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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역사는 19세기부터 시작된다

 

19세기까지 이 세상에는 '어린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린이가 하나의 인격체로 인지되기 시작한 것이 18세기의 일로 매우 최근의 일이다. 19세기의 서양과 동양의 어린이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1443년년 창제된 훈민정음의 서문에 '어린'이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이것을 보고 '어린이'의 출전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어린이'라는 말은 동양과 서양을 통틀어서 19세기 이후에 성립됐다. 그 이전에는 어린이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도 별로 없었다.

 

예 그림들을 살펴 봐도 어린이는 좀처럼 찾을 수 없다. 워낙에 유아사망률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유교전통 속에서 응석을 부리는 장면은 도무지 찾아보기 어렵다. 기껏 해야 서당에서 훈장님한테 매맞는 그림만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중국 경전인 <대학>(<서경(書經)>의 강고(康誥)편을 인용)에 여보적자(如保赤子)라는 말이 나온다. 나라님은 백성을 마치 핏덩이 간난아이 돌보듯 해야 한다는 말이라고 한다. 양반에 대한 국민의 이미지인데, 99% 이상의 국민들을 모두 어린이로 본 것이다. 한편 <맹자>는 자신의 핵심사상인 인(仁)을 측은지심(惻隱之心)에 비유했는데, 우물에 들어가려는 아기를 구하는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유추한다. 중국에서는 '어린이'보다는 '유아'의 관점에서 어린이를 파악하고 있어서 '어린이'에 대한 의미 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없다.

 

1923년 소파 방정환이 색동회를 창립하며, 노동절에 맞추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한 데서 시작되었다. '어린이'라는 개념도 이때 형성됐다. 1927년부터는 5월 첫째 일요일에 어린이날 행사를 진행했는데, 일제의 탄압이 있던 시기 1939년까지 중단되었다가, 광복 이후 '어린이'를 존중하는 마음을 살리기 위해 1946년 다시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필생동안 역설한 말은 "어린이를 사람으로 대우하자"이다. 이 정도로 어린이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어른의 반만 일할 수 있다고 해서 '반일공(半日工)'이라 불리기도 해

 

서양에서도 어린이가 찬밥 신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기록에서 '어린이'와 비슷한 주체에 대한 말을 찾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린이 노예는 3년 정도 사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루 종일 노동을 시킨다면 3년 정도 일을 하다가 '유통기한'이 다 돼 죽는다는 말이다. 이 말 속에는 어린이 노예가 일반 노예와 별다른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난 19세기 후반까지 어린이에 대한 배려는 전무했다. 1863년 6월 13일 영국의 <아동노동 조사위원회>가 제출한 1차 보고서에는 일곱 살 난 아이가 하루에 15시간 일하고 있다는 내용이 보고된다. 당시 영국에서는 어린이에게 하루 6시간 이상 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온종일 일하는 노동자(全日工)의 상대되는 개념으로 '반일공(半日工)'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이에 대해 존 스튜어트 밀 등 자유주의자들이 문제제기를 하였고 '인권'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럼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이솝우화집이나 안데르센 동화집, 그림형제의 동화집 등 어린이를 위한 책들이 많이 있는데, 이로서 보면 '어린이'라는 개념이 일찍부터 생겨나지 않았을까?

 

그것은 이솝우화집이나 '동화'라고 말하는 책의 원전을 몇 장만 펼쳐 봐도 알 수 있다. '동화'가 어린이를 위한 말랑말랑한 책이라는 것은 원래 없었고, 우리나라에서 시작됐다. 원전 동화를 번안하는 과정에서 자극적이고 거친 표현을 순화하고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버렸다. 우리나라에서 선입견이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일례로 독일 그림형제의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집>은 1812년 7판이 나왔다. 이야기 중에는 무섭고도 잔인하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도 있고, 보기에 따라서는 비윤리적이고 반도덕적이라 할 수 있는 대목도 있다. 사실상 그림동화는 어린이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구비문학>에 가까웠다.

 

작품집에는 200여 개의 동화가 소개되었는데, 제목과 같이 어린이만을 위한 작품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읽는 것이 '동화'의 진면모다. 때문에 독일에서는 '동화읽기 방법론'이 크게 발달돼 있다. 작품 제목 원문에 '어린이'와 '가족'이 나오지만 사실상 '가족'에 무게중심이 있다.

 

근래에는 1925년 제네바에서 있었던 아동 복지를 위한 세계 회의(World Conference for the Wellbeing of Children)에서 제정한  6월 1일(또는 다른 날) 국제 어린이날(International Children's Day)이 있다. 6월 1일에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곳은 보통 공산주의 국가였고, 서유럽 등 대부분의 다른 국가는 다른 날에 어린이날을 가졌기 때문에 국제 어린이날은 공산주의 진영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이를 통해 봤을 때 지구인들은 '어린이'에 대해서 생각할 새도 없이 바쁘게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현대적인 의미의 '어린이'는 사실상 '인권'이라는 개념과 함께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인권이라는 개념이 지구인에게 진지하게 고려된 것은 20세기 중엽부터였다. UN이 1954년 10월 24일에 국제인권법을 발효했기 때문이다. '인간 배려'의 역사는 이처럼 짧은 것인가.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한국전력 사보 <동서마당>에 제출한 원고의 일부입니다. 블로그에도 올렸습니다.


태그:#어린이날,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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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놀이 책>,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공자, 사람답게 사는 인의 세상을 열다> 이제 세 권째네요. 네 번째는 사마천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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