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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터' 젊은 사람들이 흔히 고속터미널 지하상가를 줄여 부르는 말이다. '꽃남'이나 '패떴'처럼, 인기 드라마나 버라이어티에나 존재하는 줄임말이 고속터미널 지하상가에도 존재하는 것은 그만큼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곳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많은 종류의 옷을 구경할 수 있고, 가격도 제법 싸다는 것이 '고터'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게다가 주변엔 백화점을 비롯해 영화관, 서점과 음식점들까지 즐비해 한 곳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기 안성마춤이다.

 

지난 일요일(3월 1일)엔 친구와 함께 고속터미널역을 갔다. 내가 사는 일산에서는 꽤 먼 거리지만 운 좋게 얻은 신세계백화점 상품권도 쓰고, 지하상가도 한 번 둘러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백화점에서 10만 원짜리 상품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았다. 사고 싶은 물건을 어렵게 찾아도 상품권에 더 많은 돈을 보태야 했다.

 

결국 우리는 백화점 세 바퀴를 돌고도 아무것도 사지 못했고, 터덜터덜 고속터미널 지하상가로 발길을 돌렸다. 그 곳에는 한 장에 5천원, 1만원에 파는 티셔츠들이 여기저기 넘쳐났다. 더운 공기 때문에 숨쉬기가 불편하고, 사람이 많아 여기저기 부대끼며 걸어 다녔지만, 친구와 나는 백화점보다 이 곳이 더 편했다.

 

백화점보다 '고터'가 더 편했다

 

고터를 걸으면서 나는 가게마다 똑같이 붙어있는 글씨들을 발견했다.  

 

"영세상인 목조이던 정인준(서울시 시설관리공단 사업운영본부 본부장)은 사퇴하라"

 

알록달록한 세일 광고와 어울리지 않은 문구들이었다. 출퇴근길 매일 이곳을 오가는 친구는 예전엔 큰 현수막도 곳곳에 붙어 있었다고 했다. 현수막들이 어디로 갔냐는 내 물음에 경비 아저씨는 "구정 전에 지하상가 시설관리공단에서 모두 떼어갔다"고 했다. 이 모습, 어디서 많이 보았던 익숙한 광경이다. 학교를 다닐 때 자주 오갔던 동대문구 지하상가의 풍경과 겹쳐졌다.

 

상가 상인과 서울시의 갈등은 하루 이틀 문제가 아니고 이곳만의 문제도 아니다. 내가 떠올렸던 동대문 지하상가를 비롯해, 용산 상가 참사까지 모두 같은 문제인 '권리금' 때문에 벌어진 일.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지하상가 개보수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상인들의 주장이 배부른 소리가 아닐까라는 의심마저 들었다. 사람이 붐볐던 일요일이라 더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나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신분으로 다시 '고터'를 찾았다. 지하상가 상인들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월요일의 고터는 일요일과는 너무도 다른 한산한 모습이었다. 손에 쇼핑백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지하 상가 상인인 박원태(54)씨는 "주말에도 오가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물건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며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3억~4억원에 들어온 상인들에게 임대보증금인 3천 만원만 주고 내쫓는다는 게 도의적으로 맞는 일이냐"고 반문했다.

 

박원태씨는 35년 전인 1974년부터 지금까지 고속터미널 지하상가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상인이다. 74년 당시, 정부는 지하상가 건설을 민간업체에게 맡기고 일정기간 소유권을 보장해 주었다. 당시 그는 고속터미널 지하상가의 2구역을 담당했던 민간업체인 호정주식개발회사에 임대보증금 명목으로 당시 반포아파트 두 채 가격인 3천만 원을 지불했다고 한다.

 

그리고 1999년에 지하상가의 소유가 서울시로 다시 넘어오게 되었을 때는 호정주식개발회사가 부도가 난 상태였다. 상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서울시에 다시 임대보증금을 납부해야 했다. 박원표씨는 "상인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는 2008년 8월 31일로 끝난 계약을 연장시키지 않고, 임대보증금만  주려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권리금 들어간 게 얼마인데... 임대보증금만 주려 한다"

 

사실 법적으로 보자면 서울시의 이런 조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상가임대차보호법 중 지하도상가관리조례에 따르면 서울시가 이들에게 권리금을 보상해 줄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 점포주들 70~80%가 평생 번 돈을 지하상가에 투자한 나이 많은 사람들이다. 게다가 빚까지 지고서 들어온 점포주들까지 있으니, 이들에게 통보된 서울시의 정책은 이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익명을 요구한 상인회 임원 중 한 명은 "약 2년 전에 서울시 요구에 의해 조건부 양도양수 계약 동의서를 작성했는데, 이 또한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면서 "비리 사전에 준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생긴다"고 말했다. 그동안 양도·양수 계약 동의서 작성이 비공개로 이루어지면서 손해를 보는 상인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그는 또 "기업이 위탁을 맡게 된다면, 개보수에 들어갔던 비용 이상을 회수하려고 할 텐데, 그렇게 되면 이 공간은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공간이 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터를 가 본 사람들이면 알 수 있듯이 이곳은 개보수가 필요한 곳임에는 분명하다. 지하인 탓에 몇 시간 돌아다니고 나면 눈이 빨갛게 충혈될 만큼 공기가 나쁘고, 많은 사람들 탓에 불판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상인들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상인은 "하지만 굳이 민간업체에 넘기지 않아도 상인들 자체적으로 관리와 보수가 가능하다"며 인천 부평 상가를 그 예로 들었다. 그러나 현재 서울시는 이들에게 관리·보수 허가조차 내주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상인회 공동으로 공개 입찰을 신청하더라도 거대 회사를 상대로 이들이 입찰을 따낼 리는 만무하다.

 

서울시는 얼마 전 상인들을 상대로 법원에 '명도소송 및 가처분 신청'까지 해 둔 상태다. 2008년 8월 31일 이후로 이들과의 계약은 끝난 상태라 법적으로는 상인들이 무단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고속터미널 2구역 상인회는 작년 4월부터 매주 금요일 10시부터 서울시 별관과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지만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상인들은 '그나마 용산 참사로 언론과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진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했다.

 

집으로 오는 길, 고터에서 티 한 장과 머리띠를 샀다. 평소 같았으면 단돈 천 원이라도 깎았을 텐데, 어쩐지 이번에는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 곳 상인들의 땀과 눈물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번에 왔을 때에도 이곳이 서민들을 위한 고터로 남아 있을까. 확신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태그:#고속터미널, #지하상가, #공개입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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