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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의 플래그타워

하노이의 플래그타워
▲ 플래그타워 하노이의 플래그타워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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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딘광장을 벗어나 아침에 호치민 묘소로 가는 길에 보았던 거대한 플래그타워로 발걸음을 옮겼다. 육각형의 붉은 벽돌 탑에 베트남 국기가 걸려 있던 플래그타워는 그 투박하고 육중한 생김새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생긴 걸로 봐서는 아주 오래 전에 만든 것 같은데, 그 때에도 용도가 국기 게양대였다면 과연 베트남의 국기는 언제 생긴 것일까? 또한 국기라는 것이 결국 근대국가의 상징인 터, 그렇다면 전근대 왕조가 근대국민을 탄생시키기 위해 국기를 걸어 놓은 것일까?

수수께끼를 풀기에 앞서 플래그타워 옆에 있는 카페에 들러 맥주를 한 병 시켜 숨을 고른다. 사이공의 사이공 맥주와 비견되는 하노이의 하노이 맥주. 벌컥벌컥 맥주를 마시는데 카페 건너 편 광장에 낯설지 않은 인물의 동상이 서 있었다. 대머리에 위풍당당한 모습, 레닌이었다. 다시 한 번 실감하는 공산주의 국가 베트남. 그러고 보니 레닌의 동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카페에서의 망중한을 끝낸 뒤 도착한 플래그타워. 그 앞의 안내판에는 탑이 7년의 공사 끝에 1815년 완공되었으며 국기는 1954년 10월 10일부터 게양되었다고 적혀 있었을 뿐, 탑이 무슨 의도로 만들어졌는지 100년이 넘게 어떤 상징으로 이용되어졌는지 가타부타 설명이 없었다. 가이드가 있었으면 물어볼 것을, 호기심만 자극할 뿐이었다.

우리의 경우 1815년이면 조선의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여 세도 정치가 시작되고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직후이건만, 당시 베트남은 이와 같은 탑을 세울 정도로 근대화 되었단 말인가? 이와 같은 탑만으로 베트남 근대화를 운운하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다
▲ 레닌 동상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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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대한 승리
▲ 베트남의 정체성의 근원 미국에 대한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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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형 모양의 계단을 통해 탑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훤히 내려다보이는 하노이의 전경. 그 중 가장 눈에 뜨인 건 플래그타워 옆 전쟁박물관의 야외 전시장이었다. 호치민의 혁명박물관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전 당시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중앙에는 부서진 미군 전투기의 잔해가 무슨 탑처럼 쌓여져 있었다. 현재 베트남의 정체성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베트남전에서의 미국에 대한 승리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조형물이었다.

부러웠다. 프랑스와 일본의 식민지배도 받았지만 호치민이란 걸출한 영웅과 함께 암울한 시대를 떨쳐내고 베트남전의 승리로 국가정체성을 구성해내는 베트남 사람들. 무조건 반공과 반일을 국체로 삼는 우리들과 달리 그들의 국가정체성은 더 긍정적이지 않을까? 물론 우리 역시 한강의 기적을 긍정적으로 운운하곤 하지만 90년대 말부터 시작된 경제 위기는 다시금 우리의 신화를 돌아보게끔 만든 것이 사실이다. 아직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완성형이 아니라 현재진형일 뿐이다.

하노이의 일상

플래그타워를 나와 시클로를 타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호치민과 달리 신사적이라던 하노이 시클로. 그러나 우리는 피프티를 피프틴으로 잘 못 들은 죄로 한화 4500원에 해당하는 금액을 더 내야 했다. 물론 바가지가 분명했으나 아무런 확인도 않은 채 무턱대고 탑승한 우리의 잘못도 있었고 시클로 운전이 결코 쉬워 보이지 않은 탓에 그냥 그러려니 넘어갔다.

피곤하다며 숙소에서 조금 쉬겠다는 아내를 놔두고 다시 홀로 거리에 섰다. 이제 내일 모레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일분일초가 아까운 터라 나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급했고 두리번거리는 두 눈은 어느 때보다 번뜩였다. 좀 더 많이 보고 좀 더 듣고 느끼고 싶은 욕망.

큰스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베트남 사람들
▲ 사찰의 인파 큰스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베트남 사람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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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살펴본 뒤 내가 향한 곳은 숙소에서 멀지 않은, 하노이 구도심 정중앙에 있던 쿠안수 불교사찰이었다.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었으나 호치민 묘소 근처의 일주사와 달리 베트남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아직까지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사찰이었다. 과연 종교가 마약이라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종교는 어떤 모습으로 그 생존을 보장받고 있을까?

그러나 이런 나의 의문은 한낱 기우일 뿐이었다. 일요일 오후여서인지 사찰은 오히려 큰스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불당이건, 복도건 간에 많은 사람들이 쭈그리고 앉아 큰스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혹시 이들도 북한과 비슷한 어용 종교가 아닐까 했지만 그곳에는 어용이 상상할 수 없는 열정과 진지함이 있었다. 만만치 않은 역사를 간직한 사찰만이 지닐 수 있는 위엄과 함께. 워낙에 베트남 공산주의가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던 터라 종교에 대한 탄압이 없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종교와 정치가 타협을 한 것일까? 어쨌든 하노이 한 복판에서 마주친 사찰은 낯선 만큼 매력적이었다.

공산주의 국가의 특징
▲ 하노이 인민문화궁전 공산주의 국가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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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서 나와 다음으로 향한 곳은 궁전이었다.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palace'. 그러나 막상 도착한 곳에는 기대했던 고궁 대신 현대식의 커다란 시멘트 건물이 서 있었다. 삭막하고 권위적인 모습의 건물. 잉? 뭐지?

그러나 그 건물의 정체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곳은 북한의 인민궁전과 비슷한 하노이의 인민문화궁전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도에는 'palace'에 앞서 'CULTURAL'이 쓰여 있었다. 결국 그곳은 공산주의자들에게 가장 소중한 개념인 인민과 가장 성스러운 공간인 궁전의 만남이었다. 다시 한 번 느끼는 공산주의국가 베트남. 그런 나의 인식에 쐐기를 박으려는지 그곳 옆에는 쿠바 대사관이 있었고 VIVA 쿠바! 라는 관광 유인물이 붙어 있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 그곳에는 노곤한 일요일 오후의 낮잠을 즐기는 미장원 직원과 빨래 너는 베트남 여인 등 하노이의 일상이 펼쳐져 있었다. 시간이 허락 된다면 그들의 삶을 좀 더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울 뿐이었다.

하노이의 응옥썬 사당과 수상인형극

숙소로 돌아와 아내와 함께 향한 곳은 하노이 여행의 필수코스라는 수상인형극이었다. 10세기 홍강에서 유래되어 천 년이 넘게 그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하노이의 수상인형극. 연극을 전공한 아내는 수상인형극을 본다는 사실에 벌써부터 들떠 있었고, 학부시절 베트남 역사를 배우면서 연극을 처음 접했었던 나 역시 기대에 차 있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베트남에 가거들랑 꼭 보라고 권유했던 바로 그 인형극 아니던가.

응옥썬 사당 앞의 노인들
▲ 베트남 장기 응옥썬 사당 앞의 노인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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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중앙의 호안끼엠 호수 옆에 위치한 수상인형극 극장에서 예매를 한 뒤, 남는 시간 동안 우리가 향한 곳은 호수 위에 떠 있는 응옥썬 사당이었다. 우리의 탑골공원 처럼 노인들이 둘러앉아 장기도 두고 하는 그곳은 우리의 이순신에 해당되는, 13세기 몽고를 물리친 베트남의 영웅 쩐홍다오를 기리는 사당으로서 유교서부터 시작해서 도교, 불교, 민간종교 등 그 모든 종교가 혼재되어 있었다.

사당은 베트남 문화가 중국의 영향을 얼마나 강하게 받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유교식의 삼문부터 시작해서 거의 모두 한자로 이루어진 장식들. 오죽하면 그들의 전투의 신 역시 삼국지의 관우를 연상케 할까. 대추 빛 얼굴에 긴 수염, 청룡 언월도에 붉은 적토마까지 그것은 분명 관우였다.

베트남의 문화가 깃들어 있는 사당
▲ 응옥썬 사당 베트남의 문화가 깃들어 있는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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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관우다
▲ 관우를 닮은 베트남의 전투의 신 아무리 봐도 관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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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사당 내에는 호안끼엠 호수에서 잡았다는 커다란 거북이가 박제되어 있었는데, 많은 아이들이 그곳에 서서 부모들로부터 호안끼엠 호수와 거북이에 얽힌 전설을 듣고 있었다. 우리의 건국신화와 비슷한 베트남의 거북이 신화. 결국 사당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엮고 있었다.

인형극 시간이 다 된 터라 사당을 나와 극장으로 향했다. 하노이 관광의 필수코스라더니 이미 많은 외국인들이 극장 객석을 채우고 있었다. 이미 세계화된 그들의 수상인형극.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에는 이와 같은 공연이 존재하지 않을까? 베트남과 비슷한 역사적 궤적을 그렸기에 그리 다르지 않는 문화 조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공연을 살려내지 못한 것은 결국 전통에 대한, 그리고 우리의 과거에 대한 인식차이가 아닐까? 구닥다리라며 우리의 것은 무조건 배척하고 세계화라며 마냥 외국 것만 흠숭하는 우리와 달리 베트남 사람들은 자신들의 유산을 지킬 줄 알았던 게 아닐까?

수상인형극은 단순했다. 10세기에 유래된 극이 뭐 얼마나 특별하겠는가. 아마도 과거 왕조는 이와 같은 인형극을 통해 백성들을 계몽하려 했을 것이다. 이렇게 쌀농사를 지어 세금을 많이 내도록 하여라. 그리고 백성들은 반대로 이와 같은 인형극을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겠지. 그만 좀 착취하라고.

베트남의 명물
▲ 수상인형극 베트남의 명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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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저력
▲ 전통을 지키는 그들 베트남의 저력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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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지적한대로 인형극이 끝나고 스텝 진들이 물속에서 나오는 장면은 꽤 감동적이었다. 물속에서 인형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인 그들의 노고도 노고였지만, 매일 물속에서 피부가 퉁퉁 불어터지면서도 그렇게 전통을 지켜나가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 탓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베트남의 저력일 테지. 이런 베트남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 마냥 한류를 운운하며 의사제국주의적인 인식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우리들의 천박함이란.

극장을 나와 현지인들에게 유명하다는 가게에서 쌀국수를 한 그릇씩 먹고 숙소로 향했다. 쩝. 이제 내일 모레면 이 맛있는 쌀국수도 먹을 수 없겠지. 어쨌든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내일은 그 유명하다는 하롱베이를 본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베트남, #하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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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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