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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 흥분시켜 우발적인 행동을 유발하고, 채증한 다음에 고소한대요? 대응하려면 좀 우아하게 해야지, 이게 뭡니까. 자자, 아저씨 이제 좀 들어갑시다. 우리 할 일 많아요."

 

YTN 노동조합이 회사의 허를 찔렀다. 27일 오전 8시 서울 남대문 YTN 사옥 안에는 검정색 양복을 맞춰 입은 용역회사 직원들이 빼곡했다. 정문과 후문, 로비 할 것 없이 해직자들이 움직이는 동선에 따라 연신 카메라를 눌러댔다. 업무방해 혐의로 소송을 제기하기 위한 채증작업인 것이다.

 

당초 YTN 노동조합은 27일 아침 출근투쟁에 "회사가 예상하지 못하는 수준의 대응을 하겠다"고 천명했었다. 말 그대로 커다란 한판 싸움을 예고하는 듯했다. 기자들도 긴장했다. 구본홍 사태 이후 '제2의 YTN사태' 서막을 여는구나 긴장감이 나돌았다.  

 

오전 8시경 노종면 YTN노동조합 위원장을 비롯한 해직자 6명은 회사 출입을 위한 방문증을 발급받아 가슴에 달았다. 몇 발짝 움직여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는데, 용역회사 직원들이 막아섰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들은 스크럼을 짜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눈썹에 가득 힘을 주고, 입은 쭉 내밀었다. 한동안 상황이 이어지니 다리가 아픈지 고개를 숙였고, 지루해했다. 

 

불법의 덫에 빠지지 않으리

 

노종면 위원장은 혹시라도 조합원들이 회사가 친 '불법의 덫'에 빠질세라 "흥분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몇몇 젊은 조합원들이 분을 참지 못하고 용역을 향해 반말로 항의하니 "그러지 말자"고 다독였다.

 

해직자들은 회사의 책임 있는 간부가 설명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사측 임원은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침 YTN 홍보팀장이 출근하다 이 상황과 마주치게 됐지만 별다른 설명을 하지 못했다. "잘 풀어보자"고 짧게 코멘트했다. 후문 근처 먼발치에 총무국장이 등을 돌린 채로 서 있었지만 상황설명을 명쾌하게 해내지 못했다.

 

그저 "건전한 노조활동은 보장하겠다"는 말만 했다. 무엇이 불건전한 것인지, 방문증 발급받아 회사에 출입하는 것이 불건전하다는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이날 현장에 눈에 띈 YTN 간부 가운데 '이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할 사람은 없었다. 기자들이 여럿 있었지만 설명 대신 용역직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움직이기에 바빴다. 

 

노종면 위원장은 조합원들에게 발길을 돌리자고 했다. 오전 8시 20분경부터 정문 앞 집회가 시작됐다. 배석규 대표 이후 첫 집회가 열린 셈이다. 비가 내리는 우중충한 날씨였지만 50여명의 조합원들이 집회에 참석했다.

 

"배석규는 대행이다! 사장놀음 그만해라"

"투명한 사장선임, YTN 살 길이다!"

"권력눈치 대기발령 돌발영상 죽이기다"

 

출근길 남대문 일대에 굵직한 남자 목소리들이 더운 비바람을 타고 멀리 퍼져나갔다. 비에 젖을세라 비닐을 덮은 널따란 피켓을 든 조합원들이 정렬하자, 노 위원장이 핸드마이크를 손에 쥐고 연설을 시작했다.

 

"어제 우리는 술잔에 눈물을 담아 마셨습니다. 사랑하고 아끼는 후배 5명이 부당하게 지방발령을 받았습니다. 연고도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당한 폭압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복성 징계가 명백한 5명의 지방발령은 당장 철회돼야 합니다.

 

얼음처럼 차가운 분노로 이 순간을 견뎌냅시다. 더 이상 울지 말고, 눈물을 아껴둡시다. 우리는 이미 90%를 이겼습니다. 승리가 코앞에 왔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배석규는 법으로 망할 겁니다.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것 마냥 조급하게 칼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법을 외치다 법으로 처참한 말로를 맞게 될 겁니다.

 

우리는 회사에 예상할 수 없는 수준의 대응을 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준비한 것은 이것입니다."

 

노 위원장의 연설과 몇 가지 구호가 이어진 뒤 집회는 마무리됐다. 해직자들은 다시 회사 로비에 서서 진입시도를 했다. 용역들은 또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팔과 팔을 이었다. 노종면 위원장이 "노조위원장의 노조활동을 막는 무식한 회사가 어디 있냐"고 개탄했지만, 허공에 울릴 뿐이었다. 회사를 대변할 사람은 현장에 없었으므로.

 

"우리도 용역을 쓸까"

 

한 조합원이 "우리도 언론노조와 연대해 용역을 좀 쓰면 어떨까, 용역 대 용역! 어때?" 하니 그나마 작은 미소가 번졌다.

 

오전 9시가 다 되어가니 노 위원장이 급해졌다. 법을 강조하는 사측이 '지각'을 빌미로 조합원들을 괴롭힐까 걱정됐는지 "해직자를 제외한 나머지 조합원들은 회사로 들어가 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단 한명도 꿈쩍하지 않았다. 해직자들만 놔두고 떠날 수 없는 것이 동료애이기 때문이다. 야근한 뒤 합류한 사람, 출근길에 합류한 사람 등등 YTN 조합원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며 그 자리를 지켰다.

 

오전 9시가 넘도록 회사는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용역들은 말뚝처럼 서 있고, 일하러 가야 할 조합원들이 움직이지 않자 노종면 위원장이 먼저 자리를 떴다. 1층 로비 정문 회전문 옆에 쪼그리고 앉아 노트북을 켰다. 오후 2시 15분에 열릴 재판 준비를 위한 것이다. 회사가 고용한 용역들에 의한 노동조합의 업무방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며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쳐 넣었다. 길바닥에 앉아 인터넷을 연결하니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했다.  

 

YTN 노동조합은 배석규 대표 이후 첫 번째 출근투쟁을 철저한 준법투쟁으로 마무리했다. 간헐적으로 용역과 충돌할 고비는 있었으나 지혜롭게 넘겼다. 농담을 건네며 긴장도 풀었고, 20대 혈기왕성한 용역들에게는 감정 없으니 너무 세게 하지 말자고 형처럼 말하기도 했다.

 

이날 아침 YTN 노동조합의 출근투쟁은 노조의 승리였다. 회사가 웃돈을 주고 이른 아침부터 고용했을 용역들은 별로 큰일을 치르지 않았다. 몽둥이로 대응하는 사측에 노조가 두뇌싸움을 거니 역으로 당할 수밖에.

 

노종면 위원장은 기자들에게 "노조의 정당한 활동을 방해한 부당노동행위 기록들은 이것으로도 충분하다"며 "조만간 법원에 노동법 위반으로 제소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회사가 여러 군데 덫을 놓고 빠지기를 기다렸지만, 노조는 그 덫을 기회로 활용하고 있었다.

 

노조가 회사보다 한 수 위였다.

 

"회사의 지방발령 설명이 부족해요"

[미니인터뷰] 내달 1일부터 울산으로 가야하는 C기자

YTN 사측은 지난 26일 인사를 통해 5명의 미혼 남성 기자들에게 지방발령을 냈다. 대전, 광주, 부산, 울산, 대구 주재기자인 셈. 회사는 이들에게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취재활성화를 위해 진지를 구축하는 차원에서 이뤄진 인사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YTN 내부에서 회사의 이 같은 설명을 곧이곧대로 들을 이는 없다. 충분한 사전 고지나, 설명, 이해없이 회사가 일방적으로 내린 조처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선례도 없다. 지방선거는커녕 총선이나 대선 때도 이 같은 지방발령은 없었다.

 

노조는 5명의 기자에 대한 지방발령에 대해 명백한 부당노동행위로 간주하고 이 역시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27일 집회에 참석한 C 기자 역시 지방발령 대상자였다. C 기자는 "간부들조차 내가 지방발령을 받는 이유가 따로 있다고 설명할 정도"라며 "회사가 이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고 답답해했다.

 

그는 조만간 결혼식을 올릴 예비신랑이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 갑작스러운 지방발령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C 기자는 "1주일만에 울산으로 가야 한다"며 "울산은 이명박 대통령 후보 시절 동행취재를 한 것 이외 가본 일이 없는 지역"이라고 말했다.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도 회사는 무려 1주일만에 울산으로 가라하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토로했다.

 

C 기자는 일단 노동조합의 방침에 따르기로 하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지방선거 역시 중앙정치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인데 좀 이해가 잘 안 되죠. 회사가 명분이라고 내세우는 게 왠지 부족하게 느껴지잖아요. 상식적으로...선배들도, 간부들도 참고 기다려라,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라고 하니 기다려야지요." 


태그:#YTN 노동조합, #노종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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