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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영남'과 '진보주의자'라는 단어가 김대중과는 얼마나 어색한 관계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경주가 본관인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 19년을 보냈고 대학생이던 1992년 대선 때는 '민중후보' 백기완 선거운동을 했으니 정서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김대중과는 가깝지 않은 사람임에 분명하다.

 

김대중에 대한 영남의 저주는 상상을 초월한다. 나는 19년을 그 속에서 살았다. 빨갱이에 사기꾼은 기본이고 김대중이 대통령 되면 부산 사람들부터 몰살시킨다는 소문도 적어도 부산에서는 흉문보다는 사실에 가까웠다.

 

대학에 들어가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지난 19년을 얼마나 허구와 거짓 속에서 속고 살아왔는지 통감할 수 있었다. 그 충격을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가 모피어스의 빨간약을 먹고 진실을 알게 될 때의 충격과도 비슷하다. 부산의 방송과 신문들에서는 결코 보거나 들을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물론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았다. 김대중을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는 2009년의 대한민국은 어떨까.

 

어떤 이는 그렇게 정보를 통제해서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게 과연 가능하냐고 묻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이제 우리 사회가 민주화 되고 인터넷이 급속도로 퍼졌으니 더 이상 그런 식의 세뇌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국민의 높은 의식수준도 대개는 같이 언급된다. 과연 그럴까.

 

영화 <화려한 휴가>가 나왔을 때 서울의 어느 어르신은 진압군이 정말로 그렇게 잔인했는지 처음 알았다고 했다(나는 내가 본 사진과 영상물보다 영화가 너무 순하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광주항쟁이 일어난 지 20년도 넘었고 해마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기념사업을 하는데도 광주의 진상을 모르는 사람이 꽤 많다. 발포 책임자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중앙일간지의 어느 기자는 그 피해자의 한 사람인 김대중에게 죽기 전에 비자금 실체를 밝히라고 호통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빨갱이 김대중" 세뇌의 주범은 누구?

 

이번에는 김대중 서거를 계기로 그와 관련된 언론보도가 잇따르자 김대중이 정말로 민주주의를 위해서, 남북통일을 위해서 그렇게 진심으로 노력했는지 처음 알았다는 사람들이 꽤 있다. 잘못된 정보에 세뇌되지 않고서야 대명천지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대체로 우리는 일본 국민들이 한일관계에 대해 잘못된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일본의 잘못된 교육과 일본 언론에서 찾는다. 일본은 매우 오래 전부터 우리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고 국제화된 나라이며 인구도 세 배다. 그런 나라에서 대다수 국민들이 잘못된 역사인식을 '세뇌' 당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우리는 한국현대사를 누군가에 의해 세뇌당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렇게 자신할 수 있을까.

 

그 세뇌의 주범을 나는 이번 국장을 통해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김대중 서거에 부쳐 위대한 지도자를 잃었다는 한나라당은 자신들이 특별한 이유 없이 김종필 국무총리(김대중 정부의 첫 총리였다) 인준을 6개월이나 해 주지 않았다는 점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다. 1998년 2월 25일 김대중이 취임선서를 하던 바로 그날부터 한나라당은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다. 민정당과 공화당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뿌리는 그 '위대한 지도자'를 빨갱이로 몰아 여러 번 사지로 몰았다. 아직도 그들은 툭하면 '좌파척결'이나 불순한 배후를 거론하며 정치적 반대자에 낙인을 찍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억울하게 죽어간 것이 석 달 전의 일이다. 자신들의 지난 과거를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그들이 이제 와서 위대한 지도자 운운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조중동은 그들의 훌륭한 공범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신문 사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2000년 6월15일자 <조선일보> 사설이었다. 조선일보의 이날 첫 사설 제목은 'IMT 2000 황금알인가'였고 두 번째 사설 제목은 '양안에 훈풍이'였다. 첫 사설은 당시 차세대 이동통신으로 주목받던 IMT 2000사업의 과열양상을 경계하는 내용이었고 둘째 사설은 중국과 대만 사이의 긴장완화를 다루었다. 그 첫 문장은 이렇다.

 

"비록 부분적이긴 하지만 타이완의 천수이볜(진수편) 총통 정부가 중국대륙과의 '3통(통)'을 허용키로 한 것은 타이완 해협의 긴장완화는 물론, 동북아 지역 전체의 평화정착을 위해 적지 않은 희망을 갖게 해주는 조처로 보인다."

 

이 사설을 실은 날 김대중은 평양에서 김정일과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어차피 그날 선언은 다음날 신문에서 다룰 수밖에 없는 구조이지만 모두들 평양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그날 대한민국의 1등 신문은 중국과 타이완의 관계개선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 조선일보가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향한 김대중의 노력을 있는 그대로 보도했다고 기대하기 어렵다. 햇볕정책을 '퍼주기'라고 가장 앞장서서 반대했던 조선일보가 아니던가.

 

실제 조선일보는 김대중 서거 다음날의 사설에서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을 때 온 나라는 권위주의 체제 아래에서 떨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 사실대로 쓸 수도 없었고, 정직하게 말할 수도 없었다"라고 실토하기도 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조선일보는 사실대로 쓰지도 정직하게 말하지도 않는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입바른 소리하는 노 정객에 저주를 퍼붓던 사람들이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고 갑자기 180도 다른 말로 그를 칭송하고 있으니 그 진의를 믿기 어렵다. 과거에 대한 일말의 반성이 없다면 그들은 내일 또다시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사실대로 쓰지도 않을 것이고 정직하게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존경할 만한 보수주의자, 김대중

 

오늘 김대중을 추모하는 전국적인 열기와는 사뭇 다르게 김대중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적 반감 또한 대단했었다는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지금 추모방송들은 지난 일이라고 쉽게 넘어가지만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승리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흔히 말하는 4요소, 즉 1) IMF가 터지지 않았거나 2) 이회창 아들이 군대 갔거나 3) 이인제가 출마하지 않았거나 4) DJP연합이 불발되었거나 넷 가운데 어느 한 요소만 없었어도 김대중의 당선은 불가능했다. 이 모든 요소를 종합하고서도 김대중은 겨우 39만 표차로 이겼다.

 

나의 고향인 경주와 부산 친지들은 "그냥 김대중이 싫어서", "말하는 게 얍삽해 보여서", 혹은 "전라도 깽깽이라"는 이유로 아무도 찍지 않았다. 국장이 모두 끝나고 김대중을 땅에 묻은 지금, 한국의 현실은 근본적으로 달라졌을까?  오히려 한나라당은 새로운 미디어법을 날치기로 처리해, 이들 힘센 언론사에게 더 큰 힘을 쥐어주려 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제2의 김대중 같은 거목을 또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19년의 세뇌에서 벗어났을 때 나는 혁명을 꿈꾸는 학생운동권이었다. 사회혁명의 관점에서 본다면 김대중은 확실히 우리의 대안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러 해 운동에 가담하면서 수십 년 동안 민주화의 한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가늠할 수 있었다. 적어도 김대중은 그 오랜 세월 동안 헌정질서를 유린하거나 공범으로 가담하지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김대중은 존경받을 이유가 충분했다. 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김대중은 존경할 만한 보수주의자였다.

 

과학에서는 또 다른 길, 혹은 대안(alternative)이 무척 중요하다. 과학이 발전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또 다른 길의 가능성을 열어 두었기 때문이다. 과학에서는 또 다른 가능성이 곧 축복이다.

 

나는 한국의 민주주의도 이 얼터너티브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고 생각한다. 김대중은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박정희 말고도 대통령을 할 만한 사람이 있음을 직접 증명했다. 예비군을 없애도 국방을 할 수 있음을, 남북간 화해협력으로도 통일의 길을 열 수 있음을 주장했다. 군사독재나 한국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보편적 민주주의도 한국에 적용할 수 있음을, 재벌위주의 정부주도 관치경제 말고 시장의 자율성과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구조를 만들 수 있음을, 그리고 호남 출신도 충분히 국가를 잘 운영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어서는 실제로 그 다른 길이 모두 성공적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직접 증명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김대중이 IMF를 극복할 때 그의 방식이 아닌 또 다른 대안을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알짜기업들이 헐값에 팔려나갔고 신용불량자들이 대량으로 생겨나 후대 정부에까지 큰 부담을 지웠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불행했던 것은 그런 대안을 실천해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기보다 대안을 말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길을 말하는 것은 곧 빨갱이요 좌경반란분자였다. 불행하게도 얼터너티브를 인정하지 않는 현상은 이명박 정부에서 재현되고 있다.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진보주의자들 누구도 김대중처럼 목숨을 걸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김대중을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정말로 '행동하는 양심'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행동의 강도가 남달랐다. 김대중은 진정으로 행동하는 양심에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김대중이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긴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고도 다시 자기 목숨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

 

나는 아직도 김대중이 평양 방문에 앞서 발표했던 대국민 성명을 기억한다. 그날 2000년 6월13일 아침 김대중의 표정은 비장했다. 얼마 안 되는 그 성명을 잘 보면 으레 들어가 있는 "잘하고 돌아오겠습니다"는 말이 없다.

 

"이제 국민 여러분의 뜻을 모아 북녘 땅을 향해 출발하겠습니다."

 

성명서 어디를 봐도 '돌아오겠다'는 말이 없다. 그러니까 그 때 방북하면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이다. 나는 그날 김대중이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평양에 들어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6.15 성명을 들고 무사히 돌아왔다.

 

무엇보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다. 그의 서거를 맞아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그저 유명 정치인의 예정된 죽음 정도로만 다루었다. 그러나 그가 노환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안타까운 현실을 고발하려다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죽음에 이르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대중은 이번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내가 계속해서 '민중후보'나 '진보후보'에 투표하며 자칭 진보주의자로 살아오면서도 현실 정치의 진보주의자들에게 믿음이 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김대중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걸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민주주의의 문제가 그들에게 절박하지 않기 때문일까?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지만 그에 항거해서 그 '흔한' 단식투쟁도 변변히 못하는 사람들을 누가 믿고 따르겠나. 노무현 탄핵 때 이미 분노한 시민들이 길거리에 나앉았는데도 진보주의자들은 "우리는 노무현과 다르다"는 강박관념에 성명서 하나 제대로 발표하지 못했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들에게서 국민들은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위대한 지도자니, 행동하는 양심이니, 그런 말들을 언론에서 들을 때마다 나는 한 자락의 분노를 느낀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그가 쓰러졌는데 왜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2009년 조국의 민주주의는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가. 왜 김대중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가. 그가 정말로 위대한 지도자였다면 왜 우리는 그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지 못했던가.

 

현직으로 있는 이명박 대통령은 이 점에서 일차적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6.15와 10.4 남북정상회담을 없던 일로 하고 남북관계를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로 돌려버렸다. 노무현은 방북 때 "북한은 개혁이나 개방이라는 단어를 무척 싫어한다"고 힘주어 말했음에도 이명박은 자신의 대북정책을 '비핵개방3000'으로 확정했다. 이런 사례들은 두 전직 대통령의 성과를 전혀 모르는 무지의 소산이거나 의도적으로 모욕을 주려는 행위로밖에는 해석될 길이 없다.

 

민주주의는 어떤가. 작년의 미국산 쇠고기 파동에서부터 미네르바, 용산참사, 대법관파동, 쌍용차 사태 등 한국 사회의 자유의 폭과 인권의 깊이가 심각하게 훼손되었음은 지난 1년 반 동안 수많은 사례가 증명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진심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한다면 그가 목숨을 걸고 비판했던 자신의 국정을 반성해 봐야 한다.

 

"꽃은 화려할 때 지는 기야!"

 

영화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어린 화랑들을 사지로 내몰면서 내뱉은 말이다. 85년 굴곡 많은 인생, 그 숱한 영욕의 세월을 보낸 김대중이었지만,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마지막 일성을 높였던 2009년 여름의 인동초가 내게는 가장 화려해 보였다.

 

이제는 그처럼 대의를 위해 자기 한 몸을 던질 위인이 누가 있을까 하는 마음에, 다시 시작되는 한 주와 함께 이명박 시대의 일상으로 되돌아갈 생각을 하니 김대중의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김대중을 묻으며, 나는 그래서 한국의 민주주의도 함께 묻히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아득히 멀어져가는 그의 운구행렬 뒤로 나는 어느 시인의 한마디를 떠올렸다.

 

'민주주의여, 만세'




태그:#김대중,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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