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운동회

( 1 / 18 )

ⓒ 조종안

 

우리 마을에 있는 나포초등학교 운동회에 다녀왔습니다. 학생들 응원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들려와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나서 들렀지요. 그런데 현수막에 '나포 교육가족 한마음 체육대회'라고 적혀 있어 조금 어색했습니다. 저희 때는 초등학교는 '운동회', 중·고등학교는 '체육대회'라고 했거든요.

 

시원한 그늘과 잘 가꿔진 정원, 넓은 운동장은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시골학교라서 주변에는 경운기와 볏단이 쌓여 있었는데요. 허수아비 아저씨와 호롱기(탈곡기)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그렇지 학교 분위기가 46년 전에 졸업한 구암초등학교와 비슷했습니다.

 

전교생이 94명인 시골학교라서 그런지 정문 주위에서 잡상인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운동회 특수를 노리는 풍선장수와 장난감 장수, 솜사탕·번데기·오징어 등을 파는 상인들이 코딱지 묻은 어린이 지폐를 노렸거든요. 그래도 잡상인들이 운동회 분위기를 한껏 띄워 주었는데 없으니까 조금 냉랭했습니다.

 

대부분 젊은 학부형들이라서 '직장 체육대회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요. 나이 든 이웃 아저씨 아주머니들까지 오순도순 모여앉아 찬합의 김밥을 함께 먹으면서 응원하는 모습이 정겹게 보였습니다. 달리기를 해서 받은 상을 자랑하려고 들어오는 학생들에게 과자를 나눠주는 모습은 옛날과 달라진 게 없더군요.

 

황토냄새가 풍기는 시골학생들이라서 대부분 얼굴이 구릿빛이었는데요. 그은 얼굴에 달리기를 하느라 이마에서 구슬 같은 땀이 흐르는 학생들은 더욱 건강하게 보였고, 해맑은 웃음은 마을의 평화를 상징하는 것 같았습니다.

 

잊을 수 없는 운동회 추억들

 

 

운동장 중앙의 내빈석을 보니까 옛날 운동회 모습들이 추억의 일기장을 넘기듯 하나씩 떠올랐습니다. 사친회장, 주조장(술도가)주인, 파출소장, 우체국장, 방앗간주인 등이 교장선생님과 앉아 있던 당시 내빈석은 앞으로 지나가도 안 되는 성역이나 다름없었거든요.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운동회 한두 달 전부터 연습했는데요. 일주일쯤 앞으로 다가오면 어스름해질 때까지 했습니다. 여학생들은 '전북의 노래'와 '노들강변' 가락에 맞춰 무용연습을 했고, 남학생들은 선생님에게 혼나가면서 탑 쌓기 연습을 했지요.

 

운동장에서 뛰고 달리다 엄마 아빠가 기다리는 시원한 나무그늘로 들어가는 학생들을 보니까, 운동회 연습을 마치고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논두렁길로 줄지어 오면서 목이 아프도록 노래를 부르던 때가 엊그제 같이 느껴지더군요.

 

 

100미터 달리기 출발선에 서면 가슴이 두근두근했습니다. 저는 달리기에서 3등 안에 든 적이 한 번도 없고, 불행하게도 최고 기록이 4등입니다. 따라서 연필이나 공책을 받아본 적이 없지요. 마음이 급한 아이들은 총소리가 나기도 전에 출발선을 넘기도 하고, 앞에 가는 교우의 옷깃을 잡기도 했는데요. 언제 출발신호가 떨어질지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100미터 달리기도 장애물 달리기로 방식이 바뀌었고, 학생 수가 적으니까 세 명씩 조를 묶어 경기를 진행하더군요. 꼴찌를 해도 3등은 갈 것이니 무슨 상품이든 탈 것으로 생각하니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고, 꼴찌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학생들 틈에 끼어 달리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습니다.

 

광주리에 콩주머니 던져 넣기는 운동회의 단골 게임이었고, 박 터뜨리기는 오전 게임의 백미였습니다. 박이 빨리 터져야 점심시간이 앞당겨진다는 것을 아는 우리는 사력을 다해 콩주머니를 던졌지요. 콩주머니 세례를 받은 박이 쩍 벌어지면, 하늘에 날리는 오색 꽃가루를 보면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운동회가 슬슬 막바지로 접어들 무렵이면 승부의 세계는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상대의 모자를 빼앗는 기마전에 얽힌 추억은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되고 있는데요. 모자를 빼앗기면 아쉬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운동회의 대미를 장식하는 청백 계주가 시작되면 응원석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지요. 낮술에 거나해진 아저씨들은 운동장으로 나와 춤과 노래로 열기를 돋우었는데요. 그만한 구경거리도 없었습니다.

 

생각지 않은 동창도 만나고

 

 

운동회는 오후 3시 조금 넘어 끝났는데요. 운동회 절정인 학부형들 계주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데 뒤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까, 중·고등학교 동창이 제 이름을 확인하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마을 초등학교 운동회에 구경 갔다가 생각지 않은 동창을 만났는데요. 혼자가 아니라 셋이서 왔더군요. 1년 선배가 교장으로 재직하는 학교 운동회라서 왔다며 인사를 시켰고, 동창들 덕에 100미터 달리기 1등 상 볼펜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학창시절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1등 상을 선물로 받으니까 웃음이 나오더군요.    

 

졸업 후에도 동창회 모임에서 자주 만났고 술자리도 함께 했던 동창들인데요. 셋 모두 제가 사는 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면 소재지 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어서 늦었지만, 축하해주었습니다.

 

생각지 않은 장소에서 만난 동창들과 잠시 환담을 하였는데, 손가락을 꼽아보니까 8년만의 재회더군요. 당시는 모두 평교사였고, 교장이 되기를 바랐는데 막상 되고 보니까 세월의 빠름을 실감한다며 아쉬워하기도 했는데요. 잠시 학창시절 추억을 회상하다 다음을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http://www.shinmoongo.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운동회, #나포초등학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