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가 오마이뉴스랑 인연을 맺은 건 지난 2004년 1월 경이었습니다. 지금도 궁금한게 어떤 경로로 오마이뉴스를 알게 되었는지 아무리 뜯어 보아도 알 수가 없습니다.

처음엔 회원으로 등록한 후 여러 편의 글을 올린거 같은데 모두 생나무에 걸려 있더군요. 오마이뉴스가 원하는 모양새가 있을 텐데 나는 그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냥 무턱대고 '사는이야기'를 써 올릴 뿐이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날 '원고료'를 클릭했더니 2000원이 사이버 머니로 올라와 있었고 올린 글 한편이 '잉걸'로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기쁨은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노조 활동 등으로 바쁘게 보내다보니 오마이뉴스랑 거리가 생겼고 내 마음에서 잊혀져 갔더랬습니다. 그러다 다시 2006년 1월경 우연찮게 오마이뉴스를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꽤 흐른 후라 나는 내가 오마이뉴스에 회원 등록된 줄도 모르고 회원 가입을 시도 했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해보니 뭐라 나왔는지 어렴풋이 기억나는게 '이미 등록된 회원입니다'고 하는 글박스가 떴던 거 같네요. 너무 오래된 일이라 회원 아이디와 비밀번호도 다 까먹고 있었거든요. 다시 절차에 따라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찾아서 다시 들어가 보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오마이뉴스 측에서 장기간 비활동 회원임에도 안 짤랐더군요. 그래서 다시 사는 이야기란에다 글을 올리기 시작 했습니다. 생나무, 생나무, 생나무… 계속 생나무가 되다보니 나중엔 오기가 발동하더군요. 잉걸로 채택될 때까지 글감만 있으면 써 올렸습니다. 계속 써 올리다 보니까 잉걸로 채택되는게 생기고 어떤 글에 대해서는 버금이나 으뜸으로 또 오름으로도 채택이 되었습니다. 그때 기쁨이란… 그리고 지난해 봄 어느날 전화가 왔었습니다.

"오마이뉴스입니다. 변 기자님이 이번달 뉴스게릴라로 뽑혔습니다."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전화일까요?

오마이뉴스 회원 게시판에 가보니 진짜로 뉴스게릴라로 뽑혀 있었고 사이버머니도 상금으로 들어와 있었습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이런 기분 좋은 일이 다 일어나다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날 이후부터 글쓰는 열정이 생긴듯 합니다. 꾸준히 글감을 찾고 글을 올렸습니다.

지성수 목사님 쪽지 받다

직장과 가정생활 속에서 생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지속적으로 올렸고 어떤 글은 채택의 단맛을, 어떤 글은 생나무의 쓴 맛을 보았습니다. 생나무 글에 대해서는 '뭔가 부족하겠지'하고 생각하였고 잉걸이라도 채택된 글에 대해서는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어느 언론사가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사는 하류 노동자의 글에 귀 기울여 주겠습니까. 그러던 중 작년 초여름 때던가요. 오마이뉴스에 들어가보니 쪽지가 하나 와있었습니다.

"울산에 사는 그 변창기 맞는가? 나 지성수 목사야. 반갑네. 시간나면 우리 카페 한번 들르게나. 다음 카페에 '시드니 사랑방 모임'이라고 치면 된다네."

아마도 오래 전인거 같습니다.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말씀하실 때 찍어 놓으신거 같네요. 시드니사랑방모임 카페에서 가져 왔습니다.
▲ 지성수 목사님 아마도 오래 전인거 같습니다.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말씀하실 때 찍어 놓으신거 같네요. 시드니사랑방모임 카페에서 가져 왔습니다.
ⓒ 시드니사랑방모임카페

관련사진보기


지성수 목사님?

나는 단박에 카페를 찾아 들어가 가입하고 인사를 드렸지요.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지성수 목사님은 당시 서울 어느 지역에서 빈민목회를 하고 계셨고 나는 울산에서 노조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젊은 노동자 하나가 작업 중에 기계 롤에 팔이 빨려 들어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때 나도 옆에서 일하고 있어서 그 사고를 목격하게 되었지요. 안전과에서 와서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고 사고 바람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되었고 그가 고아로 살아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엾은 생각이 들어 그를 돕고자 발벗고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연찮게 연결된 분이 지성수 목사님이셨지요. 젊은 노동자는 곧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으나 팔과 손까지 뼈와 근육이 파열이 심해 다친 손은 거의 노동력이 상실되는 장애가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보상문제 등에 대해 상담 해보려고 무턱대고 서울로 지성수 목사님을 찾아가 도움을 호소한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님도 무척 안타까워하며 물심양면 잘 도와 주셨습니다. 무척이나 고마웠습니다.

그 후 가끔 연락을 드리며 지내다가 먹고사는 일에 때문에 연락을 못 드린 것입니다. 늘 고맙고 궁금했는데 15년만에 오마이뉴스를 통해 다시 뵙게 된 것입니다. 다시 뵙게된 지성수 목사님은 가족이 모두 호주 시드니로 이민가서 살고 계셨습니다. 연세가 꽤 되셨을텐데 택시 운전을 하며 정정하게 생활하시는게 보기 좋았습니다.

지난해 미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이 불타오를 때 호주에서 촛불 모임을 주도하기도 하셨습니다. 어느 날 카페에다 내 공간도 마련해 주셔서 가끔 사는이야기를 간혹 올리고 있지요.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지성수 목사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박의일 형님의 쪽지

오마이뉴스에 글을 올리면서 재밌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네요. 고맙게도 원고료를 지급해 주어 우리 가족을 기쁘게 해줍니다. 원고료가 모이면 그것을 찾아 가족 회식을 합니다. 모두 즐거워 한답니다. 또한, 오마이뉴스 서울 본사에서 내게 가끔 글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어떻게 써야 할지 솔직히 난감하지만 고맙기 그지 없답니다. 내 글을 인정해 주시는거 같아 기쁘기도 하구요. 또, 오마이뉴스 기자대회 등에 초대되어 색다른 체험을 하고 좋은 인연을 만나기도 하고 한때 뜻 깊은 인연이었던 분을 20여년만에 재회하기도 하더군요. 오마이뉴스라는 인터넷 매체가 이리도 다양한 기쁨을 줄지 미처 몰랐습니다.

"화음노동자 변창기 맞나? 나 박의일 형이다. 연락 기다린다."

작년 가을쯤으로 기억됩니다. 오마이뉴스 쪽지함에 또 한개의 쪽지가 와있었습니다. 박의일 형님은 현대중공업 설계부서에서 여짓것 다니고 있는 나보다 몇 살 위 형님입니다. 20여년전 내게 클래식을 알게 한 고마운 분입니다.

전원주택 놀러 갔을 때 들려 주고 싶은 음악이 있다며 작업 중입니다.
▲ 박의일 형 전원주택 놀러 갔을 때 들려 주고 싶은 음악이 있다며 작업 중입니다.
ⓒ 변창기

관련사진보기


박의일 형님은 오디오 전문가로 통할 정도로 그 분야에 폭넓은 학식을 갖춘 분으로 평가 됩니다. 시골 전원주택을 방문하고 오마이뉴스에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집에 가보면 고등학생 시절부터 모아온 엘피 판이 3000여장이나 있습니다. 또한 오디오 전문가 답게 독일제 오디오로 조립된 독특한 오디오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음악과 오디오에 대한 주제라면 밤새 대화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손재주가 탁월해서 작은 소품가구 정도는 손수 만들어 사용하더라구요. 이 분도 내겐 참 소중한 분인데 노조활동과 결혼 그리고 먹고살기 바빠 15년 간 소식이 끊겼다가 오마이뉴스를 통해 다시 만나게 되었고 요즘은 자주 왕래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참 대단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글씨 맞네요. 20년 넘은 편지를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다니 참 기쁩니다.
▲ 필자가 박의일 형님께 보낸 편지 한장 제 글씨 맞네요. 20년 넘은 편지를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다니 참 기쁩니다.
ⓒ 박의일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때문에 생긴일' 응모글



태그:#지성수, #박의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간해방 사회는 불가능한가? 노동해방 사회는 불가능한가? 청소노동자도 노동귀족으로 사는 사회는 불가능한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