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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5일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발표된 라디오 연설에서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들을 몇 가지 예시한 후,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원적 처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이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여러 해석들을 내놓았다. 일부에서는 대대적인 인적 쇄신이나 전면적인 국민 소통 대책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치도 나오지 않았다.

정작 청와대는 이 '근원적 처방'이라는 것의 실체를 부인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인적 쇄신론을 부정했으며, 박형준 홍보기획관은 "(이 대통령의 발언은) 여러 문제들을 깊이 있게 한 번 고민해 보자는 뜻"이라면서, "(대통령이) 어떤 결론을 내린 것 같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의 '근원적 처방'이란 것이 차후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될지는 아직 속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으로서 한 가지 뚜렷하게 새로이 나타난 것은 청와대와 한나라당이 갑자기 미디어법 개정에 투쟁적(?)으로 나선 점이다.

물론 미디어법 개정은 6월에 처리하기로 여야 간에 진즉 합의된 사항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사이 재보궐선거, 북핵실험 그리고 노 전 대통령 서거 등의 대형 변수가 있었다. 특히 노 전 대통령 서거는 작금의 정치 지형에 무시하지 못할 변화를 주었다. 여야는 조문 기간 동안 정치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가 미디어법을 부엉이 바위에 피도 마르기도 전에 이토록 서두르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들이라고 해서 여론의 반발을 느끼지 못할 리는 없을 터이다.

무엇보다 미디어법 처리에 대한 여야 합의에는 '국민여론 수렴' 후에 한다는 전제 조건이 달려 있었다. 그런데도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유독 미디어법 처리에만은 수상하리만큼 성급하고 초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선두에는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과 나경원 의원이 서 있다. 두 사람은 미디어법에 관한 한 마치 전장의 '첨병'과 '여전사'처럼 기민하고 맹렬하다. 하지만 너무 서두르다 보니 실수와 무리수를 거푸 범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동관 대변인의 성급함과 생뚱맞음

이동관 대변인.
 이동관 대변인.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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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외국에서 <피디수첩>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경영진이 시청자에게 사과하고 총사퇴했을 것이다. 미디어법 처리와 관련해서 반대하는 논리로 제기됐던 주장 중의 하나가 '공정 보도가 안 될 우려가 있다'거나 '저질 방송이 될 우려가 있다' 등이다. 공영의 간판을 걸고 있는 방송이나 그렇지 않은 방송이나 아침이나 저녁때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막장드라마나 패륜을 보여주는데 더 이상 어떻게 수준 낮은 방송을 할 수 있겠나?"(19일, 이동관 대변인 청와대 브리핑 발언 발췌)

이것은 검찰의 <피디수첩> 기소가 발표된 직후에 한 말이다. 검찰의 기소 행위에 대한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그는 이제 막 기소되어 법원의 판결을 기다려야 하는 사건을 함부로 유죄로 단정하여 말하고 있다. 이것은 청와대가 법원 판결까지 선점한다는 비판을 염두에 두지 못한 불찰로 비친다. 아니면 법원 판결 따위는 아예 무시해 버리겠다는 권력적 전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지금의 방송을 음주운전에 빗대면서 뜬금없이 자기도 음주운전을 해 봤다는 전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이 대변인은 공영방송과 민영방송을 싸잡아 비판하면서 현재의 방송 구조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식의 논리를 펼치고 있다. <문화방송>은 이에 대해, "여당 내에서도  '피디수첩 기소를 호재로 삼아 이번에는 반드시 미디어법을 처리하라는 복선이 깔려 있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쯤 되면 미디어법 처리에 대한 그들의 집념이 어느 정도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나경원 의원의 선입견과 자가당착

"정책에 관한 여론조사는 국민들이 이해하시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국회의원들도 동료의원한테 미디어법에 대해 세세히 물어 보면 정확하게 모르는 분이 있을 것이다. 앞으로 모든 정책 법안을 이렇게 여론조사 한다는 것도 적절치 않다. 국회의 고유한 입법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형국이다."(18일 기독교방송 인터뷰, 나경원 문방위 한나라당 간사 발언 발췌)

나경원 의원.
 나경원 의원.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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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런 발언은 국민을 무시하는 태도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다분하다. 또한 이 발언의 문맥 속에는 국회의원도 잘 모르는데 국민이 알 수 있겠느냐는 선입견도 들어 있다. 그는 자기를 국회의원으로 만든 주체가 국민여론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 이는 또한 입법권이란 국민의 의사를 대신하여 행하는 것이라는 대의제로서의 본질마저 인식하지 못하는 발언이다.

그의 말대로 국민들이 미디어법의 세세한 부분까지는 잘 모를 수 있다. 하지만 국민들은 나경원 의원의 발언이 여론조사를 하면 미디어법 강행 처리에 대한 반대 의견이 더 많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미디어법 처리가 좌절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기 때문에 나온 궤변이라는 점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나 의원은 지난 2월 26일 부평 여성당원 워크숍에서 전날(2월 25일) 한나라당이 미디어법을 전격적으로 직권상정한 것을 옹호하면서, "그 판단의 결과인 재보궐선거가 중요하고 특히 부평 을이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부평 을을 포함한 재보궐선거의 결과가 어떠했는지 국민 모두가 알고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미디어법은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닐까?

국민들은 나 의원이 지난 대선 정국에서 이명박 후보의 광운대 동영상("BBK를 설립했다"는 발언이 들어 있는 동영상)이 노출되자 "B.B.K.라고 한 것은 맞은데 주어가 없다"고 말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마침 아고라에서는 18일부터 '나경원 의원의 국회의원직을 박탈하자'는 청원 서명이 진행 중에 있다. 마감을 9일 남긴 시점인 22일 새벽 현재, 목표의 99%(2만 3462명)가 달성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진두지휘하는 미디어법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18일 최고위원회에서, "이제 국회에서 여야 간에 논의를 시작해 약속대로 6월 내에 표결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동관 대변인이나 나경원 의원은 물론 안상수 원내대표도 미디어법 개정의 핵심 주체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누군가의 하명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에 불과해 보인다는 것이다.

미디어법은 '겸영규제'와 '진입규제'를 완화하는 것에 핵심이 있다. 다시 말해 신문이 방송을 겸영할 수 있도록 하고 대기업이 방송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미디어법 개정의 진원지이자 주체는 이명박 대통령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미디어법에 대해 언급했던 내용을 보면 확연해진다.

강상현 위원장 등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 야당측 위원들이 18일 오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민주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 시민사회단체가 공동주최한 '국민여론무시, 언론악법 강행 한나라당 규탄 기자회견'에서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 파행 경과보고를 하고 있다.
 강상현 위원장 등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 야당측 위원들이 18일 오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민주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 시민사회단체가 공동주최한 '국민여론무시, 언론악법 강행 한나라당 규탄 기자회견'에서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 파행 경과보고를 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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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간접 지원을 통해 언론이 자율적으로 건전한 여론 형성 기관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언론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겠다."(이 대통령, 2007년 대선공약집)

"신문법도 몇 가지 조항은 바꿔야 한다."(2007. 12.7 <조선일보> '대선인터뷰')

"언론이 두렵다고 대못을 박지는 않겠다. (언론의) 전봇대를 모두 뽑을 것"(2008.1.22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 출판기념회)

"방송과 통신이 융합하는 시대에 신문과 방송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매체 간 교차 소유는 기본적으로 허용해야 한다."(2007.11.16 <중앙일보> '대선주자 설문조사')

"시대적 추이에 걸맞게 우리도 KBS 2를 KBS에서 분리하고 MBC의 단계적 민영화 추진 등을 우리 방송 산업 전반의 구조 개편과 연계해 심도 있는 논의를 할 시점"(2007.11.1 <조선일보> '미디어 관련 정책 답변서')

신문과 방송 겸영은 이른바 메이저 신문인 조선·동아·중앙 등이 강력히 요구해온 사항이다. 조중동은 한국 신문 시장의 7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그런데 신문과 방송의 겸영은 당연히 두 매체의 차이를 무화시킬 것이다. 다시 말해 '조중동 방송'이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방송 진출은 한국 대기업들의 숙원 사업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아도 광고주는 방송을 움직이는 위력을 행사하고 있다. <문화방송>의 신경민 앵커가 교체된 것도 대기업들이 '뉴스데스크'에 광고를 주지 않았던 이유가 가장 크다. 이런 상황에 대기업이 방송의 지분까지 거머쥔다고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조중동과 대기업이 계속 우군으로 남을까

미디어법 개정은 조중동과 대기업과 한나라당의 이른바 '삼각 카르텔' 속에서 진행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신문과 대기업들이 원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약속해 주었다. 그리고 여전히 조중동과 대기업은 이 대통령의 우군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대통령은 미디어법의 맹점을 읽지 못한다. 일단 소기의 목적을 이룬 조중동과 대기업들이 이 대통령에게 변함없는 우군으로 남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국민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일을 벌일 경우 그 후유증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바로 그랬다. 국민 여론을 백안시하는 미디어법 강행이 제2의 광우병 사태로 번지지 말란 법은 없다.


태그:#미디어법, #이동관, #나경원,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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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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