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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부터 르포문학의 중요성에 주목하고,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한계상황을 보고해온 김순천을 포함한 르포작가들의 글쓰기를 기존 문단에서는 진지하게 주목해 오지 못했다.

이 사실은 역으로 이들이 펼쳐왔던 증언과 기록의 주체들에 대한 우리사회의 공감(empathy) 능력이 매우 약화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동시에, 실상 한국의 문인들과 지식인들이 '언어'와 '개념'이라는 추상적인 기호를 통해서만 '저항'을 되뇌어왔던 관성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금 촉구하고 있다.

<밥꽃양>
 <밥꽃양>
ⓒ 임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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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포함하여 이른바 근대적 학문의 세례를 받은 아카데미의 비평가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오기는 했었다. 가령 그런 질문의 연장선상에서, <밥․꽃․양>과 같은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나 이주노동자․홈리스․철거민․동성애자 등과 같은, 체제로부터 배제되고 억압당해온 주체들의 문학적 재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매우 고급한 담론적 고민을 펼쳐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담론 바깥의 현실에 대해서는 매우 무지했다는 점은 역시 처절하게 반성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이 담론적 물음들은 어떻게 그들을 내레이터 또는 작가의 연민(sympathy)적 시선에 갇히게 하지 않고, 그것을 인간적 존엄의 경지로 끌어올릴 것인가 하는 물음을 낳았다. 사실 공감(empathy)적 시선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형상화하고, 이를 통해 이들이 속해 있는 장소의 폭력성을 고발․비판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소설에서도 그러한 어려움은 수시로 발생하지만, 그것이 르포의 형태를 띤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위주체'는 말하되, 자신이 속해 있는 상황을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의 전체화된 조직적 질서 속에 용해시켜 말하기보다는, 고립된 상황이 촉발시키는 고통의 생생한 확대와 충격에 대한 고백을 통해 때로는 진실을 말하고, 때로는 그것을 자기 식대로 확대하거나 과장하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편의적으로 그것을 은폐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단의 외면 대상, 르포작가의 글쓰기

반면 기록자(르포작가)는 만일 그가 상황에 대한 엄정한 객관주의적 태도로 이들 취재원인 하위주체들의 발언을 일정한 원칙 속에서 '여과'하는 과정을 통해 사실을 확정하고 진실을 길어내고자 한다면, 르포의 원재료가 되는 이들의 발언을 일정한 수준에서 취사선택하고, 그것을 더 큰 사회적 연관 속에 배치하면서, 르포를 쓰고 있는 자신의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주입하는 일에 더욱 민감하게 주의하면서 글쓰기를 진행할 것이다.

문학적 행동주의에 속하는 르포쓰기는 언제나 이런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대결적 상황 속에서 어려운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곤란에 빠질 위험이 있다. 동시에 글을 쓰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과연 명백하게 가치중립적인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에 직면하게 마련이며, 취재원의 경우는 사실 너머에 있는 스스로의 '내적 진실'이 르포작가에 의해 굴절되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변용될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사태에 대해 발언하는 일조차 매우 고된 작업이 될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포는 왜 쓰는가. 그것이 단순히 발생한 사건과 그것과 연결된 하위주체들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기록에 멈춘다면, 작가 편에서든 취재원 편에서든 그 작업의 가치는 일정한 고립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르포작업은 이렇게 특수한 상황적 맥락에서 발생한 사건 속의 인간과 상황이 한때 벌어졌던 일이 아니라, 비슷한 방식으로 앞으로도 벌어질 확률이 높은 사건이라는 것, 다시 말해 '보편성'을 내포한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작업이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르포작업이 추구하는 이 사건에 깃든 보편적 진실에 대한 발굴에의 의욕은 오늘의 미디어적 환경이 매우 왜곡된 상황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증언적 성격을 확보하고 그것을 강화한다. 대중 미디어의 차원에서 보자면, 발전된 테크놀로지 환경이 언제나 조명하는 것은 대중들의 환상적 무의식과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상들이다. 대중미디어의 영역에서 설사 탐사저널리즘이라는 방법론적 목표를 갖고 제작되는 프로그램조차, 재현의 대상이 된 하위주체들에 가해지는 연민어린 시선이 지배적인 되는 까닭은 그 자체가 이미 대상과의 수평적인 대화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 환기할 뿐이다.

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구 신용산역 부근 재개발 지역내 5층 건물 옥상에 설치된 철거민 농성용 가건물을 경찰특공대가 강제진압 하는 과정에서 불길에 휩싸인 가건물이 무너지고 있다.
 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구 신용산역 부근 재개발 지역내 5층 건물 옥상에 설치된 철거민 농성용 가건물을 경찰특공대가 강제진압 하는 과정에서 불길에 휩싸인 가건물이 무너지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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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주체에 대한 주목, 보편적 진실 발굴

이에 반해, 기왕의 정통 문학 장르라고 할 수 있을 시와 소설 분야에서 이들 하위주체들이 등장할 확률은 점점 더 희소해지고 있다. 그 까닭은 대중미디어들이 현실의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반영하면서 스펙터클에 집착하는 것과 비슷하게, 주류 문학 분야 역시 하위주체들이 살아 움직이는 실제의 현실보다는 언어나 개념의 기호화된 현실을 오히려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문학의 재현적 기능에 대한 신뢰감을 이미 상실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끔찍한 감각의 충격 속에서 목격했던 용산참사의 현실은 글쓰기의 영역 속으로 들어오는 대신, 감각적이고도 선정적인 이미지의 병치 속에서 실제의 물질성이 휘발되는 일들을 빈번하게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명백하게 용산참사는 한국자본주의의 '성장주의'와 '개발주의'의 반복되던 광기가 하나의 극단으로 솟아오른 사건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사건에 대한 총체적인 조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단일한 인과론적 현실을 규명하는 시선과 더불어 성장주의와 개발주의를 근간으로 해왔던 이 폭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사실에 있어서는 그 발생초기로부터 오늘에까지 쉼 없이 지속되어 왔으며, 따라서 용산참사는 물론 그 사건의 과거형과 미래형을 이루는 모든 사태의 일반화된 전형일 수 있다는 시각을 견지하는 것이 긴요해 보인다.

대한민국 개발잔혹사, 철거민의 삶 <여기 사람이 있다> 표지
 대한민국 개발잔혹사, 철거민의 삶 <여기 사람이 있다> 표지
ⓒ 삶이 보이는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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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작업을 시작할 수 있을까. <여기 사람이 있다>라는 책에 수록된 각각의 기록들은 삶의 장소로부터 뿌리 뽑힌 하위주체들의 목소리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이 르포작가들에 의해 재구성된 기록이 아니라, 피해자들 자신의 구술에 입각하여 사태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기록자들 자신에 의해 사건의 경과와 맥락이 굴절․변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고뇌어린 글쓰기의 전략이 개입된 결과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이 충격적인 삶의 뿌리 뽑힘의 과정 속에서 피해자 자신이 어떠한 열망의 파열과 절망의 증폭을 경험했는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반 없으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이들 피해주민들이 어떠한 존재론적 각성을 경험하게 되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다. 따라서 이들 피해주민들의 육성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그것을 출판하는 행위는 기자나 작가의 의도에 따라 굴절된 사건의 재현/반영을 거치지 않고, 사건의 당사자인 피해자 자신이 스스로의 상황에 대해 말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피해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공간은 매우 다양하다. 이번에 용산참사에서 죽음을 맞았던 윤용현․이성수․양회성 씨의 가족들과 함께, 고양시 풍동․광명시 광명6동․서울시 흑석동․성남시 단대동․서울시 순화동 등에 거주하고 있다가, 재개발로 인해 삶의 근거를 완전히 상실했던 많은 철거민들이 자신의 기막힌 상황에 대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용산참사'로 대중들의 시야에 비로소 들어온 듯 보이는 재개발과 철거민 문제가 실상에 있어서는 공업화가 완숙화되어 있다고 판단되는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구조적인 문제로 남아있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현실은 나쁜 방식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용산과 또다른 용산에 대한 기록 <여기 사람이 있다>

이 책에 구술된 피해주민들의 삶에 대한 희망은 그 간절함에 비해 매우 소박한 것이었다. 그들은 타인들에게는 보잘 것 없는 공간과 집이었지만, 그곳에서의 노동과 자녀교육을 통해서 지금보다는 나은 삶이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결코 회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관에 의한 갑작스런 개발과 토지와 주택의 소유자들로 구성된 조합의 밀어붙이기 식 재개발 과정은 그 시작과 함께 이들의 삶이 오늘의 자본주의적 체제에서 매우 불안정한 것임은 물론 체제의 성장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만드는 끔찍한 폭력으로 다가왔다.

삶의 근거를 완전히 박탈당하는 데 항거하면서, 이들은 주거권과 정주권을 포함한 인권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것을 압살하는 거대기업과 관주도의 개발주의 세력에 대항해 오직 약자들의 연대에 의해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간다운 저항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 연대를 통한 요구조차 냉정하게 보자면, 매우 소박한 차원에서 제기된 것들이었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을 읽으면서 이들이 제기하고 있는 요구들을 들어보면, 개발에 따른 막대한 이익을 재분배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개발 이후에도 그들이 살아왔던 삶의 장소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것, 개발의 과정 속에서 이들이 살 수 있는 가수용주택과 가수용 상가를 보장해 달라는 것 정도였다.

바꿔 말하면, 토지와 주택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재개발을 통해서 막대한 개발이익을 취하게 되는 건설자본과 국가의 이해관계를 거스르지 않는 수준에서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해달라는 기본욕구에 대한 요구였다. 그러나 이 요구에 대해서 돌아온 것은 거대한 폭력이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그들이 살던 집과 상가가 무지막지하게 파괴되는 현실을 그들은 목도하였고, 철거용역들의 폭언과 물리적 폭력에 그들의 인간적 존엄은 수시로 파괴되었으며, 최후의 수단으로 옥상 망루로 올라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쳤지만, 끝내 인권과 시민권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었던 비정한 개발주의적 광기에 그들은 희생당해야 했던 것이다.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용산철거민참사 현장인 남일당빌딩 1층에 마련된 합동분향소.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용산철거민참사 현장인 남일당빌딩 1층에 마련된 합동분향소.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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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들의 구술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탄식은 "나도 대한민국 국민이다"라는 말이다. 그러나 건설자본과 국가기구는 이들을 결코 국민으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용산참사'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이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완전히 무시한 채 '폭도'나 '테러리스트'로 간주하여 진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은 이러한 사건의 전개가 단지 이른바 하층민의 특수한 사례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용산참사에서 희생당한 평범한 세입자들은 계층적 수준에서 보자면 이른바 중간계급(middle class)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말은 오늘의 개발주의에 근거한 자본주의 체제가 이제 그 자신의 성장의 토대로서 과거와 같이 하층민뿐만 아니라, 이제는 평범한 중간계급의 전면적인 희생까지를 요구하는 매우 험악한 지경에 왔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자본주의는 체제의 존속을 위해서라면 여차하면 중간계급조차도 체제의 희생양으로 전락시키는 것을 당연시할 정도로 합리적 통제의 바깥에 있다.

대한민국의 중간계급들에게 권한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부동산 정치계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토지와 부동산에 대한 개발과 거래를 통해 체제의 안정성을 유지해왔다. 이런 체제의 관점에서 인간은 언제든지 장소로부터 추방을 명령하는 것이 가능한 사물에 불과한 것이었고, 실제로 도시화와 재개발의 과정은 원주민 추방의 거대한 희생의 역사이기도 했다. 땅으로부터 추방당한 인간들은 동시에 그들의 공동체적 문화와 인간다운 존엄 역시 상실해야 했다. 자본의 분쇄기에 의해 분해되었거나 그렇게 될 운명에 있는 이들에게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신자유주의 논리가 체계화된 오늘의 현실 속에서 국가란 자본의 충성스런 동맹자인 동시에 대리인이다. 자본의 체제로부터 박탈된 존재들에게 국민주권이나 시민권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는 손쉽게 회수되고 있으며, 그래서 대다수의 돈 없고 힘없는 시민들은 일종의 난민(難民)적 상황에 처해져 유랑인생을 강요당하고 있다. 그런 그들의 삶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중간계급 또는 중산층들은 개발의 차익이 가져다 줄 한탕주의적 욕망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고 있지 못하지만, 사실상 이들 역시 자본의 싸늘한 배신을 향해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자각하고 있지 못하는 듯하다.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사망한 '용산철거민참사' 한달을 맞은 2월 20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남일당건물에 '여기 사람이 있다'는 글과 철거민들의 모습을 담은 대형 걸개그림이 걸리고 있다.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사망한 '용산철거민참사' 한달을 맞은 2월 20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남일당건물에 '여기 사람이 있다'는 글과 철거민들의 모습을 담은 대형 걸개그림이 걸리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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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기 사람이 있다>에서 전개되고 있는 고통 받는 철거민들의 발언을 일종의 전율의 감정 속에서 읽어 내려가야 하는 사람은 하층민도 사회귀족도 아닌, 우리 사회의 대다수를 점유하고 있다고 흔히 간주되는 동요하는 중간계급들이다. 그들이 증권과 부동산, 자녀교육과 사회적 권력에 탐닉하는 일이 매우 순조롭게 보일 때에도 사실은 그들을 둘러싼 대기는 매우 험악한 형세로 변해가고 있으며, 그들이 차가운 시선으로 관조했던 타인의 고통이 어느 순간 그 자신의 현실로 강림할 수 있다는 구조적인 진실을 목도할 이성과 용기가 없다면, 그들 역시 싸늘한 사회적 침묵 속에서 집단화된 난민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점점 분명한 사실이 되어가고 있다.

이 책이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의 충격으로 경험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런 충격과 함께 이 책에서 발언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공동의 고통 속에서 인간됨의 존엄을 회복하게 되었는지, 또한 서로에 대한 신뢰와 협동 속에서 어떻게 우리들이 자본주의적 체제 안에서 잃어버렸던 본연의 민중적 활기를 회복하는지를 공감하는 것이 더욱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어제까지도 멀쩡하게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으로 생의 활력을 유지했던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전쟁과도 같은 난민적 상황에 빠져들게 되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큰 희망의 집단적인 성취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는지를, 이 책은 고통스러운 육성을 통해 우리들에게 다른 미래를 꿈꿀 것을 촉구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그 출발부터가 민중들이 연대와 협동 속에서 항구적인 삶의 희망을 기획할 수 있었던 근거인 '공유지'를 사적 소유의 형태로 파괴하면서, 그 땅에 뿌리박고 살아오던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삶의 장소로부터 추방시켜 온 난민화의 거대한 역사의 기록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가난한 농민이 그 땅으로부터 추방될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침묵했다. 약간의 땅을 소유했던 자작농이 추방될 때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침묵했다. 이제 그 땅이 자기 것이 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그 땅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조차 추방된 후, 막대한 재력을 보유한 기업이 국가기구의 후원에 힘입어 땅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모든 땅의 원주민들은 '난민'이 되었고, 새롭게 땅 주인이 된 사람들도 머지않아 '난민'이 될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이 개발주의의 변함없는 공식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에서 발언하고 있는 철거민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공간에서 단순히 추방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장소에 뿌리박고 살았던 그들의 삶 모두를 박탈당했다. 문제는 이 헐벗은 삶의 증대하는 운동성이 점차로 이 책을 읽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운명으로 변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의 확인에 있다. 우리는 이 강요된 운명에 저항해야 한다.

3월 28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앞에서 열린 '용산철거민참사 책임자 처벌 및 MB악법 저지 범국민대회' 참가자들이 '남대문, 촛불, 용산 - MB 불로 망할지어다'가 적힌 손피켓을 들고 있다.
 3월 28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앞에서 열린 '용산철거민참사 책임자 처벌 및 MB악법 저지 범국민대회' 참가자들이 '남대문, 촛불, 용산 - MB 불로 망할지어다'가 적힌 손피켓을 들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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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람이 있다 - 대한민국 개발 잔혹사, 철거민의 삶

강곤 외 지음, 삶창(삶이보이는창)(2009)


태그:#여기 사람이 있다, #용산 철거민 참사, #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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