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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오래된, 너무나 유명한 이 구절을 새삼 소리 내서 말할 때에 밀려드는 감정이 있었습니다.입학 초반 "너희 학교 어때?"라던 질문은, 뉘앙스를 달리해 지금도 유효합니다.

 

총장선거에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학생들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차기 총장 선거 2차 투표가 지난 20일 끝났습니다. 투표 결과, 김남윤 (60)음악원장이 59표, 박종원(49) 영상원장이 58표를 얻어 각각 1, 2위를 차지했습니다. (1차투표에서는 박종원 원장 64표, 김남윤 원장 55표)  두 후보자 가운데 한 분을 대통령께서 총장으로 임명하는 절차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화부는 학교 측의 이의신청서에 대한 답신에서 말을 에둘러 바꿨을 뿐 기존의 입장을 고수한 채 모든 결정을 차기 총장에게 위임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기 총장 선거에 학내 구성원 모두의 관심이 쏠렸지만, 정작 학교의 가장 중요한 주체인 학생의 의견은 어느 곳에서도 타진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 7월 1일, 문화부 앞에서 집회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서였던 자유 발언 당시 비대위 위원장께서 몹시 안타까운 표정으로 총장 선거에 관한 발언을 자제해 주십사 하는 양해의 말을 거듭, 거듭 하셨습니다. 선관위 측에서는 학내는 물론 외부에서 학생들이 총장선거에 관한 발언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는 투표의 공정성을 잃지 않기 위함이라 하였습니다.

 

또 그와 같은 이유로 선관위 측에서는 '한예종사태 대응연석회의'(이하 한사연)이 주최한 '자유예술대학 강좌'가 총장선거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의견을 한사연에 전달했습니다. '자유예술대학 강좌'(학생과 대중들을 상대로한 공개강좌) 는 어디까지나 자율적인 교육 프로그램임이 분명하였지만, 한사연 측에서는 본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왜곡된 주장이 총장 선거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하게 연기를 하였고, 결국은 교내가 아닌 프란치스코 교육 회관에서 강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아'도 '어'라고 우기면 '어'가 되어 버리는 요즘 같은 시국에 조금이라도 불미스러운 말들이 나오지 않게 하려는 선관위 측의 입장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일도 아니고, 학생 본인들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차기 총장에 대한 발언을 학생들이 할 수 없다는 점은 심히 애석한 일이었습니다.

 

'아'도 '어'라고 우기면 '어'가 되는 세상

 

신입생으로서 보낸 한예종에서의 생활은 모든 것이 신기했습니다. 정자에 자리 잡아 악기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 교내 도처에 나 붙은 공연 포스터들, 냉기가 도는 복도에서 고운 선을 뻗어 몸을 풀던 무용원 학생들, 열어둔 창문 틈으로 흘러 들어오던 아리아. 서늘한 학내 곳곳에서 이곳이 진정 예술 학교임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우리 학교는 가장 자유롭고 열정적이며,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단 한 순간도, 이런 광경을 더 이상 이곳에서 볼 수 없게 되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가장 앞선 학문을 접하고, 가장 새로운 실험을 시도할 수 있었던 장소가 변질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 중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학내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이제는 예전과 다릅니다.

 

악에 악으로 받쳐서는 안 되지만 상황에 모가 나고 날이 세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순간조차 예술로 승화시켜야 함을 상기하고 상기해도 악화일로의 상황에 어느새 무뎌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지지부진한 싸움이 될 줄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상황은 흐릿해서 보이지 않고 정작 스스로 무언가를 하고 싶어서 할 수 없음에 지쳐가는 마음을 언제까지고 모른 척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때에 제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저 구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저희는 언젠가 어느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한 이들에게 감동을 줄, 예술가가 될 것입니다. 그런 저희에게 필요한 것은 감사처분도, 구조개편도, 좌우 구분도 아닌 보다 폭 넓은 교양과 깊은 사고의 배양지이며 시대를 앞서나갈 수 있는 발판입니다. 그리고 그보다도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교권과 학습권의 자유, 상상력의 자유입니다.

 

시대를 이끌어나가고자 하는 우리 한국예술종합학교에 필요한 것은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목소리'입니다. 학생과 학부모들이 땀과 눈물로 지키고자 하는, 새로운 예술의 시대가 태동할 이 터전을 정치꾼들의 입속에 맞게 재보거나 하지 말아주십시오.

 

하나의 색으로는 그 아류 밖에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닌 색색의 빛깔을 지켜주실 수 있는 분만이 저희의 캡틴이 될 자격이 있음을 모든 분들이 알고 계십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의 미래는 학생이며, 그것이 최우선되어야 함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차기 총장님, 바라건대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내주세요

 

한 사람의 일생은 짧지만 인류의 역사는 깁니다. 그 긴 역사를 관통하여 마지막 날까지 함께 하는 것은 어느 한 시대의 정권도 사상도 아닌 그와 함께 이어져 내려온 예술이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입니다.

 

순간의 역사를 지배하는 것은 개인의 욕망일지도 모르지만, 인류의 역사를 이루는 토대는 희망을 향한 순수한 열정임을 아직도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시 날기 위해 하늘을 보고 있지 않은가요.

 

지금도 저희 학생들이 바라는 것은, 자유롭게 공부할 권리이며, 그 권리를 주장할 자유입니다. 누구보다도 학생들이 세계를 이끌어나갈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미래를 생각할 분이 총장이 되셔야 합니다. 정치색으로 학생들을 분별하는 게 아니라 그가 품고 있는 가능성을 '볼'줄 아는 분만이 총장이 되셔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그래도 새삼 강조하고 싶은 요즘입니다.


태그:#한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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