐?
너희는 아직 4년8개월씩이나 남았다고?

'오늘의 촛불' 여덟 번째 이완용 편도 재밌었다.

나는 조국을
팔아먹었을지언정
백성들의 건강을
팔아먹지는 않았다.
이제라도
나를 재평가해 달라!

촌철살인의 카피를 낳게 해준 건 명박산성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촛불'은 MB가 없었다면 탄생 불가능했다. 따라서 주역이었던 MB에게 출연료를 지불해야 한다. 그는 이 점을 잊지 않고 특별 배려하면서 '소망교회' 이명박 장로를 예수와 연결시켜준다. 스물네 번째 촛불 '예수' 편은 이렇다. 

"나랑 친한 척하지 마라."

그의 카피는 재기발랄하다. 그렇다고 해서 번뜩이는 재치와 기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촛불 시리즈가 아닌 또 다른 카피에선 격정적인 눈물과 분노가 쏟아진다. 노 전 대통령의 투신 소식을 접한 그는 '나는 개새끼입니다'라는 절규 어린 카피를 토해내고 '용산참사'에선 죽음의 행진에 대해 우려하며 몸서리친다.

"당신이 검찰에게 치욕적인 수모를 당하고 있을 때
나는 검찰 욕 몇 마디 하는 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나는 개새끼입니다.
당신이 가족과 동지들의 고초를 걱정하고 있을 때
나는 최희섭의 삼진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개새끼입니다."

('나는 개새끼입니다' 일부)

"나는 죽었습니다.
죽었는데, 모든 게 끝났는데 사람들은 이제 시작이라고 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고 또 죽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나 하나로 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일부)

내 머리 제대로 사용법 - "뒤집어 생각하면 인생이 즐거워"

정철의 신간 <내 머리 사용법>
 정철의 신간 <내 머리 사용법>
ⓒ 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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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째 카피쟁이로 살아가고 있는 그가 최근 <내 머리 사용법>(리더스북)을 펴냈다. <씹어 먹는 책, 이빨>, <불행은 따로국밥이다>, <세븐 센스>에 이어 펴낸 네 번째 역발상 에세이다. 그는 이 책에서 "한번만 뒤집어 생각하면 인생이 즐거워진다!"라면서 고정관념의 인생에서 탈출할 것을 권한다. 

짧은 카피와 일러스트, 사진 등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사고의 기술을 가르쳐주는 책은 아니다. 그는 "머리가 아닌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 때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사회가 정해놓은 틀로부터 자유롭게 살 수 있다"면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다보면 가슴에 남는 책이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조용히 앉아 열 시간을 기다린다.
그리고 동쪽으로 돌아앉는다."

('서산에 지는 해를 끄집어 올리는 방법' 전문)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라 불만이다."

(행복의 반대말' 중 일부)

<내 머리 사용법>은 단행본이기도 하지만 두 권의 책이기도 하다. 앞에서부터 읽다보면 중간에 'The End'가 나타난다. 하지만 끝은 아니다. 책 읽기의 편견을 뒤집은 이 책의 뒷면 표지로 가면 '생각을 뒤집는 인생사전 101'이란 제목이 눈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책이 시작된다. 101개의 단어를 재해석한 인생사전의 일부는 이렇다.

소통 가슴을 꺼내어 상대의 가슴과 맞바꾸는 일. 상대의 가슴이 내 가슴이 있던 자리에 완전하게 자리를 잡을 때까지, 내 가슴이 상대의 가슴이 있던 자리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을 때까지. 입은 쉿!

명함 너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말해줘도 오래 기억 못 할 터이니 이것 받아 하며 내미는 물건. 내가 알고 싶은 건 너의 높이가 아니라 너라는 사람이야 하면서 슬그머니 휴지통에 버리는 물건.

석 줄에 천만 원짜리 카피를 썼던 카피라이터 정철. 그가 책을 펴낸 이유는 "수백 수천의 카피를 써왔지만 내 이름 달고 나간 카피는 단 한 줄도 없었다"면서 "세상에 책을 내놓은 것은 작가 정철이라는 내 이름을 걸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너무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

카피라이터보다는 가슴 있는 글쟁이로 살길 원하는 정철. 그의 글쓰기가 향하는 곳은 따뜻한 세상이다.

"건방진 얘기 같지만 나보다 내 스타일의 글을 더 잘 쓰는 사람을 만나면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내 스타일의 글은 발상의 전환을 통해 머리에 쾅하는 울림을 주는 메시지를 독특한 화법과 남다른 접근을 통해 짤막한 몇 줄로 표현해내는 것이다. 그런 글을 통해 내 생각들이 공감을 얻어내고, 그 공감들을 통해 세상이 조금 더 시원하고 따뜻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카피라이터 정철의 머리를 9하라 - 머리를 가지고 신나게 노는 9가지 방법

정철 지음, 리더스북(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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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카피라이터, #촛불, #역발상, #신간, #책, #정철카피, #내머리사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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