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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초, 우리 팀은 모두 태국의 시골마을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갈 짐을 싸야할 시기가 실감나기 시작했다. 그렇다. 우리는 이제 돌아가야 했다.

 

"글쎄요. 그냥 잘 살았는데요."

 

두 달여의 기간, 꼼짝없이 왕리앙 마을에서 살다나오니 현지 사람들도 제법 놀란 듯 하고, 한국에서 여러 사람들의 관심도 있었다. 무엇보다 열악한 환경에 대한 걱정과 무엇인가 많이 배우고 왔을 거란 기대들이 중첩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짧은 시간 동안 '어땠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던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거기에 대해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글쎄요. 그냥 잘 살았는데요"를 반복할 뿐이었다.

 

마을에서의 삶은 특별하지 않았다. 조금 불편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삶을 불편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그저 문명의 이기 혹은 혜택이 시시때때로 그리워질 때가 있었다.

 

벌레가 없는 곳, 밤새 닭이 울지 않는 곳, 집 터가 평평한 곳, 화장실이 쾌적한 곳. 뭐 이런 식의 욕구들이 시시때때로 내 주위를 감싸긴 했지만 내 삶이 불편했던 것은 아니다.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그 공간 속에서 어우러져 버렸기 때문이다.

 

무엇을 배웠을까? 이것도 참 앞뒤가 맞지 않는 질문이었다. 난 그저 들어가서 잘 살다 나왔는데 배움을 논하려니…. "사는 게 다 그렇죠!"라고 말하기엔 내 나이가 너무 어리고 그저 잘 살았다는 말 밖엔 할 말이 없었다.

 

사람들은 나의 그런 발언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듯싶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태국 정도 되는 나라는 아무리 낙후된 지역이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삶의 고난이 기다리지도 않고, 요즘들어 이야기하는 '대안적인 삶' 혹은 '공동체로의 회귀'의 모범 답안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된 이유는 아시아에 대한 평범한 한국 사람의 편견이 자연스레 깨지고, 상호 어울리면서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온전히 이해했다는 것도 거짓말, 내가 태국을 알았다는 것도 거짓말, 그들과 내가 하나가 됐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그저 친구 정도가 되어서 잘 살고 나왔다는 게 내겐 참말인 것이다.

 

 

"잘 살았고, 재미있었고, 더 긍정적으로 변하고"

 

샨칸팽 YMCA(치앙마이 지역에 있는 치앙마이 YMCA 소속 지역 YMCA)로 복귀하자 우린 몇 개의 일정을 더 소화하고, 과제에 매진했지만 생각할 시간이 많아졌다.

 

"고, 넌 생각이 많아. 이젠 정리 좀 해야겠지."

 

치앙마이 YMCA 피페 매니저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건넨 이 말을 곱씹어봤지만 도대체 정리할 게 없었다. 잘 살았고, 재미있었고, 원래도 긍정적인 성격이 더 긍정적으로 변한 것 같은 느낌만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 삶 속에 희로애락이 있고, 그 삶이 이제까지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태국이 날 너무도 따뜻하게 품어준 것 같았다.

 

"야, 태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너처럼 그렇게 생각할까?"

 

출국 전 친구에게 날라온 편지 말미에 써진 이 말이 참 가슴 아팠다. 날 아프게 하고, 날 눈물나게 하는 이들에게 그리도 매몰찬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 같은데, 아시아의 수많은 나라에게 우리는 그런 행위를 큰 문제의식 없이 행하고 있는 것이다. 순간 내가 느끼는 이런 감정들이 그리도 부담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랄까. 날 친아들이라 생각하노라 언제나 외치는 '피난(샨칸팽 YMCA 스텝)' 아주머니가 밥먹으로 부르는데, 난 왜 그렇게 염치가 없어졌을까.

 

 

출국하는 날, 웃는게 그렇게 고된 순간들

 

스태프들과 다시 보는 날 열자고 타임캡슐을 묻고, 성대한 환영파티가 끝났다. 비행기 시간 탓에 저녁이 다되서야 도착한 공항.

 

고작 반년 남짓 살았을 뿐인데 무슨 짐이 그렇게 많은지. 대부분 짐이 수화물 중량 초과로 문제를 겪자 피페, 피푸(치앙마이 YMCA 스태프)가 달려들어 웃는 얼굴로 항공사 직원들을 살살 달랜다. 그 덕에 우리 입장에서 천문학적으로 나올 초과비용이 단 1원도 발생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제까지 만났던 스태프들이 한 무리, 고등학교 및 대학교 봉사자들이 한 무리. 그렇게 수십 명의 사람들이 공항에 운집하기 시작했다. 라온아띠 해외봉사단 2기 워크숍 때문에 한국에 입국하는 치앙마이 YMCA 페차린 부총장과 계속 일정 이야기를 했지만 여기저기 눈물 바다가 되고 부여잡는 그 속에서 웃음을 잃지 않는 게 여간 고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피툰(치앙마이 YMCA 스텝) 아저씨는 남자는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고 이미 공항 밖으로 나갔고, 고등학교 봉사자 아이들은 손으로 직접 새긴 열쇠고리를 건넨다. 피페는 "내 아들 언제 다시올래?"라며 내 어깨를 두드리고, 요 스태프는 "한국 가면 술을 진탕 먹는 거다"라며 웃어주었다. 그나마 페차린 부총장을 조만간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울면 말이지, 가면 그만이지만 남는 사람은 죽을 맛이거든."

 

군에 입대할 때 아는 선배한테 들은 말인데, 출국 게이트로 들어가는 그 순간이 왜 그리 군에 입대하는 기분과 흡사했는지 아직까지 모를 일이다. 다시는 그런 기분을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길, 한국에 가까워지자 점점 기내의 공기가 차가워짐을 느꼈다. 잘 살다왔는데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막중한 부담감이 느껴지는 이 삶, 그리고 해내야 할 과제를 한 움큼 안아들고 돌아오는 길, 감상에 젖어있을 시간이 없었다.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 멀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린 아직 귀국하지 않았다. 아니 귀국할 수가 없었다. 양심에 찔려서 벌려놓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KB-YMCA 라온아띠 해외봉사단 태국 팀은 2008년 8월부터 2009년 1월까지 태국 북부 일대에서 봉사활동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1월 20일 태국 팀은 귀국했고, 마지막 일정 중 여의치 않은 인터넷 사정 탓에 귀국 후 기사 몇 개를 더 송고합니다. 감사합니다.


태그:#라온아띠, #KB, #태국 , #YMCA, #해외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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