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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저녁 서울광장과 청와대로 향하는 태평로에 다시 모여 촛불을 밝히고 있다.
▲ 추모인파 가득한 서울광장 29일 저녁 서울광장과 청와대로 향하는 태평로에 다시 모여 촛불을 밝히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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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빨리 고인이 된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참으로 많은 것을 남겨놓고 역사의 뒤안길을 재촉했다. 고인이 마지막 가는 날까지 사상 최대 규모 조문객과 추모열기는 '아름다운 바보 노무현' 신드롬을 낳았다. 우리사회에 깊은 자성과 성찰을 과제로 남기기도 했다.

"우리는 이 땅에 다시 만나기 어려운 대통령을 잃었다"며 정치권도 언론도 모두 한 목소리로 비통에 잠긴 지난 일주일이었다. 애도의 물결은 깊고 넓게 출렁이며 거대한 너울처럼 우리사회를 덮쳤다. 그러나 늘 그랬지만 우리는 늦게 깨달고 또 빨리 잊는 게 병이다. 조급증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슬픔 뒤에 오는 한없는 회한과 자책이 다시 무겁게 짓누른다.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 등 우리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격화되고 강화된 느낌이다. 정부와 여당, 보수세력, 보수언론 등 우리사회의 주류세력들은 "이제 국민장도 끝났으니 일상으로 돌아가자"며 타협과 화합을 강조하기 바쁘다. 29일 추모성명과 한승수 국무총리의 고인에 대한 조사, 그리고 30일자 신문 사설에서 묻어난다.

<동아일보> 30일자 두 사설.
▲ 이제 일상으로? <동아일보> 30일자 두 사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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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최근의 비극적인 사건을 빨리 잊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다시 빨리 들어가야만 옳다. 그래야 통합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 있는 국민들이다. 누가, 무엇이, 왜 이런 비극을 가져오게 했는지 이젠 냉철히 반성하며 성찰할 때다. 그런데 빨리 잊자고 하는 그들의 태도는 병주고 약주는 꼴이다. 먼저 그간의 상황을 찬찬히 복기해 보자.

[# 장면 하나] 검찰수사 중 목숨 끊은 사례, 왜 이리 많은가?  

그동안 상당수의 사회각계 인사들이 검찰 수사를 받다가 목숨을 끊었다. 왜 이런 일들이 되풀이 되는 것일까? 노무현 전 대통령도 검찰 수사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비극의 첫 대통령으로 기록됐지만 저명인사들의 잇따른 자살사건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3년 8월 4일 새벽 정몽헌 전 현대아산 회장이 서울 계동 현대사옥 12층 자신의 집무실에서 투신해 사망했다. 대북 불법송금과 현대 비자금 사건으로 대검 중수부에서 세 차례 조사받은 직후였다.

이어 2004년에는 안상영 전 부산시장이 수뢰 혐의로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조사를 받고 부산구치소로 내려간 직후 목을 매 자살했고, 두 달 뒤 박태영 전남지사도 수뢰 혐의로 검찰조사를 받으러 가는 길에 한강에 투신해 자살했다. 두 경우 다 검찰조사 직후 또는 직전이었다.

특히 2004년에는 고위층의 '자살 신드롬'이라 할 만큼 무려 5명이 잇따라 목숨을 끊었다. 그해 2월에는 두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부산 국세청 공무원 전 모 씨가 운수업체로 부터 수천만 원을 받은 혐의로 조사를 받다가 승용차 안에서 분신자살했다. 하루 뒤 같은 회사에서 1억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안상영 전 부산시장이 부산 구치소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이어 3월에는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이 노 전 대통령의 형인 건평 씨에게 인사 청탁 대가로 3천만 원을 건넨 혐의로 조사를 받은 뒤 한강에 투신했다. 또 다시 한 달 뒤인 4월에는 박태영 전남지사가 한강에 투신했다. 박 지사는 당시 건강보험공단 재직 시절 납품비리 의혹의 연루돼 검찰 조사를 받았다. 6월엔 이준원 경기도 파주시장이 파주 모 대학 설립과정에서 2천만 원을 받은 혐의로 검찰 소환을 앞두고 한강에 투신했다.

또 1년 뒤인 2005년엔 이수일 전 국정원 2차장이 자신의 집에서 목을 매 숨졌다. 이 전 차장은 도청 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3차례나 받았다. 이듬해인 2006년엔 경찰청 차장 비서였던 강희도 경위가 브로커 윤상림 사건으로, 박석안 전 서울시 주택국장이 현대차 사옥 인허가 비리로 각각 검찰의 수사를 받다가 목숨을 끊었다.

그럴 때마다 언론은 "검찰 수사에 대한 부담과 구속을 사회적 사망선고로 평가하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그 원인을 심층적으로 파헤친 언론은 눈에 띄지 않는다. 언론은 검찰이 흘린 피의사실을 끊임없이 중계하다가 마지막 자살로 사건보도에 방점을 찍곤 했다.

[# 장면 둘] "구속 수사하라"고 외치더니 "고인의 넋에 애도를 표한다"?

<조선일보>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관련 사설 제목들.
▲ 국민이 알아듣게 설명... <조선일보>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관련 사설 제목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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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2009년. 4·29 재보선이 끝난 다음날인 4월 30일. 전직 대통령 가운데 세 번째로 검찰수사를 받으러 가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가족, 측근들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한 달 전이다. 청와대가 제공해 준 대형버스를 쫓느라 봉하마을 부엉이바위 위쪽에서 또는 마을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지상과 고공의 취재보도 경쟁은 가히 전쟁을 방불케 했다.

당시 열을 올렸던 언론들은 꼭 한 달 만에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한다'며 슬픔에 잠겼다. 한 달이 지난 지금에 와선 고인이 된 전 대통령 업적을 재평가하느라 여념이 없다. 영상과 활자에선 당시 속보경쟁에서 보여준 조바심은 온데간데없이 슬픔으로 가득하다. 너무도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카멜레온과 하이에나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4월 30일 아침부터 국내 지상파 방송들과 주류언론들은 노 전 대통령의 소환수사 과정을 중계 보도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검찰수사 중계... 4월 30일 아침부터 국내 지상파 방송들과 주류언론들은 노 전 대통령의 소환수사 과정을 중계 보도했다.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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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가 하면, 심지어 구속수사를 하라고 외쳤던
주류언론들이다. 그 중 소위 살아 있는 권력으로 지칭되는 보수언론, 재벌신문들의 보도행
태는 앞과 뒤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들은 지금 "반목과 대립과 갈등을 통합과 화해와 용서로 승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는 고인의 마지막 유언까지 인용하면서 통합을 강조하는 이들은 불과 한 달 전을 기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전 대통령의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주류언론들이 마녀사냥 식 여론몰이에 검찰과 공조를 취해 왔음이 제목과 기사, 사진들에서 묻어난다. '1억 원짜리 명품시계가 봉하마을 논두렁에 버려졌다', '구속 수사를 해야 한다'는 등 호들갑을 떨며 온갖 수사과정의 내용들을 공표해 왔던 언론들이 이제 와선 고인의 넋에 깊은 애도를 표하고 있다.     

[# 장면 셋] 피의사실공표죄, 이대로 방치해 둘 셈인가?

검찰, 경찰 기타 범죄수사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감독하거나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하여 지득한 피의사실을 공판청구전에 공표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형법 126조에 명시된 피의사실공표죄에 해당한다. 이 죄의 직접적인 보호법익은 물론 피의자의 명예지만 피의사실의 공표로 말미암아 증거인멸 등 범죄수사에 지장이 초래되는 일도 있으므로 국가의 범죄수사권 행사도 이 죄의 보호법익이 될 수가 있다.

'공표'는 불특정 또는 다수인에게 그 내용을 알리는 것이다. 출입기자에게 고지하는 경우도 언론의 특성으로 보아 공표가 된다. 또한 기자가 기록을 열람하는 것을 묵인하는 경우와 같이 부작위에 의한 공표도 있을 수 있다. 형사소송법 198조에는 검사나 직무상 수사에 관계있는 자의 비밀엄수 등에 관한 주의 규정을 두고 있다.

여기에다 헌법 제 27조 4항에 '형사 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고 규정해 놓고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불구속수사 원칙하에 예외적으로 구속수사가 인정되는 것이고, 구속수사의 경우에도 구속기간은 가능한 한 최소한에 그쳐야 하며, 수사기관에 의한 신체구속은 신체적, 정신적 고통 외에도 자백강요, 사술(邪術), 유도(誘導), 고문 등의 사전예방을 위하여서도 최소한에 그쳐야만 한다. 따라서 그 예외의 확장은 극히 최소한에 그쳐야 함은 당연하다.

이에 대해 언론계와 법조계 일각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구속재판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이에 따라 구속 여부가 사실상 피의자의 운명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 있고, 더 나아가서 유무죄 판단에도 큰 영향을 주는 현실에서 언론이 이를 외면하고 기소 후에만 피의사실(범죄사실)을 보도하라는 것은 언론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하고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라는 점에 근거해 피의사실 공표죄의 기준을 구속 시점으로 바꾸거나 불구속재판이 현실화된 이후에나 적용가능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이런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검찰은 "기소할 때까지 피의사실을 밝힌 적이 없다"고 어물쩍 넘어가곤 했다. 그래서 언론들도 '검찰의 수사과정에서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껴서' 또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받는 인사들이 심리적 압박을 견디지 못해서'로 종지부를 찍곤 하는 바람에 우리사회에서 그간 지도층의 검찰 수사 중 또는 수사종료 후 갑작스런 자살사건은 대부분 피의자를 압박하는 검찰의 수사방식의 문제라기보다 결국 '자신의 선택' 탓으로 여겨져 왔다. 

이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사건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제반 문제점을 이번에도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또 어떤 비극을 맞게 될지 모른다.

[# 장면 넷] 역 공세권 잡은 민주당, 미디어법안 처리 어떻게 될까?

<전국언론노동조합>이 29일 발표한 성명내용.
▲ 정치보복 진상 밝혀야... <전국언론노동조합>이 29일 발표한 성명내용.
ⓒ 전국언론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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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려 때문이었을까.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이 마무리된 29일 사상 최대의 추모 인파가 몰린 가운데 열린 영결식이 끝나자마자 전국언론노동조합은 노 전 대통령을 비극으로 내몬 정권과 검찰, 언론의 삼각동맹의 전모를 밝혀내기 위해 진상규명 청문회와 특별검사제 실시를 촉구했다.

언론노조는 이날 발표한 성명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렸다. 노 전 대통령 서거로 뒤늦게 참혹한 현실을 알게 된 국민들이 자책하며 슬퍼한 이유이기도 하다"며 "이제 할 일은 하루속히 비열한 '정치적 타살'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을 비극으로 내몬 정권-검찰-언론의 비열한 삼각동맹 전모를 밝혀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진보진영에서 높게 일고 있다. 그런가 하면 민주당은 30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 "이제 정부가 답할 차례"라며 '정권 책임론'을 우회적으로 제기했다.

김유정 대변인은 이날 구두논평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인산인해를 이룬 수백만 국민의 추모행렬을 보면서 이명박 정권이 무엇을 느꼈는지 이제 답해야할 차례"라며 "국민은 노 전 대통령 서거에 관해 도의적, 법적으로 책임질 사람이 있다고 분명히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서거정국에서 정부와 여당을 향해 강경발언을 해왔던 정세균 대표도 조만간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 책임론'에 대한 공식 입장을 내놓을 것으로 전해졌다. 정치권에 일대 폭풍이 휘몰아칠 기세다. 6월 국회에서 표결처리하기로 했던 미디어법안을 놓고 내내 고민해 왔던 차에 거센 역공을 가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은 것이다. 한 때 고인과 정치노선을 달리하며 선을 그어 왔던 민주당이 이제 탄력을 받게 됐다. 그렇다면 미디어법안은 어찌 될까?    

'바보 노무현', 그를 가슴 속에 안고 뛰어넘기 위해선...

상황을 정리해보자. 지금 주류세력, 보수언론들이 주문하는 대로 "이제 모두 끝났으니 각자 일터로 돌아가자"고 외치며 통합을 강조할 때가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 사회가 다 함께 고민하고 심도 있게 짚었어야 할 대목이 있다. 그 중 검찰의 피의사실공표와 언론의 받아쓰기 경쟁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수사의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의 문제를 짚지 않으면 주류세력들이 그토록 원하는 우리사회의 통합과, 소통의 정치도 어렵다.

가뜩이나 일각에서는 이번 비극적 사고는 살아있는 권력, 이른바 현 정권과 검찰, 보수언론이 공모한 정치적 타살이라며 책임론을 제기하고 있는 마당이다. 특히 이번 사건의 경우는 과거와 다르다. 광범위하고 포괄적으로 피의사실들이 언론에 공개됐다. 더욱이 전직 대통령이란 점에서 제2의 정치적 보복수사라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반드시 그 책임규명이 필요하다.

고인과 고인의 가족, 그리고 관련 인물들의 수사상황은 그간 거의 매일 주류언론에 속보 형태로 중계됐다. 판결이 확정되기도 전에 많은 피의사실들이 세상에 알려졌다. 검찰이 흘렸거나 기자들이 자료를 엿보지 않고서는 보도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았다. 그러고도 검찰은 이번에도 끝까지 "피의사실을 공표하지 않았다"고만 오리발을 내밀 셈인가?

한번 언론에 보도되면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소문난 자는 그대로 '명예 살인'을 당하고 만다. 많은 연예인이 그러했고, 또 많은 공인들이 그러했지 않은가. 언론과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앞에서 그가 죽음으로써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짚어 보아야 할 때다.

그래서 우리는 '바보 노무현'을 가슴 속에 안고 그를 뛰어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검찰과 언론개혁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고인의 합리적 핵심을 계승하고 약점을 뛰어넘는, 시대가 요구하는 바다. 미디어법은 그런 후에 논의해도 늦지 않다.


태그:#바보 노무현, #피의사실공표, #무죄추정의 원칙, #언론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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