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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7일 부산 해운대구 반송동 재래시장 상인들이 SSM(슈퍼슈퍼마켓) 입점을 반대하며 삭발 시위를 하고 있다.
 지난달 17일 부산 해운대구 반송동 재래시장 상인들이 SSM(슈퍼슈퍼마켓) 입점을 반대하며 삭발 시위를 하고 있다.
ⓒ 부산중소상공인살리기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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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마트도 모자라서 구멍가게가 웬 말인가?"

지난달 17일 오후 2시 부산 해운대구 반송동. 인근 재래시장과 상점 상인 300여 명이 가게 문을 닫고 거리로 몰려나왔다. 한창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어야 할 이들의 어깨에는 '대기업 소형슈퍼 입점 절대 반대'라고 적힌 빨간색 어깨띠가 걸렸다. 어설프긴 하지만 노란색 풍선 막대를 힘차게 두드리며 입을 모아 구호도 외쳤다.

재래시장 상인들, SSM에 맞서 삭발 시위

반송동 재래시장은 40년 전 수재민과 철거민들이 모여 살던 빈민촌을 토대로 형성됐다. '당장 입에 풀칠이라도 하자'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게 어느새 시장 형태가 된 것이다.

외환위기도 잘 견뎌냈다. 동네 어귀에 들어선 대형마트 때문에 타격이 컸지만 그것도 어찌어찌 이겨내는 중이다. 그나마 2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이들을 버티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지난 설 직전부터 아파트 단지 입구 바로 앞에 GS마트가 부지를 구입해 공사를 하는 게 아닌가. 설마 했는데, 말로만 듣던 '슈퍼슈퍼마켓(SSM)'이 외진 동네 골목까지 밀고 들어온 것이다. 아파트 주민들이 시장에 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GS마트 앞을 거쳐야 한다. 과연 누가 그냥 지나쳐 올 수 있을까?

상인들이 "장사고 뭐고 때려치우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유다. 이들은 이날 "경기는 어려워지고 서민들은 살아갈 길이 막막한데, 대기업이 동네 구멍가게 상권까지 잠식하고 있다"며 "지역경제를 죽이고 영세 소상공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고 호소했다. 이날 집회에서 상가 대표자 5명은 삭발 시위를 벌였고, 그중에는 66세 백발노인도 포함돼 있었다.

대기업 소형슈퍼마켓인 SSM이 동네 골목까지 입점해 있다. 사진은 GS슈퍼마켓과 인근 상가의 모습. 빅파워마트(오른쪽)는 GS슈퍼마켓 입점 한 달만에 경영난을 이기지 못해 결국 폐업하고 말았다.
 대기업 소형슈퍼마켓인 SSM이 동네 골목까지 입점해 있다. 사진은 GS슈퍼마켓과 인근 상가의 모습. 빅파워마트(오른쪽)는 GS슈퍼마켓 입점 한 달만에 경영난을 이기지 못해 결국 폐업하고 말았다.
ⓒ 부산중소상공인살리기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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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전쟁' 나선 대형유통업체, '진짜 구멍가게' 생존권 위협

SSM은 대형할인점과 슈퍼마켓의 중간 형태로 1000평(3300제곱미터) 이하의 매장을 말한다. 자영업자가 아닌 유통 대기업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형 슈퍼마켓'으로도 불린다. 대형할인점에 비해 인구밀집지역 입점이 용이하고 개점 비용이 저렴하다. 대부분 임차방식의 출점이 많아 실패 위험이 낮으면서도 매장운영비가 적게 든다.

무엇보다 국내 대형할인점 시장이 포화 상태다. 대형할인점들이 앞 다퉈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눈을 돌려 치열한 '슈퍼전쟁'에 뛰어든 것도 이 때문이다. 롯데슈퍼, GS슈퍼마켓, 홈플러스익스프레스 등 이른바 'SSM 빅3'는 전국의 골목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들어가 이미 각각 100호점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동안 소극적이었던 신세계 이마트마저 SSM 사업에 뛰어들 채비를 갖추고 있다.

특히 수도권에 이어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 부산에서는 SSM이 빠른 속도로 증식 중이다. 2005년 34곳이던 SSM이 지난해에는 56곳을 기록, 해마다 20%씩 증가하는 추세다.

전국 유통망을 갖춘 대형백화점과 대형할인점의 진출로 지역의 대표적인 백화점과 유통업은 이미 고사 상태다. 여기에 '대기업 구멍가게'인 SSM이 골목 구석구석까지 진출하면서 '진짜 구멍가게'인 동네 슈퍼마켓과 재래시장이 뿌리째 뽑혀나갈 위기에 처했다.

문제는 이러한 SSM을 규제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지자체 조례 등 관련 법규에서는 규모가 3000평(9900제곱미터) 이상인 매장만을 규제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그 기준을 1000평으로 내리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다른 업체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자체와 법조계의 반대로 실현 가능성이 낮다.

시민들의 인식 또한 우호적이지 않다. "싸고, 깨끗하고, 원스톱(one stop) 쇼핑이 가능한 SSM을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소기업청 조사에 따르면 재래시장이나 소형 매장보다 SSM 가격이 더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대형유통업체에서 1000명을 고용하면 주변 중소유통시장에서 1600명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게다가 본사를 서울에 둔 SSM을 통한 지역자금 역외유출 역시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부산 소재 SSM '빅3'의 경상 판매액은 3조6000억원을 넘었지만, 대부분의 자금이 서울로 빠져나갔다.

부산 중소상공인살리기협회는 SSM 설립 시 사전출점 예고제를 통한 주민 의견 수렴을 의무화하고, 영업이익의 1%를 지역상권 활성화 기금으로 출연하게 하는 등 SSM 규제와 관련한 관계법령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SSM, 아이들 간식까지 잠식... 민란 일어날 판"
대기업의 SSM(슈퍼슈퍼마켓)이 증가하면서 영세 소상공인과 재래시장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다. 사진은 이정식 부산중소상공인살리기협회 회장(가운데)을 비롯해 SSM에 피해를 입고 있는 상인들의 대화 모습.
 대기업의 SSM(슈퍼슈퍼마켓)이 증가하면서 영세 소상공인과 재래시장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다. 사진은 이정식 부산중소상공인살리기협회 회장(가운데)을 비롯해 SSM에 피해를 입고 있는 상인들의 대화 모습.
ⓒ 최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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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재송동에 위치한 한 냉동상품 유통업체 사무실. 취재차 방문한 기자를 위해 이정식 부산중소상공인살리기협회 협회장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모두 SSM(슈퍼슈퍼마켓)으로 인해 피해를 본 상인들이다. 할 말이 무척 많은 듯했다. 기자를 앞에 두고 즉석에서 '성토대회'가 열렸다. 다음은 그들의 발언록 요지이다.

정종하 "해운대구 우동 쪽에서 9년간 슈퍼를 하다가 이번에 접었다. 옆에 이마트, 홈플러스가 생겼어도 지금까지 잘 견뎌왔는데, SSM쪽에서 워낙 저렇게 나오니까…. 심지어 아이들 간식거리까지 SSM이 잠식해 버렸다."

김영한 "반송2동 재래시장상인회 회장을 맡고 있다. 하루 매출 10~20만원만 돼도 절대 폐점 안 한다. 200미터 거리에 있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 GS마트가 입점하겠다고 공사를 하고 있다. 근처에 있는 탑마트가 하루 매출 3500만원인데, 자기들은 1000만원만 올리겠다고 하더라. 하루 매출 1000만원이면 재래시장 500개 업소가 떨어져나간다. 대기업에서 도덕적으로 할 일이 아니다."

이정식 "대기업에서 구멍가게 사업은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반송동은 홈플러스까지 입점이 예정돼 있다."

김영한 "집회는 신문이나 TV에서만 있는 줄 알았지, 내가 할 줄은 몰랐다. 꼭지가 돌려고 하니까, 생사를 걸고 하고 있다. 그런데 허공에 얘기하는 것 같더라. 옛날에 전봉준 같은 지도자가 없어서 그렇지, 민란이 일어날 판이다. 우리들이 또 집회를 하려고 했는데, 3월 18일까지 GS마트에서 (방어) 집회를 내놨다."

이정식 "구청 직원한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안 된다. GS마트 상대로 얘기를 좀 해보라'고 항의한 적이 있다. 구청 직원도 얘기했다더라. 그런데 GS마트 쪽 사람이 '법대로 하는 거죠' 하더란다. 하늘에다 고함지르는 것보다 못한 상황이다."

박길준 "2월 2일에 슈퍼 문을 닫았다. 15미터 앞에 GS마트가 들어왔다. 규모는 우리와 비슷하지만, GS마트는 1층이고, 우리는 지하 1층이다. 매출이 4분의 1로 뚝 떨어졌다. 버틸 재간이 없더라. 한 달만에 정리했다. 법 이전에 너무 부당하다 싶어서 공정거래위에 제소하려고 한다. 대기업의 부도덕성을 알리고 싶다. 법적으로 하자는 없을지 모르지만, 도덕적으로 맞지 않다. 개인도 앞에 슈퍼가 있으면 안 들어온다."

이정식 "어차피 대기업과 우리 서민은 공정한 게임이 안 된다. 자본을 어떻게 이기나?"

김영한 "상인이 천민이라서 그런가? 왜 이렇게 푸대접을 받나? 왜 드라마에서는 (배우들이) 대형마트만 가는지 알아봤더니, 협찬을 거기서 다 한다고 하더라. 재래시장이 어떻게 협찬을 하나. 우리를 동정해서가 아니라, 재래시장이 자생력을 갖도록 해줘야 한다. 30대 대기업은 소형유통 점포를 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재래시장이 만만하니까, 막 집어삼키고 있는 것 아닌가?"

이정식 "구나 시도 마찬가지다. 현대화사업 자금이라면서 재래시장에 돈을 쏟아 붓고, 바로 옆에 대형마트 입점 허가를 내주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신세계 센텀시티도 마찬가지다. 반여동에 농산물도매시장 짓는다고 얼마나 돈 쏟아 부었나. 그런데 그 옆에 대형마트를 입점시켰다."

김영한 "신세계 센텀시티가 6000명의 직원을 해운대구에서 뽑는다고 했다. 구청장도 그것을 업적으로 자랑하고 다녔다. 막상 합격자 발표 보니까, 100명 중 1~2명밖에 없더라. 그 애들은 해운대구에 안 살아도 합격할 만한 애들이다. 이거 사기 아닌가? '이런 큰 가게가 들어서면 주변 상인들이 다 죽는다'면서도 '우리 아이들이 취직하니까 참는다'고 했다. 그런데 결국 취직도 못했다."

강대호(부산중소상공인살리기협회 해운대구 위원장) "대형할인점이 포화상태다. 이제 골목까지 진출해서 완전히 싹쓸이하고 있다. 우리도 대형할인점이 있는 것을 환영한다. 그러나 서민들을 위해 SSM만큼은 대기업에서 자제해야 하지 않나. 서민들과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나."

이정식 "롯데슈퍼나 GS마트가 그렇게 돈 버는 수완이 좋다는데, 붕어빵에도 롯데붕어빵이라고 하면 '노나지' 않겠나. 왜 롯데붕어빵, GS떡볶이는 안 파느냐."

박길준 "대기업은 제조업 등 대기업다운 사업을 하고 유통은 서민들이 먹고 살게 놔둬야 한다."

김영한 "부산 사람이 감각이 둔한 것은 맞다. 감각이 둔해서, 숟가락 들고 있을 때는 모른다. 막상 숟가락 놓으니까, 이제 난리가 난 것이다. 지금 숟가락 다 놓은 거 아니냐."

정종하 "(부산은) 한나라당 공천만 받으면 (국회의원에) 당선이 돼서 그런다. 차라리 서울처럼 국회의원이 골고루 나왔으면 지역 서민들의 애환을 잘 들어주는 방향으로 갔을 텐데…." 

이정식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할 말이 많다. 창원시장을 보면서 느낀 게 많다.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4년 동안 롯데마트와 붙어서 못 들어오게 하지 않나. 그 정도의 개념이 있는 정치인 같으면, 믿고 따를 수 있지 않나."


태그:#SSM(슈퍼슈퍼마켓), #대형유통업체, #부산중소상공인살리기협회, #반송동재래시장, #대기업 구멍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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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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