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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는 두 마리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광장의 공포와 선거 패배라는 유령이 그것이다. 그 유령들은 레임덕(lame-duck)의 공포로 수렴된다.

 

지난 4·29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은 5 대 0으로 참패했다. 한나라당은 옛 열린우리당의 '23 대 0' 패배를 떠올렸다. 한나라당의 미래는 열린우리당의 과거가 아닐까?

 

노무현 정부 시절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은 17대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점하며 화려하게 출범했다. 그러나 이후 네 차례의 재보선과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에 참패한 이후 사실상 국정운영의 동력을 상실했다. 레임덕에 빠진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으나 박근혜 대표는 이를 뿌리쳤다.

 

한나라당 쇄신특위는 선거 패배와 레임덕이라는 공포의 산물

 

4·29 재보선 참패를 계기로 만들어진 한나라당 쇄신특위(원희룡 위원장)는 선거 패배와 레임덕이라는 공포의 산물이다.

 

한나라당 쇄신특위는 이명박 정부의 국정 쇄신을 요구하며 기세등등하게 출범해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쇄신의 목표가 '국정 쇄신'에서 '당 지도부 사퇴'로 변질되더니 끝내는 '화합형 대표'를 주문하는 것으로 끝났다. '선 화합 후 지도부 퇴진'이다. 쇄신특위라는 이름이 무색할 지경이다. 용두사미라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비유컨대, 한나라당 초재선 의원들과 쇄신위원들이 처음에는 이명박 대통령을 향해서 칼을 뽑았으나 그 칼이 슬그머니 박희태 대표를 향하더니 이제는 박근혜 전 대표를 겨눈 꼴이다. 박 전 대표에게 뒷짐 지고 있지 말고 당의 전면에 나서라는 것이다. 좋게 해석하면 일종의 '소연정'이고, 나쁘게 받아들이면 '윽박지르기'다.

 

사실 대통령제 국가에서 국정 쇄신은 '대통령 목에 방울 달기'다. 3권 분립이라는 헌정의 대원칙에도 효율성을 앞세운 대통령 권력은 집권여당에게 '거수기' 역할을 해줄 것을 바란다. 그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의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도 지금의 한나라당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108명이나 되는 열린우리당 초선 의원들은 '108번뇌'라고 부를 만큼 대통령과 당 지도부에 골치 아픈 존재였다. 일부 초선 의원은 국정 쇄신을 요구하며 공개적으로 '대통령을 물어뜯겠다'고까지 했다. 한나라당 쇄신에서는 그런 기개마저 찾을 수 없다.

 

'만사형통'의 2선 퇴진은 성과... 한나라당 내부 사정과 불신만 가중

 

성과가 아주 없지는 않다. 만사'형'통(萬事兄通)으로 통하는 형님 이상득 전 국회 부의장의 2선 퇴진이 그것이다. 그러나 형님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당청에 널리 포진해 있는 그의 인맥들이 건재하고 그 인맥의 영향력이 살아있는 한 '형통'하려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쇄신특위 활동은 '친이 vs 친박' 간 대립은 물론, 친이 진영 내부의 대립 양상까지 드러낸 한나라당 내부의 복잡한 권력지형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그것은 계파별로 구성을 안배한 쇄신특위의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다.

 

우선 특위위원들 스스로가 계파 수장이 정한 금도를 넘지 못했다. 친이계는 형님의 2선 퇴진으로 국정 쇄신 요구를 접고 '조기 전당대회'로 방향을 틀었으며, 친박계는 박 전 대표를 보호하는 데 급급했다.

 

그런 가운데 쇄신 논의와 계파 갈등이 중첩되면서 의원들은 '지도부 사퇴'와 '조기 전대'라는 쇄신방안 그 자체보다 그 뒤의 정치적 노림수에 주목했다. 친박계는 '지도부 사퇴'와 '조기전대'의 배후에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전면 복귀 시나리오가 있다고 의심했다. 반면에 친이계는 박 전 대표가 정부와 한나라당이 더 망가지기만을 기다린다고 의심했다.

 

그런 의심에는 경험칙에 의한 상당한 합리성이 깃들어 있다. 지난 총선에서 공천 학살을 당했다는 피해의식이 그것이다. 불행하게도 그 합리성은 상호간의 불신에서 싹 튼 것이다.

 

'선거의 여왕' 박근혜의 선거 패배와 레임덕 공포

 

친박계는 어차피 내년 지방선거가 다가오면 '무혈입성'이 가능한데 벌써부터 당 대표를 맡아서 매를 벌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다. 이런 판단의 뒤에는 친이계가 박 전 대표를 당 대표라는 나무에 올려놓고 흔들어 상처를 입히려 한다는 의심이 자리 잡고 있다.

 

친이계는 친박계가 모든 것을 계파적인 2분법적인 시각으로만 본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또 친박계가 이명박 정권의 성공은 안중에 없고 차기 집권에만 몰두한다고 의심한다. 이런 의심과 불신의 골에서 차기를 모색하는 일부 중립세력에게 '화합형 당대표'라는 일종의 '소연정' 제안은 더할 나위 없는 꽃놀이패다.

 

이들에게도 공통분모는 있다. 다가올 선거에 대한 공포와 패배 의식이다. 사실 여당의 '재보선 잔혹사'는 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선택한 이후 일종의 선거 공식처럼 자리 잡았다. 박근혜 의원은 야당 대표 시절에 집권여당 대표 8명을 갈아치우고, 23 대 0이라는 전적을 세워 '선거의 여왕'이라는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그러나 기록은 깨지기 위해 있는 것이다. 박 의원은 여당 대표를 맡는 순간부터 기록을 깨기 위한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기록 갱신과 함께 박 전 대표의 힘을 뒷받침한 신비주의와 불패 신화 그리고 '선거의 여왕' 이미지도 깨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전 대표도 선거 패배와 레임덕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런 박 전 대표에게 '소연정' 제안은 노 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만큼이나 참기 힘든 고문일 뿐이다.

 

MB와 한나라당 주변을 배회하는 또 다른 유령, 광장 공포증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주변을 배회하는 또 다른 유령은 광장 공포증(agoraphobia)이다. 광장 공포증은 넓은 장소에 혼자 있을 때 까닭 없이 두려움을 느끼는 신경증의 하나이다. 그러나 한국어판 <위키백과>는 이런 정의를 함께 내린다.

 

"한국의 경우에는 광장 공포증이란 광장에 모인 국민에 대한 집권층의 공포를 말하기도 한다."

 

민주당 등 야4당과 시민사회단체는 서울시청 앞의 서울광장에서 6·10 항쟁 22주년 기념 국민대회를 열기 위해 '1박2일 투쟁'에 돌입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열기와 맞물려 치러지는 이번 6·10 국민대회는 야4당과 시민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대규모 장외집회다.

 

이날 집회에 어느 정도의 국민이 참여하는지, 그리고 집회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느냐에 따라 여야간 협상력이 달라질 것으로 보여 이번 6.10 대회는 자연스레 정국 흐름의 분수령 될 전망이다.

 

그러니 정부와 여당이 기를 쓰고 서울광장을 봉쇄하려는 의도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한나라당은 22년 전 민정당 시절에 6월 광장을 야당과 시민단체, 그리고 국민에게 내줘 6·29 선언으로 이어진 기득권 상실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헌법 쟁취한 광장에서 '헌법 제1조' 노래하는 역사의 아이러니

 

그러나 한나라당도 야당 시절에는 광장을 애용했다. 본래 광장은 힘 없는 소수 야당의 전유물이지만, 한나라당은 힘 있는 다수당 시절에도 광장을 애용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한나라당은 끄떡하면 방탄국회를 열거나 대구와 부산에서 장외집회를 했다. 그 시절 광장이 봉쇄되어 한나라당이 광장을 점거하기 위한 1박2일 투쟁을 벌였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그 집회에서 어떤 의원은 "영남의 일자리를 빼앗아 호남의 자식들에 준다"고 자유롭게 선동했고, 그런 선동 뒤에는 "대구의 공장을 뜯어다가 전주에 옮겼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일부 언론은 신문 1면에 실은 '부산-대구에는 추석이 없다'는 기사로 유언비어를 집대성해 지역주의 민심을 부채질하고 증오를 확대 재생산했다.

 

지금 광장을 차지하기 위해 1박2일 투쟁을 벌이는 야4당과 시민단체는 유언비어를 생산하기 위해 거기 가 있는 것이 아니다. '광주-전주에는 추석이 없다'고 쓰는 신문도 없다. 그들은 다만 '대한민국 헌법 제1조'라는 노래를 만들어 촛불집회 주제가로 부르고 있다. 국민주권과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와 같은 국민의 헌법적 권리를 돌려달라는 외침이다. 그것도 이미 1년째 부르고 있다.

 

22년 전에 '호헌철폐'와 '독재타도'의 외침 끝에 민주헌법을 쟁취했던 그 광장에서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노래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지금 이명박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국민과 진정으로 소통하면서 국정 운영 기조를 바꾸는 '제2의 6·29 선언'이다. 지금은 '박근혜와의 소연정'보다 '국민과의 대연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태그:#광장공포증, #이명박, #국민과 대연정, #헌법 제1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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