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화엄사 외진 곳에 자리 잡은 구층암을 찾아서

 

지리산 하면 사람들은 제일 먼저 무엇을 떠올릴까. 아마도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천왕봉이

먼저 떠오를 것이고 절이나 문화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화엄사가 떠오르지 않을까.

 

화엄사는 참으로 아름다운 절집이다. 봄에 찾아가면 원통전·길상암의 매화꽃이 아름답고 가을에 찾아가면 가람 전체가 단풍에 물든 듯 아름다운 풍광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나 역시 화엄사가 가진 아름다움에 반해 화엄사에 몇 차례 다녀온 적 있다. 그러나 난 단 한 번도 화엄사에 대한 답사기는 쓰지 못했다. 내 부족한 필력이 감당하기엔 화엄사는 너무나 차고 넘치는 아름다움을 지닌 절집이었기 때문이다.

 

지리산을 끼고 있어 주변 풍경도 아름다운 절 화엄사는 각황전 등 잘 다듬어진 전각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걸출한 건축물이지만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 건물들이다. 더구나 작년에 갔을 적에는 천왕문에서 대웅전에 이르는 길에 깔린 박석들과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을 온통 새 돌로 교체해 버려 예전 같은 고졸한 맛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 듯이 보였다.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가람을 배치하거나 손보는 일은 몇 십 년, 몇 백 년을 두고 느긋하게 할 일인 것을….

 

그러나 화엄사는 아직도 겉으로 보여주는 모습 말고도 숱한 숨겨진 아름다움을 뒤에 숨기고 있다. 산내암자인 구층암도 그 가운데 하나다. 구층암은 매우 자연적인 방법으로 지어진 소박한 암자다. 화엄사에서 받은 인공적인 아름다움에 싫증난 사람은 이곳에 가면 얼마간 위안을 받고 돌아오게 된다.

 

구층암은 화엄사 경내에서 불과 5백여 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 뒤 공터를 지나 작은 계곡을 건너 울창한 해장죽 숲 사이로 난 길을 벗어나면 거기 낡은 팔작지붕 기와집 한 채가 나그네를 반긴다. 이 건물의 오른쪽 추녀를 따라 돌아가면 두 채의 낡은 승방이 마주 보는 절 마당에 닿는다. 이곳이 바로 구층암이다.

 

구층암은 대중들로 북적이는 화엄사와 이웃해 있는데도 깊은 산중 암자에 온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할 만큼 적막한 암자다. 아마도 이 절집을 감싸고 있는 적막감 때문에 그럴 것이다. 전각이라야 작은 불상 1000구를 봉안한 천불보전과 그 아래 칠성·산신·독성을 모신 수세전과 요사 2채가 있을 뿐인 단출하기 그지없는 암자다. 본래 암자란 번거롭지 않으며 단순하고 소박한 데 그 맛이 있다. 게다가 이곳은 현재 운수납자들이 용맹정진하는 선원으로 쓰이고 있다.

 

누가 창건했는지 등 초기 구층암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인조 25년(1647)에 한 차례 중수한 바 있으며 헌종 12년(1846)에 환봉선사란 스님이 본존 요사와 산왕각을 중건했다는 사실 정도만 알려졌을 뿐이다.

 

그 후 1898년에도 구층암은 한 차례 더 중수되었다. 중수한 이듬해 이곳에 들러 이틀간 머물다 간 매천 황현은 <중수구층암기>를 남겼는데 "기와와 서까래를 곱고 산뜻하게 일신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이 <중수구층암기>에 비로소 현재의 암자 이름인 구층암이란 명칭이 등장한다. 아마 그전까지는 구층대로 불렀을 것이다. 구층암의 옛 이름은 구층대였다는 것이 1937년에 본존 요사 보수 중에 나온 상량문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주의적 건축 이상이 가장 잘 구현된 건물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천불전을 들여다보고 나서 돌계단을 내려오면 두 채의 낡은 승방이 기다리고 있다.

 

먼저 오른쪽 승방을 바라보면 석등 한 기가 외로이 마당을 지키고 선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측되는 석등이다. 그 석등의 외로움이 안돼 보였던지 천불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선 모과나무 한 그루가 연민이 가득한 눈길을 보내고 선 것을 놓쳐선 안 된다. 사실 이 과도한 감정이입은 사실 나그네인 나 혼자의 것일 뿐이지만.

 

구층암에서 무엇보다 눈여겨볼 것은 대방채라고도 부르는 오른쪽 승방 전면의 기둥이다. 기둥들이 전혀 다듬지 않은 울퉁불퉁한 모과나무 기둥들이다. 나뭇가지의 움푹 팬 결뿐 아니라 옹이까지도 그대로 남겨둔 모습이다. 기둥을 따라 위로 서서히 시선을 옮겨가면 기둥의 끝이 Y자형으로 처마를 받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안성 청룡사 등에서 휘어진 기둥이나 부분적으로 다듬지 않고 사용한 기둥은 본 적 있지만, 전혀 손을 대지 않고 기둥으로 쓴 예는 이곳이 처음이다. 목수가 게으른 탓이었을까. 왜 이리 불철저하게 일을 처리했을까. 이 기둥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마디로 말도 되지 않는 오해다. 

 

모과나무는 오랜 세월을 자란다 치더라도 소나무나 느티나무처럼 줄기가 굵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두께가 가늘다 보니 자꾸 다듬다간 가늘어져서 목재로서 쓸 수가 없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다듬지 않고 생긴 그대로 쓴 것이다. 어쩌면 이 집을 지은 목수는 목재를 전혀 가공하지 않은 채 살아 있을 때의 생장환경과 비슷한 상태로 두는 것이야말로 건축의 수명을 오래 가게 할 거라는 확신을 가졌을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이 승방을 지은 목수는 건축물이란 자연과 동떨어진 게 아니라 자연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이라는 개념을 가졌던 게 틀림없다.

 

이 승방 앞에 설 때마다 난 이 건물이야말로 우리나라 자연주의적 건축 이상이 가장 잘 구현된 건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죽은 나무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하는 직업인 목수에 대한 직업적 존경심을 품게 되는 것이다.  

 

목수에게 나무는 갓난아이다  

 

이런 목수라는 작업에 대해 노래한 시가 있다. 이정록의 시 '나무 기저귀'와 정일근의 시 '목수의 손'이다.

 

이 두 시를 읽고 있노라면 구층암 승방을 지었던 옛 목수가 생각나고 목수가 단순히 집 짓는 기능인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곤 하는 것이다.

 

먼저 이정록 시 '나무 기저귀'부터 읽어보기로 하자.        

 

목수는

대패에 깎여 나오는

얇은 대팻밥을

나무기저귀라고 부른다

 

천 겹 만 겹

기저귀를 차고 있는,

나무는 갓난아이인 것이다

 

좋은 목수는

안쪽 젖은 기저귀까지 벗겨내고

나무아기의 맨살로

집을 짓는다

 

발가벗은 채

햇살만 입어도 좋고

연화문살에

때때옷을 입어도 좋아라

 

목수가

숲에 드는 것은

어린이집에 가는 것이다

- 이정록 시 '나무 기저귀' 전문

 

196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공주사범대학 한문교육과를 졸업한 이정록 시인은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혈거시대'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풋사과의 주름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제비꽃 여인숙> <의자> 등이 있다.

 

그에겐 놀라운 직관력이 있다. 작고 하찮은 존재들이 가진 생명력을 끄집어낼 줄 안다. 그리고 그것들이 가진 의미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냄으로써 우리가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사물의 잊혀진 의미를 되새김하게 한다.

 

시 '나무 기저귀'는 시집 <제비꽃 여인숙>에 실려 있는 시다. 이 시는 목수가 "대팻밥을/ 나무기저귀라고 부른다"라는 사실을 독자에게 미리 슬쩍 귀띔함으로써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한마디로 말하면 목수에게 나무란 기저귀를 찬 아기다. 아기라고 생각하니 그 목재가 얼마나 예쁘고 귀여울 것인가. "발가벗은 채/ 햇살만 입어도" 귀엽고 "연화문살에/ 때때옷을 입"고 나서면 세상 어느 것보다 예쁘다. 목수는 그렇게 귀여운 아기가 찬 기저귀를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어 마침내 "(가장)안쪽 젖은 기저귀까지 벗겨" 내고 나서야 비로소 목재로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수는 단순히 집 "짓는 사람'이 아니다.  집 '키우는 사람'이다.

 

목수가 굼뜨게 못을 박는 이유

 

이번엔 시를 다루는 섬섬옥수를 가진 '시를 다루는 목수' 정일근의 시 '목수의 손'을 읽어 보기로 한다.

 

태풍에 무너진 담을 세우려 목수를 불렀다. 나이가 많은 목수였다. 일이 굼떴다. 답답해서 일은 어떻게 하나 지켜보는데 그는 손으로 오래도록 나무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못 하나를 박았다. 늙은 목수는 자신의 온기가 나무에게 따뜻하게 전해진 다음 그 자리에 차가운 쇠못을 박았다. 그 때 목수의 손이 경전처럼 읽혔다. 아하, 그래서 木手구나. 생각해보니 나사렛의 그 사내도 목수였다. 나무는 가장 편안한 소리로 제 몸에 긴 쇠못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 정일근 시 '목수의 손' 전문

 

경남 진해에서 태어나 경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를 졸업한 정일근은 1984년 무크지 <실천문학>과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바다가 보이는 교실>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 <처용의 도시> <경주 남산>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오른손잡이의 슬픔>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 등이 있다.

 

정일근의 시는 아름답다. 그의 시를 읽노라면 어쩌면 남자가 저렇게 맑고 아름다운 서정을 건져 올릴 수 있으며 어떻게 그리 놀라운 시적 상상력을 가질 수 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시 '목수의 손'은 목수가 못을 박는 풍경을 소재로 삼고 있다. 시 속 화자는 태풍에 무너진 담을 세우려고 목수를 부른다. 그러나 그 목수가 행동이 몹시 굼떴던 모양이다. 화자는 "(저렇게) 답답해서 일은 어떻게 하나" 싶어 지켜본다. 여차하면 돌려보내기라도 할 태세다.

 

그러나 알고 보니 목수가 그렇게 굼뜨게 행동했던 것은 "자신의 온기가 나무에게 따뜻하게 전해진 다음 그 자리에 차가운 쇠못을 박"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목수(木手)란 글자 그대로 나무의 손을 가진 사람이다. 나무와 따스하게 실핏줄이 통하는 혈연 사이여야 한다. 그러기에 혈연인 나무가 통증을 느끼지 않게 "가장 편안한 소리로 제 몸에 긴 쇠못을 받아들이도록" 한 다음 그제서야 못을 박는 것이다.

 

읽기에 너무나 쉬운 시이면서 오래도록 여운이 남도록 하는 아름다운 시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시가 수록된 시집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이건만 인터넷 대형 서점을 찾아보면 책 이름조차 수록되지 않은 곳이 있을 정도로 홀대를 받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구층암 선방은 아래 동쪽으로는 지리산 계곡물이 굽이굽이 흘러가고 북쪽으로 몇 걸음 더 가면 전라도 사투리로 시누대라 부르는 해장죽 숲길이 이어지는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모르긴 해도 구층암은 오늘도 그렇게 시냇물과 산을 거느린 채 가부좌를 틀고 머나먼 화엄 세계를 그리며 앉아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이후로 혹시 화엄사에 가실 기회가 있거든 반드시 구층암에 들렀다 오시라. 가서 이정록· 정일근 두 시인의 시를 크게 소리내 한 번 읽어 보시라. 마음 한쪽이 저 아래로부터 슬슬 뜨거워 오기 시작하리니.

 


태그:#지리산 , #화엄사 , #구층암 , #목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