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서울 구로구 가리봉1동 '서울중국동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재중동포들
 서울 구로구 가리봉1동 '서울중국동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재중동포들
ⓒ 조호진

관련사진보기


[# 목격 1] 논현동 고시원 참사 그 후

논현동 고시원 참사로 어머니를 잃은 재중동포 방일성씨. 그의 증오는 다행히도 웃음으로 바뀌었다.
 논현동 고시원 참사로 어머니를 잃은 재중동포 방일성씨. 그의 증오는 다행히도 웃음으로 바뀌었다.
ⓒ 조호진

관련사진보기

재중동포 방해란(여·28) 방해순(여·27) 방일성(21)씨 삼남매가 15일 서울중국동포교회(담임목사 김해성)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사회주의국가에서 성장한 이들은 대다수 동포들처럼 교회를 다녔거나 예수를 믿었던 적이 없지만 곡조와 가사가 자신들의 처지를 대변해주는 것 같아서 찬송가를 따라 부른다.

나는 순례자 이 세상에서 언젠가 집에 돌아가리
어두운 세상 방황치 않고 예수와 함께 돌아가리

이 교회 상당수 동포교인들이 그렇듯 이들 삼남매 또한 예수가 구세주인지 아닌지, 천국이 과연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예수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게 아니라'고 했지만 한치 앞이 막막한 이들에게 시급한 것은 삼시세끼와 잠자리, 병든 몸 치료와 임금체불 해소이다. 

삼남매는 다른 동포들처럼 교회를 제 발로 찾아왔다. 지난해 10월 20일 발생한 논현동 고시원 방화 살인으로 어머니를 잃고 망연자실할 때 김해성 목사가 손잡아 준 것이다. 김 목사가 대책위원장을 맡으면서 한국교회들이 발 벗고 나섰고, 재중동포 유족들은 위로금(3천만원) 등을 전달받게 됐고, 특히, 일성씨는 한림화상재단의 도움으로 다리수술을 무료로 받을 수 있었다.

일성씨는 작은누나 해순씨와 함께 어머니 유해를 안고 오는 19일 중국으로 돌아간다. 한국에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큰누나 해순씨는 청명 한식에 중국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래서 인사차 온 것이다.

어머니를 여윈 지 3개월 남짓밖에 안 됐음에도 삼남매의 얼굴이 편해 보였다. 특히, 사건 직후엔 말문을 닫다시피했던 일성씨는 엷은 웃음마저 흘린다. 어릴 적 화상 사고로 발가락이 오그라져 보행 장애를 겪었으나 피부 이식 수술을 거치면서 장애가 상당히 제거됐다. 그의 희망대로 운전도 배울 수 있고 트럭도 몰 수 있는 정도다.

점심식사 대접과 함께 유해운구 절차 등의 도움을 받은 삼남매는 "목사님, 죽을 때까지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며 손을 붙잡고 연신 감사인사를 드렸고, 이들과 헤어진 김 목사는 줄 지어 선 재중동포들의 민원청취를 위해 바쁜 걸음을 옮겼다. 이들 유족 외의 재중동포 유족들은 위로금 등을 수령한 직후 온다 간다 말없이 서둘러 한국을 떠났다. 이러한 결말은 수없이 이어졌으니 서운할 것도 없다.

불행 중 다행이다. 아버지는 돈 벌러 한국에 왔다가 행방이 묘연하면서 소식이 끊겼고, 어머니는 끔찍하게 살해돼 숨지면서 졸지에 고아가 됐다. 양친을 모두 앗아간 한국은 평생 증오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도 이주노동자를 위해 몸을 던진 한 목자를 만나 웃음 지으며 떠날 수 있게 됐다. 예수가 겨우 한숨 돌리는 순간이다.

재중동포 고(故) 이월자씨의 삼남매가 중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김해성 목사를 찾았다.
 재중동포 고(故) 이월자씨의 삼남매가 중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김해성 목사를 찾았다.
ⓒ 조호진

관련사진보기


[# 목격 2] 죽음과 주검의 끝없는 행진

중국 여성이 남편의 시신을 거두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이 담긴 깃발을 들고 김해성 목사를 찾아왔다.
 중국 여성이 남편의 시신을 거두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이 담긴 깃발을 들고 김해성 목사를 찾아왔다.
ⓒ 조호진

관련사진보기

愛心博大
亲如一家
(사랑의 마음이 넓고 크다.
한 집안 형제처럼 친하다.)

중국여성 리우영핑씨가 위의 글귀가 새겨진 깃발을 가지고 지난달 18일 김해성 목사를 찾았다. 넓고 큰 사랑과 형제 같은 친함으로 남편의 주검을 거두어준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제작해 온 것이다.

여인의 남편 푸롱차우씨는 2006년 뇌출혈로 쓰러져 서울의료원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다 다행히 치료받고 퇴원했다. 김 목사는 부인과 자녀를 초청해 간병을 돕도록 했고, 의료보험료 대납 등과 함께 외국인노동자의집/중국동포의집에서 생활하도록 도왔다.

그러나 신부전증 환자였던 남편은 지난해 7월 사망했고, 장례 절차와 화장 등의 처리는 김 목사 몫이었다.

지난해 7월 현재 국내 거주 이주노동자는 72만 명이다. 한국정부는 출입국 업무를 관할할 뿐 이들의 사망사건은 일절 상관하지 않는다. 이주노동자들이 늘어난 만큼 병사, 사고사 등이 늘고 있지만 대책은 전무하다. 죽은 자의 인권은 사각지대에 놓인 것이다. 사망 이주노동자의 가난한 대사관 또한 손 놓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럼 이들의 주검은 누가 처리하나?

이주노동자가 비명횡사하면 동료나 친지들이 김 목사를 다급하게 찾고 그는 유족 초청 및 장례, 보상 등에 나선다. 논현동 고시원 참사는 물론 여수출입국보호소 화재사건과 이천냉동 화재참사 처리 및 해결에 나선 그는 보상 등 사고처리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대신 목소리를 내왔다. 그의 개입은 거기까지, 보상금 수령 등의 금전 문제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20여 년 동안 이주노동자 인권 목회를 해온 그는 장례전문가이자 사고처리 및 협상타결의 고수다. 그가 나서면 정부든 기업이든 꼼수를 접는다. 현재는 서울장례식장이 이주노동자 시신처리 및 장례를 무료로 돕고 있지만 이전에는 비용이 없어 사체 방부처리 및 관 제작 등을 직접 했다. 무슬림이든 불교신자이든 무교든 상관하지 않고 거두어 준 시신이 1600여구에 이른다.

그는 한국 개신교회 풍토로 볼 때 실패한 목회자다. 성공 목회를 꿈도 꾸지 않았으니 실패한 게 아니라 실패를 향해 걸어온 셈이다. 그의 설교에 감동감화를 받아서 재산을 헌금한 동포도 없고, 불같은 성령의 역사와 신유의 기적을 일으킨 적도 없으며, 교회 성도라고 해봐야 헌금 알량한 동포들뿐이다. 분명한 건 병들고, 폭행당하고, 임금 떼이는 등 오갈 곳 없는 이주노동자와 버려진 주검을 거두어주는 이주노동자 목자의 외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 목격 3] 새벽에 본 이주노동자 십자가

양재동 성폭행 추락사건 피해자인 재중동포 일가족들이 논현동 고시원 방화살인 합동분향소에 찾아와 김해성 목사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양재동 성폭행 추락사건 피해자인 재중동포 일가족들이 논현동 고시원 방화살인 합동분향소에 찾아와 김해성 목사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 조호진

관련사진보기


지난해 10월 26일 논현동 고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가 차려진 서울의료원 장례식장. 대책위원장을 맡은 김해성 목사와 함께 다음날 진행될 합동장례 준비를 위해 밤을 샜다. 한국교회봉사단과 서울의료원 등 각계각층이 도움을 주었지만 궂은 장례준비는 김 목사의 몫이었다.

장례준비와 유족위로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 재중동포 일가족이 울며불며 찾아왔다. 논현동 고시원 방화 살인 사건발생 나흘 지난 10월 24일 서울 양재동 식당에서 일하던 재중동포 여성 김모(40)씨가 동료 남자 종업원의 성폭행을 피하려다 추락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것이다. 범인은 잡혔지만 보상도 치료비도 막막한 상태라는 것이다.

황망한 사건의 연속, 죽음과 주검, 느닷없음과 막막함 등 이주노동자 인권목회는 첩첩산중이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김 목사의 핸드폰에선 다급한 도움 요청이 끊이질 않는다. 그의 고단한 목회에 대한 악명이 교계 및 신학대학에 널리 알려지면서 기피 대상 사역지로 유명해졌고 결국 후배 양성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여전히 퇴역 못하는 야전군이다.

양재동 성폭행 추락사건 피해 가족들에게 사건 위임을 받은 그는 논현동 고시원 참사 피해 가족들을 모아놓고 장례 절차 및 보상, 장례 이후 대책 등에 대해 설명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언론사 및 유관기관의 전화 및 연락, 각계각층의 조문의 발길 등으로 분주했던 분향소는 자정이 넘으면서 겨우 한가해졌다.

유족들이 잠든 틈을 타 경과보고 및 장례식 절차 등에 매달리던 그는 새벽 3시 무렵 빈소 한쪽에서 노숙자처럼 쓰러져 잠들었다. 유가족들의 요청으로 대책위원회를 구성한 그는 사건 해결에 매달리느라 낮에는 녹초가 되다시피 뛰어야 했고, 밤엔 밤대로 분주해서 날밤 새우다시피 했다.

이주노동자 지하철 투신자살, 동사(凍死) 사건, 대형 참사 등이 발생하면 그는 귀가하지 못하거나 귀가했다가도 가정을 박차고 나와야 한다. 재외동포법 개정을 촉구하던 2003년 83일간 농성, 2005년엔 115일간 장기농성 때도 그랬고, 2007년 말 11일간의 교회난입 항의농성 때도 요지부동으로 농성장을 지켰다. 그의 의지와 투지는 강철 같지만 건강은 형편없다. 그는 당뇨병과 간질환 환자다.

이날 새벽 5시 무렵 일어났더니 그는 어느새 일어나 경과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는 1시간 30분가량 자고 깼을까? 할 말이 없었다. 그의 사역에 엉거주춤 동참하면서 두려웠던 것이 이런 거였다. 무모할 정도의 헌신과 저돌적인 추진력을 따라가기에는 나의 역량과 믿음은 턱없이 부족하다. 잘못 택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달아나지도 못한다. 전적으로 뛰어들지도 못하는 부끄러움과 절망이 수시로 나를 감싼다.

목자의 길은 가시밭길이라고 성경에서 읽었다. 선한 목자는 곤경에 처한 이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고 했다. 이날 새벽, 이주노동자의 고단한 십자가를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광야보다 더 끔찍한 인간 막장에 그를 붙박아 놓았구나! 불같은 성격(그의 한때 별칭은 깡패목사였다)의 그가 여럿의 질시와 물어뜯음, 자신의 부족함에도 십자가 집어던지지 않는 것은 빼도 못할 만큼 뼛속 깊숙이 못 박혔기 때문인가!

지난 2007년 말, 출입국사무소 단속반원들의 교회난입 사건이 발생하자 김해성 목사는 11일 동안 농성을 벌였다. 김 목사가 농성장 한쪽에 마련된 잠자리에서 통화를 하고 있다.
 지난 2007년 말, 출입국사무소 단속반원들의 교회난입 사건이 발생하자 김해성 목사는 11일 동안 농성을 벌였다. 김 목사가 농성장 한쪽에 마련된 잠자리에서 통화를 하고 있다.
ⓒ 조호진

관련사진보기


덧붙임 : 양재동 성폭행 추락사건 피해 여성 김씨는 사고 열흘 만에 숨졌다. 그리고 수술비 3천만원과 안치비용 해결 방도가 없어 삼성병원 안치실에 한 달 넘게 시신이 보관됐다. 가족 잃은 슬픔은 두 번째 문제고 막대한 병원비와 장례문제로 발을 구르던 유족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김해성 목사였다. 그가 발 벗고 나서면서 김씨 사망 사건은 산재처리 되었고 병원비 문제도 해결되었다. 그의 도움으로 장례를 무사히 치른 남편 남인수(41)씨는 중증장애자인 아들(15)이 기다리는 길림성 연변으로 지난 1월말 돌아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앤조이 및 블로그(tajin.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주노동자, #주검, #김해성 목사, #장례, #십자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