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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기념묘지...민들레꽃도...클로버 꽃도 피었어라...
▲ 양화진... 순교자 기념묘지...민들레꽃도...클로버 꽃도 피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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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 순교자기념묘지 안에 있는 백주년기념교회

강화도 마니산 등반을 하고 서울 언니네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뒷날, 계속 쏟아지는 비에 갇혀 있다가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비 오는 거리로 나왔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오산리 기도원으로 간다. 서울 행주대교를 건너고 자유로를 타고 가다가 문발 IC로 빠져나와서 계속 직진, 교하신도시를 지나 광탄 방향으로 가다보니 오산리 마을로 진입한다. 멀리멀리 온 듯한 느낌이 절로 든다. 그야말로 서울 위, 판문점하고 가까운 곳이 아닌가.

지도상으로 보니 황해도 개성이 바로 앞이다. 오후 3시 10분이다.  오산리 기도원으로 가는 입구 앞에서 만두와 옥수수를 사서 허기진 배를 채웠다.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오산리 187-5번지에 위치한 오산리기도원에서 며칠 있을 작정이다. 오후 집회에 참석하고 교회에서 곤하게 잤다.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새벽집회에 참석한 뒤, 오전 8시 오산리기도원 버스로 서울로 이동했다.

백주년기념교회...
▲ 양화진 백주년기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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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꼭 한번 가보리라 생각했던 양화진순교자기념관도 볼겸 양화진순교자기념관 바로 앞에 있는 백주년기념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릴 겸해서 바삐 서둘렀다. 기도원 버스를 타고 서울 여의도 순복음교회 앞에서 내려서 교회를 한번 둘러본 뒤 전철역 여의도나루에서 공덕으로, 공덕에서 합정동에서 하차한 다음 7번 출구로 나왔다.

7번 출구로 바로 나오자 '성지길'이라는 표시판이 보이고, 다시 양화진순교기념관이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300m 전방에 양화진선교사묘지가 있다. 10시 50분, 골목길로 접어들어 찾아간 백주년기념교회는 2부예배가 오전 11시 30분에 시작되었다. 교회 안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홀에 앉거나 서서 차와 커피를 마시며 교제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11시쯤 되자 2부 예배를 드리기 위해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따라 예배실로 들어갔지만 이미 앞자리는 가득 차고 뒤에서 세 번째쯤 오른쪽 의자에 앉았다. 조용한 경음악 찬송이 흐르는 가운데 순서에 따라 예배가 시작되었다. 설교시간이 되자 이재철 목사님이 강대상 앞에 나와 원고 없이 조용한 어조로 설교를 시작했다.

군더더기 없는 설교, 제스처 없는 설교에 한자리에 모여 앉은 성도들은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설교에 몰입했다. 예배를 마치고 밖으로 나올 때 한사람 한사람과 일일이 악수하는 이재철 목사님과 악수하였다. 언제어디서나 만나도 친근하게 느껴지는 따뜻한 카리스마를 가진 분이었다. 더 오래 긴긴 말씀을 들으며 있고 싶었지만 밖으로 나와 교회 바로 뒤에 있는 양화진순교자기념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양화진순교자 기념묘지

순교자 기념묘지에서...
▲ 양화진... 순교자 기념묘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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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순교기념묘지는 서울 합정동에 위치해 있다. 양화진은 옛날 군사기지겸 강을 건너는 나루터였다고 한다. 한강 쪽은 천주교 성지인 절두산, 북쪽은 개신교 외국인묘지가 있다. 19세기 후반, 1890년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일제의 강제에 의해 철수할 때까지인 1940년까지 그들의 생을 조선 땅에서 마감했던 분들이 묻혀있는 곳이다.

언더우드 목사의 부인인 홀트 여사와 2세 원한경 부부, 아펜젤러 2세, 의료선교인 헤론의 무덤 등 수많은 무덤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서울 외국인묘지 조성작업은 1890년에 이루어졌다. 이곳이 외국인들의 묘지가 된 것은 제중원에서 활동하던 장로교의 의료선교사 헤론의 죽음에서 발단이 되었다고 한다.

헤론이 이질에 걸려 1890년 7월 26일 소천하였으나 그의 시신을 묻을 곳이 없었다. 개항장인 인천에 이미 외국인 묘지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더위에다가 교통마저 불편하여 인천까지 시신을 옮기면서 장례를 치룰 수가 없었다. 북 장로교 선교부가 정부에 이 같은 사정을 알리고 서울 가까운 곳을 묘지로 지정해 주도록 요청하자 정부에서는 한강 건너 야산 기슭 모래밭을 제공하였다.

하디  선교사(감리교) 묘지...
▲ 양화진... 하디 선교사(감리교)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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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곳은 묘지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도 외국인 시신을 묻으면 재앙이 내린다고 두려워하여 묘지를 매입할 수가 없었고 할 수 없이 헤론의 시신을 임시로 정동헤론의 집 구내에 안치한 후 선교사들을 비롯한 주한 외국인들의 가족묘지조성을 위한 교섭을 한국정부와 진행,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양화진에 1만 평방피트 정도의 매장지를 허락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7월 28일 오후에 헤론의 시신을 이곳으로 옮겨 매장하였다. 이때부터 한국을 위해 이 땅에 묻히길 원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묻혀 개신교의 성지가 되었다. 참으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이 낯선 이국땅인 한국에 복음을 들고 와서 전하다가 순교한 수많은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들의 묘지가 여기에 있었다.

순교자기념묘지...
▲ 양화진... 순교자기념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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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서 아는 선교사이름도 더러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묘지들에 새겨진 이름들은 모르는 이름들이었다. 캠벨선교사, 하더선교사, 제임스 윌리엄 터느, 벤자민 리온푸너, 제임스 윌리엄 터느 라는 두 아이 이름이 나란히 적혀있는 비도 있었다.

벤자민은 1915년 6월 15일에 태어나 1915년 12월 24일에 죽었고, 제임스 윌리엄 터느는 5월 13일에 태어나 5월 14일, 바로 뒷날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어린아이들 묘들이 따로 마련된 것도 곳곳에 보인다. 3대에 걸쳐서 우리나라 선교사로 있었던 언더우드선교사 기념비도 보인다.

순교자 기념묘지...어린아이들 묘들...
▲ 양화진... 순교자 기념묘지...어린아이들 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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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우리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드렸던 선교사들 잠들어...
▲ 양화진 ....여기...우리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드렸던 선교사들 잠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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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대에 걸쳐서라도 이 나라에 복음을 심기 원했고 자신들의 삶을 드렸던 분들의 묘 앞에 숙연해진다. 언더우드3세인 원일한은 6.25에도 참전했었다.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들의 묘지엔 초록빛 풀만 자라고 있다. 네잎클로버 꽃들도 6월의 햇살에 하얗게 웃고 있고 민들레꽃도 홀씨 되어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도 보인다.

그동안 양화진선교사기념묘지는 방치되어 왔다.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는 훼손된 묘지와 소홀한 관리를 보며 양화진묘지를 전담할 곳으로 2005년 기념교회를 세웠고, 양화진은 백주년기념교회가 들어서면서부터 새롭게 변모되기 시작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 양화진 묘원은 전혀 관리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부러져 나간 십자가처럼...양화진 순교자 기념묘지는 불과 몇년 전만 해도 거의 방치되다 시피 했었다...
▲ 양화진... 부러져 나간 십자가처럼...양화진 순교자 기념묘지는 불과 몇년 전만 해도 거의 방치되다 시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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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비석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가하면 아무도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허물어 진채 방치되어 있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의 생가는 불신자가 살고 있고 무학산에 주기철목사님이 기도하던 기도바위도 그저 그렇게 방치되다시피 되어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 신앙의 문화유산을 아끼는 의식 있는 자의 손길이 참으로 아름답지 아니한가.

그 손길이 닿아 우리가 지금 좀더 아름답게 단장된 양화진묘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양화진묘지를 둘러싸고 그 소유권소송을 비롯해 많은 갈등을 빚고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쪼록 선교사들의 후손들에게도, 이 땅에 순교의 피를 뿌린 선교사들을 아끼는 교회와 교계에도 서로 불화 없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태그:#양화진, #백주년기념교회,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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