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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스페셜> '문정희와 함께하는 "여우비(女優悲)", 대한민국 여배우로 산다는 것'
 <SBS 스페셜> '문정희와 함께하는 "여우비(女優悲)", 대한민국 여배우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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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광고를 많이 했잖아요. 그 당시에 광고 계약서를 보면, 스캔들이나 결혼소식이 사전 통보 없이 나가면 3배의 위약금을 물어주게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그땐 사실, 20대의 나는 내 사랑에 당당함이 없었죠."

이제는 우리의 곁을 떠난, 고(故) 최진실씨가 생전 MBC <황금어장 -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한 얘기다. 누군가와 커피 한 잔만 마셔도 대단한 이슈가 되고 스캔들이 되던 1990년대, 여배우 최진실은 자신이 여배우이기 때문에 사랑에 당당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광고에서 위약금을 문다는 건 해당 광고 제품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째서 제품을 홍보하는 여배우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는 게 '제품 이미지를 훼손'하는 일이 되는 걸까?

대한민국에서 여배우로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대중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그들은 마냥 행복하기만 할까? 지난 22일 방영된 <SBS 스페셜> '문정희와 함께하는 "여우비(女優悲)", 대한민국 여배우로 산다는 것'에서 그것을 다뤘다. 데뷔 10년차 여배우 문정희가 인터뷰어가 되어 20여 명에 이르는 여배우들을 직접 만나 그들에게 '여배우로 산다는 것'에 대해 묻고, 때론 공감하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 감추어진 여배우들의 이면을 담아냈다.

무심코 단 악플, 여배우에겐 비수가 되다

<SBS 스페셜> '문정희와 함께하는 "여우비(女優悲)", 대한민국 여배우로 산다는 것'의 한 장면. 사진은 배우 한혜진.
 <SBS 스페셜> '문정희와 함께하는 "여우비(女優悲)", 대한민국 여배우로 산다는 것'의 한 장면. 사진은 배우 한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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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들은 언론의 선정성과 누리꾼들의 악플에 너무 큰 상처를 받는다고 토로했다. 누리꾼들의 악플에 대해 엄지원은 이런 말을 했다.

"생각해 보면 저희가 학창 시절에도 누가 뒤에서 제 험담을 했다는 얘길 들으면 얼마나 속이 상해요. 그런데 그런 걸 집단적으로 몰매를 맞으면 아무리 강건한 사람이라도 힘들죠."

인터뷰에 응한 여배우들은 무차별적이고 과격한 악플에 큰 상처를 받는다고 했다. 김지영은 "온갖 욕설과 비난에 '나는 정말 살 가치가 없는 것일까?'하는 회의가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

소통의 부재는 여배우들을 더욱 고립시켰다.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가 없다. 김진아는 "너무 슬퍼 눈물을 흘리면 '쟤는 여배우니까 분명히 연기일 거야'하는 말까지 들어봤다"고 했다. 여배우이기에 진심을 모두 보일 수도 없고, 용기를 내어 진심을 내비친다고 해도 대중은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배우도 사람이라 힘들고 지칠 때가 있는데, 사람들은 다들 복에 겨웠다고 한다. 결국 여배우들은 혼자 속으로 삭히며 끙끙 앓는 수밖에 없다.

여배우들 중에는 괴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형이 유난히 많다는 하유미의 말, 어쩌면 그들은 처음부터 그랬던 게 아니라 여배우이기에 캔디형이 되어야만 했던 것은 아닐까? 여배우이기에 달라지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둔하고 무딘 성격도 날카롭게 벼린 칼날처럼 예민하게 변모해갔다. 한 줄의 기사, 누리꾼들의 악플, 대중의 시선, 감독의 눈짓 하나에도 시시때때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되기 때문에 여배우들은 어쩔 수 없이 예민한 성격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SBS 스페셜> '문정희와 함께하는 "여우비(女優悲)", 대한민국 여배우로 산다는 것'의 한 장면. 사진은 배우 하유미.
 <SBS 스페셜> '문정희와 함께하는 "여우비(女優悲)", 대한민국 여배우로 산다는 것'의 한 장면. 사진은 배우 하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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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년배 남자배우 어머니로 나와야 하는 이유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늙게 된다. 밝게 빛나는 청춘은 누구에게나 한때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배우에게 있어 이 자연의 섭리는 곧 재앙이 된다. 나이를 먹으면 맡을 수 있는 배역의 제약이 심해진다. 물론 연기를 하는 이상 그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긴 하다. 하지만 그 제약의 폭이 남자배우에 비해 너무 심하게 좁아진다. 정말 하고 싶고 욕심나는 배역이 있는데 시켜주질 않는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불안감에 때론 잠에서 깰 때도 있다.

여배우들은 공통적으로 "여배우는 작품 안에서 너무 빨리 늙는다"고 말했다. 같은 나이의 남자배우와 연기를 해도 늘 자신은 어머니 역이고 상대방은 아들 역으로 나온다는 나문희. 젊은 시절 손창민과 연애 멜로물을 찍었지만 지금은 절대로 부부를 안 시켜준다는 이혜숙. 남자배우는 상대적으로 노화가 더딘 반면, 여배우는 그 속도가 빠르다. 남자 톱스타가 10년의 세월 동안 그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사이, 그의 상대 배역은 계속해서 어리고 젊은 여배우로 바뀐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는? 거의 없다.

배우는 비정규직이다? 여배우들은 자신들이 경제적인 문제에서도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했다. 모든 여배우가 대중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부를 누리며 값비싼 명품에 외제차를 타며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고정적인 수입이 없고, 활동을 할 때에만 돈을 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윤여정은 '비정규직'이라는 표현을 썼다. 작품 활동을 안 하면 수입이 없기 때문이다. 조은숙은 2년여 동안 일을 안 한 탓에 돈이 한 푼도 없어 '카페 아르바이트라도 해볼까?'하는 생각도 해봤다고 했다.

<SBS 스페셜> '문정희와 함께하는 "여우비(女優悲)", 대한민국 여배우로 산다는 것'의 한 장면. 사진은 배우 나문희의 모습.
 <SBS 스페셜> '문정희와 함께하는 "여우비(女優悲)", 대한민국 여배우로 산다는 것'의 한 장면. 사진은 배우 나문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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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선택 받은 이후에 선택할 수 있는 직업'

활동을 하지 않으면 경제적인 문제도 발생하지만 대중에게서도 잊히게 된다. 대중의 사랑을 받고 사는 여배우에게 대중에게 잊힌다는 것은 또 하나의 큰 두려움이다. 그런데 때론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이에 대해 엄지원은 '배우는 선택 받은 이후에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했다. 자신이 아무리 원해도 찾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일을 할 수 없다. 어떤 작품을 할까 선택하는 것도 자신이 선택된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진다.

배우는 정년이 없다? 배우라는 직업은 전문직에 속한다. '배우' 자격증이나 면허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획일화된 정년은 없다. 실제로 예순, 일흔을 넘기고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는 노(老)배우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 인터뷰를 한 신인 여배우들은 모두 그 점을 장점으로 꼽았다. 젊었을 땐 젊은 역할을 하고, 늙으면 또 나이에 맞는 역할을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중견 여배우들의 생각은 또 달랐다. 생각보다 노화는 빨라지고, 배역을 맡는 데 있어 나이 때문에 어정쩡해지는 시기가 금방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SBS 스페셜> '문정희와 함께하는 "여우비(女優悲)", 대한민국 여배우로 산다는 것'의 한 장면. 사진은 배우 채시라.
 <SBS 스페셜> '문정희와 함께하는 "여우비(女優悲)", 대한민국 여배우로 산다는 것'의 한 장면. 사진은 배우 채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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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꾸려나가는 일에 대해서도 여배우들은 어려움을 토로했다. 여배우 아무개가 아닌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가 되는 순간, 여배우들은 은퇴 기로에 서게 된다. 실제로 과거에는 여배우의 결혼은 곧 은퇴나 다름없었다. 젊고 예쁜 여배우도 결혼이라는 관문을 거치면 곧 '아줌마'가 되어 버린다. 더 이상 어느 정점에 올라설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멜로물의 주인공도 할 수 없고, 광고도 들어오지 않게 된다. 그 자신이 빛나는 존재보다 누군가를 빛나게 할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자괴감이 여배우들을 괴롭게 한다고 했다.

'배우'로서 일적인 측면 외에도 결혼이라는 것은 여배우에게 많은 어려움을 감내하게 한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극중 여배우로 분한 김자옥이 '사람 도리도 못하고 사는 게 배우'라고 했듯이, 아내로서, 엄마로서 사는 여배우들이 겪는 어려움과 현실의 벽은 높고 험하기만 하다.

여배우, 그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

밤늦게 촬영을 끝내고 집에 들어갔더니 아이가 아파 밤새 간호하다 결국 한잠도 못자고 다시 촬영장에 갔다는 채시라. 출퇴근 시간이 일정치 않고 때때로 촬영장에 불려나가야 하기 때문에 결혼 이후 남편과 쭉 각방을 썼다는 나문희. 명절에 촬영이 겹치는 날이면 새벽부터 제사 준비를 서둘러 한다는 이혜숙까지…. 여배우들이 현실에서 부딪치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인터뷰에 응한 여배우들 중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중견연기자들은 후배 여배우들에게 이런 조언을 했다. "여배우로서 정말 오래 이 일을 하고 싶다면, 롤러코스터 같은 굴곡을 견디고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언제나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강해지라"고. 그리고 "스타가 아닌 연기자로 거듭나야 한다"고. 오랜 세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여배우들에게는 그만의 '힘'이 존재한다.

대한민국에서 여배우로 산다는 것, 그것은 상상했던 것처럼 화려하지만도, 아름답지만도 않았다. 아름답고 값비싼 드레스를 멋지게 차려입고 화려한 레드카펫 위를 걸으며 터지는 플래시와 넘치는 환호성 속에서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지만 그들의 속내는 우리들 못지 않게 근심과 걱정이 가득했다. 그들도 웃고 울고, 고민하고 걱정하며, 화내고 슬퍼한다. 그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태그:#여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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