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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독선. 이는 '변종'과 '쇼'로 점철된 '정치적 산물'의 극치에 가깝다. 중앙정치에 예속된 지방정치에서도 곧잘 목격된다. 지방자치가 시행된 지 15년 가까이 됐지만 겉으론 풀뿌리민주주의를 외치면서도 내면은 제왕적 독선과 오만의 독버섯이 함께 기생하는 형국이다.

하지만 이제 성숙된 주민의식은 이러한 오만과 독선을 지혜롭게 심판할 줄 알게 됐다. 평화의 섬 제주지역에서 불기 시작한 주민소환 바람이 전국을 강타할 기세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재선, 3선을 노리며 독선과 오만을 일삼거나 업무추진비를 '쌈짓돈'처럼 펑펑 쓰는 단체장들은 아마 뜨끔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무섭게 전염된 오만과 독선은 쉽게 치유되지 않고 있다. 정치적 습속은 그래서 늘 무섭다. 여전히 '주머닛돈이 쌈짓돈'처럼 쓰여 지고 있는 단체장들의 업무추진비에서 특히 느껴진다. 그런데 제주도지사 주민소환과 단체장 업무추진비 공개가 적절한 시점에서 이뤄졌다. 독선과 오만에 맞선 제주도민들의 성숙한 풀뿌리민주주의 의식이 독선과 오만의 좋은 치유제가 되기를 기대해 보는 이유다.           

[# 장면 하나] '평화의 섬' 제주민심을 사납게 만든 것은...

<제주일보> 6일자 인터넷신문 캡쳐화면.
▲ 김태환 제주지사 주민소환... <제주일보> 6일자 인터넷신문 캡쳐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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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아름답고 조그만 마을에 격랑이 찾아들었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천동 강정마을 민심에 갑작스런 난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금세 평화의 섬 전체가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다. 돌연 해군기지를 유치하겠다는 김태환 제주특별자치도지사의 발언에 민심은 사납게 칼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해군기지는 지난 2002년부터 제주에서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매우 민감한 이슈였던 것이다.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항과 남원읍 위미항 등을 대상으로 5년여 동안 '후보지 검토', '주민 반발', '논의 보류', '후보지 재검토'라는 악순환을 거듭해 왔기 때문. 그 사이 해군기지는 뜨거운 감자에서 민심을 폭발시키는 거대 뇌관으로 변했다. 

그런데 2007년 봄, 강정마을이 해군기지 유치를 전격 선언하고 나섰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 김 지사는 제주도민 여론조사를 거쳐 5년여를 끌어오던 해군기지사업을 강행했다. 당시 제주도민 15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찬성이 54.3%로 과반수를 넘었고 반대는 38.2%였다는 논리를 앞세웠지만 민심의 뇌관도 이때부터 거칠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김 지사가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유치결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마을은 찬반양론의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었다. 마을 총회에서 해군기지 유치결정을 발표했던 마을회장이 해임되고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에서도 반대여론이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해군기지사업 추진은 급물살을 탔다. 그해 12월 국회에서 해군기지 건설예산 174억 원이 통과됐다. 제주도와 해군의 군사기지 설치를 위한 거침없는 행보는 주민들과 지방의원, 지역 국회의원들의 문제제기도 소용없었다. 이때부터 민심은 독선과 오만에 대치되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런 가운데 올 4월 27일 국방부와 국토해양부, 제주도가 일방적으로 제주해군기지와 관련한 기본협약서(MOU)를 체결하기에 이른다.

시민단체와 지방의회는 "굴욕적인 기본협약서를 인정할 수 없다"며 "제주도민의 대의기관인 도의회를 무시하고 기본협약서를 체결한 제주도지사는 사과하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제왕적 도지사'란 표현이 언론에 등장했다. "평화의 섬에서 도민들의 의사에 반한 독선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나운 민심이 연일 지역언론의 지면과 영상을 가득 메웠다.

[# 장면 둘] "제왕적 독선과 아집을 주민소환투표로 심판하자"

<한라일보>> 6일자 인터넷신문 캡쳐화면.
▲ 주민소환 오늘 발의... <한라일보>> 6일자 인터넷신문 캡쳐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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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6일. 전국 광역단체장 가운데 처음으로 김태환 제주특별자치도지사에 대한 주민소환투표가 발의됐다. 제주선거관리위원회는 "주민소환법에 따라 6일 오전 9시 김 지사에 대한 투표일·투표안·소환청구요지 등 주민소환투표를 공고, 발의하겠다"고 5일 밝혔다. 김 지사의 직무정지로 이상복 행정부지사가 도지사 권한대행을 맡게 됐다.

주민소환투표는 오는 26일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까지 진행된다. 투표일까지 21일간 도지사 직무가 정지되는 초유의 일이 제주에서 발생했다. 이 바람에 지방선거를 1년여 앞두고 제주도 정치권은 물론 선거관리위원회가 잔뜩 긴장하며 바빠졌다. 이날 제주지역 언론사들은 일제히 "제주선관위는 26일 실시될 주민소환투표가 '제주특별자치도지사 김태환을 도지사직에서 물러나게 하자는 의견에 대해 찬성 또는 반대를 선택하는 형식으로 실시된다'고 설명했다"며 대서특필했다.

투표결과에 따라 김 지사의 운명은 갈리게 된다. 투표권자 총수의 3분의 1이상(투표율 33.3%이상) 투표와 유효 투표수의 과반수이상이 찬성하면 도선관위의 투표결과 공포시점부터 김 지사가 도지사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하지만 투표권자 총수가 3분의 1에 미달할 경우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투표함은 개봉되지 않는다. 또한 3분의 1이상 투표하더라도 유효 투표수의 찬성자가 과반수를 넘지 못하면 김 지사는 곧바로 직무에 복귀할 수 있는 기구한 운명에 처했다.

이러한 진풍경은 해군기지 유치에 반대하는 강정마을 일부 주민들과 민주노총 등 각종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제주해군기지 반대대책위'가 구성되면서 예견됐다. 이들은 "민주성과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한 결정"이라며 해군기지 추진에 반발해 왔다. 이들의 반발은 지난 4월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위한 기본협약이 체결되면서 더욱 조직화 됐다. 제주지역 29개 단체와 정당, 종교계로 구성된 '김태환 지사 주민소환운동본부'가 결성됐고 이들은 지난 5월 6일 기자회견과 함께 주민소환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민심의 뇌관이 기어이 터지고 만 것이다. 제주지사 주민소환운동본부는 지난 6월 29일 제주도 선관위에 주민소환 투표 청구인 서명부를 제출하면서 "주민소환운동은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고 평화의 섬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선택"이라며 "광역자치단체장으로선 처음으로 제주지사에 대한 주민소환운동이 진행되는 것은 비극인 동시에 제주도민의 민주의식을 전국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요소도 있다"고 밝혔다. 

이번 주민소환은 표면적으로 해군기지 추진이 문제가 됐지만 김 지사가 그동안 추진해온 각종 정책들이 시민단체의 반발을 산 것도 또 다른 배경이 됐다는 지연언론의 분석이다. 제주영어교육도시에 영리법인학교를 허용한 것과 특별자치도 4단계 제도개선으로 추진하고 있는 한라산 케이블카, 관광객 카지노, 영리법인병원 추진 등이 불쏘시개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 장면 셋] 오만과 독선에 물든 단체장들,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겨레신문>이 6월 30일 전국 시도지사 업무추진비 사용내용을 공개했다.
▲ 시도지사 방만한 업무추진비 공개 <한겨레신문>이 6월 30일 전국 시도지사 업무추진비 사용내용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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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30일. 전국 시·도지사 업무추진비 공개가 지역정가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내년 6월 2일 실시될 지방선거를 1년 앞두고 <한겨레신문>과 전국민주공무원노동조합(민공노·위원장 정헌재)이 함께 정보공개를 청구해 전국 16개 시·도 자치단체장의 업무추진비 집행 명세를 확인한 결과라는 점에서 유권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한겨레>는 이날 관련 기사에서 "지방자치가 시행된 지 15년 가까이 됐지만, 광역자치단체장의 업무추진비는 여전히 '주머닛돈이 쌈짓돈'이었다"고 보도했다. 단체장들의 독선과 오만의 정도를 실감케 했다. 아마 해당 단체장들은 오싹했을 것이다. 

"상당수 단체장들이 제대로 된 증빙서류를 남기지 않고 이 돈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는 기사는 "일부 지자체에선 선거법 위반 정황이 드러났다"고 사례를 고발했다. 일부 단체장들 중엔 업무추진비가 누구에게 어떻게 쓰였는지는 알 길이 없을 정도로 허술하게 장부를 관리했고, 업무추진비로 경찰과 언론에 '촌지' 봉투를 만들어 지급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심지어 업무추진비의 일부를 자신의 이름으로 단체에 내는 등 현금으로 쓴 업무추진비의 수령 대상을 밝히지 않은 단체장들도 있었다. 업무추진비는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안이한 의식이 다시 확인된 셈이다.

그러나 지방선거를 앞두고 재선, 3선을 노리는 단체장들을 더 뜨끔하게 하는 소식이 이날 함께 전해졌다. "민공노는 앞서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한 김태환 제주특별자치도지사와 업무추진비를 잘 관리해온 김범일 대구시장을 제외한 14개 시·도 단체장을 선거법 위반이나 업무상 배임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할 예정"이라는 기사내용은 지방정가에 큰 파장을 예고해 주었다.

업무추진비는 기관 운영과 시책 추진을 위해 지방자치단체의 장 등이 쓰는 돈을 말한다. 주로 기관 방문자 접대와 직원 격려, 행사비용 등에 쓰인다. 그런데 사용기준과 사후정산 방법 등이 불명확해 '단체장의 쌈짓돈'이라는 논란이 그치지 않는다.

특히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잦아진다. 그동안 너무 많은 사례를 보아 왔다. 언론에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자신의 치적을 내세우는가 하면 선심성 이벤트성 행사에 막대한 예산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사례들은 그러나 이제부터 자주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제왕적 독선과 아집에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풀뿌리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도정과 시정은 주민소환으로도 심판할 수 있음을 제주도민들이 보여주었다. 주민의식은 성숙해져만 가는데 아직도 치졸한 구태를 일삼는 단체장들은 제주지사소환투표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태그:#주민소환, #제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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