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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도산 안창호 선생 어록비에 적혀 있는 말이다. 민족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암울하던 시절 학교를 세운 교육자로서 민족의 스승 역할을 하신 분이다. 선생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도 꼭 필요한 가르침이 되고 있었다.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 하나이다'

 

이봉창 의사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며 서약한 말이다. 애국단에 가입한 이봉창 의사는 상해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의 밀명으로 일왕 암살의 길을 떠난다.

 

의사는 일본에 잠입하여 1932년 1월 8일, 일왕 히로히토가 꼭두각시로 내세운 만주국 황제 푸이를 불러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벌였다. 행사를 마친 일왕이 돌아가는 길목 경시청 앞에서 히로히토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폭탄의 위력은 일왕에게까지 미치지 못하고 미수에 그쳤다. 이봉창은 태극기를 꺼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왜경들이게 붙잡힌 이봉창 의사는 그해 10월 이치가야 형무소 사형장에서 장렬하게 순국했다.

 

'서리가 오기 시작하면 반드시 굳은 얼음이 얼고야 마는 것은 필연의 이치인데, 하루 이틀 지날수록 한 가지  두 가지 일이 외국에 침식되니 계속 이와 같이 나간다면 몇 날 몇 달이 못가서 전국의 권한이 외국에 모두 양도되어 태아(보검의 이름)의 칼자루를 거꾸로 쥐게 되는 후회를 남기게 될지 어찌 알겠습니까.'

 

이상재 선생은 구한말의 개화운동가로서 서재필,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결성하였고, 대중 계몽운동인 만만공동회 의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또 황성기독교 청년회와 YMCA활동에서도 역할이 컸던 사회운동가이자 종교인이기도 했다.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정치인이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의 어록비에 적혀 있는 글이다.

 

'대의에 사는 사람은 항상 소비(小秘)나 소의(小義)나 소이(小利)나 소국(小局)에 구애받지 말아야 하며 더구나 명리를 쫓아서는 안 된다. 모름지기 우리는 공명심을 버리고 조국 독립에 무명의 전사가 되자'  - 남파 박찬익 선생 어록비에서

 

남파 박찬익 선생은 구한말의 독립운동가였다. 신민회에서 활동하고 국권피탈 후 북간도 허룽현 삼도구에 한인학교를 세우고 서로군정서의 요직을 거쳐 동제사를 조직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임시정부 법무부장 등을 지냈다.

 

'국교, 국학, 국어, 국문, 국사는 국혼에 속하는 젓이요, 전곡, 군대, 성지, 함선, 기계 등은 국백에 속하는 것으로 국혼의 됨됨은 국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상해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내고 역사서 '한국통사'를 저술한 백암 박은식 선생의 한국통사 결론에서 발췌한 글로 그의 어록비에 적혀 있는 글이다.

 

'사나이 뜻을 세워 집을 나가면 공을 이루지 않고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

 

1930년 3월 매헌 윤봉길 의사가 남긴 말이다. 그는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날 중국 상해 홍구공원 행사장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상해파견군 대장 등 일본 군벌의 실력자들을 죽이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당시 운봉길 의사의 나이는 불과 24세였다.

 

'무릇 어느 사회를 개조코자 하는 자는 반드시 그 사회의 사정을 잘 알아야 할지니 조선의 사업을 경영하는 자- 조선의 사정을 모르고서 어찌 가 하리오, 무릇 천하의 일은 다 사상이 있나니 아무쪼록 조선의 사정을 잘 아는 청년들이 많이 생겨 먼저 조선이라는 사상으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 여러 외국문물을 식(飾)할 지어다.'

 

운강 양기탁 선생의 어록비에서. 양기탁 선생은 언론인이며 독립운동가로 평양 출신이다. 1905년 영국인 베셀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주필로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데 앞장섰다.

 

1909년 안창호선생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였으며 한일합방 후 김구, 이동녕, 이승훈 등과 만주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검거되어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후 다시 '105인 사건'으로 3년간을 복역하였다.

 

'나는 삼한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의 광복을 못 본 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리라'

 

1928년 10월 10일 일제의 형장에서 순국직전 조명하 의사가 남긴 말이다. 조명하 의사는 황해도 송화에서 1905년에 태어나 풍천보통학교를 나와 신천군청 직원으로 일본제국주의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편안히 살아갈 수도 있었던 분이다.

 

그러나 그는 6·10만세운동과 나석주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의거 등이 일어나자 독립투쟁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러나 일본에서 마땅한 기회를 잡지 못한 그는 상해임시정부를 거쳐 1927년 11월 타이완에 도착한다.

 

타이완에서 때를 기다리던 조명하 의사는 1928년 5월 타이완에 주둔한 일본육군검열사로 일본왕의 장인인 쿠니노미아 육군대장이 온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1928년 5월 14일 아침, 조명하 의사는 쿠니노미아를 태운 차에 잽싸게 뛰어올라 한민족의 원한을 담은 칼날을 일본제국주의 원흉의 목에 날렸다.

 

조명하 의사의 칼을 맞은 쿠니노미아는 몸에 독이 퍼져 6개월을 앓다가 결국 사망했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현장에서 붙잡힌 의사는 같은 해 7월 18일 일제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10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비록 말단 관리였지만 일제에 아부하며 넉넉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조명하 의사의 순국은, 당시 일제를 등에 업고 치부하며 동족들에게 횡포를 일삼았던 친일파들과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다간 의로운 죽음이었다.

 

'국가독립을 완성하는 최후 방법은 적에게 점령된 국토를 완전 수복하고 상실된 주권을 완전 회복하는 것이다. 국토를 수복하되 일부분이 아니요, 주권을 수복하되 조건부가 아니라 전부 또는 무조건 회수하는 것이 즉 완전광복이다'

 

동암 차이석 선생 어록비문이다. 동암 차이석 선생은 1919년 평북 선천에서 출생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대성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남아 민족교육에 헌신했다. 1919년 평양에서 3,1운동에 가담하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기자와 편집국장을 지내며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1922년부터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과 내무총장직을 역임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그는 1945년 9월 9일 독립된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임시정부 청사에서 별세했다.

 

'오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유관순 열사의 매봉교회에서 올린 기도문이다. 3,1 만세운동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유관순 열사다. 열사의 유적지인 천안 생가 터는 봉화 터와 함께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당시 일제가 가옥과 헛간을 불태워 유품 한 점 없이 전소되고 빈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91년 12월 30일 복원하였다.

 

생가 터 옆에는 박화성이 시를 짓고, 이철경이 글씨를 쓴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이곳에서 태어나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순국하였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낙망, #청년, #이승철, #어록비,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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