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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모두 '돈'을 외치고 살아가는데,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 나도 태국에 와서 '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정치도, 사회도, 교육도, 심지어 사랑까지도 돈에 좌지우지 되는 세상에서 홀로 옆걸음질 친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덧 태국 북부의 시골마을, 왕리앙을 떠나야 할 때가 다가왔다.

 

헤어짐을 조용히 준비하는 사람들

 

'타이룹('사진'이라는 뜻의 태국말), 타이룹!'

 

정확히 떠나오기 일주일 전부터 홈스테이 집 할머니는 날 보면서 '타이룹'을 외쳐댔다. 드릴 사진이 없는데도, 매번 같은 반응을 내가 보여도 계속 사진을 달라고 하셨다. 그 때마다 자기 자식들의 사진을 한 장씩 꺼내어서 보여주곤 했다. 그리고 사진첩 마지막에 몇 장 빈칸을 가리켰다.

 

그렇다. 내가 들어갈 자리였다.

 

누이(왕리앙 중학교 2학년, 홈스테이집 손녀)는 오토바이를 끌고 와서 어디 가고 싶은데가 없냐고 계속 물어봤다. 항상 하늘과 땅, 그리고 강으로 둘러싸인 왕리앙에서 갈 만한 곳이 없었지만 내가 호기심이 왕성하단 것을 알아채고 내게 배려를 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덕택에 대학생인 뱅크(누이의 오빠)는 내가 떠나오기 전날까지 오토바이 탓(?)에 그의 여자친구를 자주 보러 나가지 못했다.

 

펑 선생님과 능 선생님 탓에 MSN 메신저 아이디를 만들어야 했다. 그 둘은 반드시 한국에 놀러올거라며 어디어디를 구경시켜 줄 것인질 항상 물어봤다. 내가 앞으로도 공부를 10년은 더할 예정인 가난한 대학생이라고 말하면 걱정하지 말라면서 손사래 친다.

 

"걱정하지마. 우리 돈 모아놨어!"라고.

 

맥주값을 몇 십원씩 빼주는 슈퍼 아주머니, 한국의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아이들, 왕리앙 지역 전통의상을 사와서 입히는 동네 할머니들부터 끊임없이 악수를 청하는 동네 이장님까지.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나를 떠내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촌향도' 현상으로 익숙해진 듯, 그들의 모습은 자연스러웠다. 더없이 자연스러웠다.

 

 

"애 셋 낳고, 10년 후에 보자고!"

 

내가 태국에 와서 눈물을 보인 것은 딱 한 번, 공교롭게도 이 곳 왕리앙에서였다. 왕리앙은 두달여간 진행된 우리 스터디 트립(Study trip)에 첫 번째 장소였는데, 말 그대로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다른 팀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학교가 며칠간 우울해서 수업을 할 수도 없었다는 소리를 나중에 똔(치앙마이 YMCA 스텝)을 통해 건네 들을 수 있었다.

 

그 후, 난 어거지로 컨트롤을 하기 시작했지만 팀원들은 그렇지 않았다. 항상 만나고 헤어지는게 다반사인 일정에서 급속도로 우울해지고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심해지는 학교든 우리든 상호 좋을 것이 없었다.

 

"우린 떠나는 사람들인데, 울어서 사람들의 감정을 동요시키기보단 그래서 서로를 돌아보고 추억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고 나가는게 어떨까?"

 

이번엔 전체 일정에 반을 지낸 마을에서 떠나니 모두 문제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의 제안으로 우리는 캠프를 하고, 그 속에서 타임캡슐을 묻기로 했다.

 

"우리 다들 다시 온다고 이야기 하고 다녔잖아. 그럴거면 차라리 이 곳 사람들과 다같이 타임캡슐을 묻자고. 10년뒤에 다시 온다고 하고, 아이들과 선생님들과 함께 묻는거야!"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쏨싹' 교장선생님과 '펑' 선생님은 10년 후면 자신들은 꼬부랑 할아버지일 거라며 기한을 땡기면 안되냐고 우스갯 소리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그 타임캡슐에는 현재의 소감과 10년후에 이것을 꺼내보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 마지막으로 우리가 갖는 관계와 친구의 의미가 어떤지에 대해 적혀 들어가게 됐다.

 

타임캡슐을 묻는 날, 이런 것을 처음 해봄직했을 아이들이 생각보다 들떠있었다. '똥(왕리앙 중학교 1학년)'과 '못(왕리앙 중학교 3학년)'이 다가와서 이야기한다.

 

"애 셋 낳고, 10년 후에 보자고!"

"왜 셋인데?"

"고는 그럴꺼 같아서!"

 

엉뚱한 소리(?)를 듣고 우리는 10년 후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그렇게 덜컥 해버렸다.

 

 

다짐한 대로 잘 풀리지는 않구나

 

드디어 나가는 날 아침이 밝았다. 꼭두새벽부터 아침을 준비하는 홈스테이 집 할머니는 내가 떠나올 때까지 다행히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내가 태국으로 떠나온 후 많이 편찮으셨던 내 부모님에 대한 걱정만이 가득하셨다.

 

"고, 이거 내가 직접 짠건데 어머니 갖다 드리거라"

 

그렇게 난 태국 전통스타일 목도리를 받고 쭐레쭐레 학교로 향했다.

 

학교로 가는 길, 지난 달에 부인을 심장마비로 잃은 아저씨도, 동네에서 기도를 드릴 때 학교에서 자고 있던 날 보여줘야 한다며 애타게 찾아다니던 할아버지도, 돈 없어서 학교 못다니는 동네 청년도, 나한테 언제 다시 오냐고 매일같이 물어보던 아주머니도 모두 하나가 되어 외친다.

 

"촉디(행운을 빈다 정도의 태국말), 촉디!"

 

아마 이때 들은 '촉디'만으로 평생 난 불행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미 한 번 이별을 해본 탓일까? 아이들이 담담하다. 오히려 다가와서 어깨동무하며 10년후에 보자고 하고 갈려면 빨리 가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장난을 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조회시간에 우리가 단상에 서기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여자 팀원들부터 작별인사를 하기 시작할 때 울기 시작했다. 울지 말자 이야기했던 건 이미 깨졌을뿐더러 그 울음이 아이들에게 전이되어 함께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새 선생님들이 울기 시작했다. '쏨싹' 교장선생님 정도가 울음을 참는데, 그래도 명색이 팀장인데 약간 냉정해보여야 했다. 그 때쯤, 저 멀리서 유치원 아이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꽃을 한 송이씩 꺾어서 만든 꽃다발을 들고 날 여러모로 도와줬던 유치원 선생님과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애들이 8살이 되면 한 명씩 한국으로 보내겠다는 유치원 선생님의 쪽지를 받았고, 아이들이 안고서 내 곁을 돌고 돌았다. 난 웃어주었다. 마냥 웃어주었다.

 

여기저기서 눈물섞인 선물을 받아들고, 이제 슬슬 가야했다. 이미 울음바다가 난 곳을 수습하고 떠나야 했다. 우리가 간 뒤 며칠이나 이 학교가 우울해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고, 가야돼. 컨트롤, 제발 컨트롤!"

 

똔이 날 재촉했다. 그는 지난 번 왕리앙 마을에서 나온 뒤 학생들에게 계속 전화로 시달렸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붙여도 하나도 좋을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학교를 빠져나왔다.

 

 

내가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다시 온다는 믿음과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팀원 중 하나가 던진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대답한다. 그 답을.

 

"돈, 돈 하는 지긋지긋한 세상에서 우린 돈으로 되지 않는 일을 겪었으니까. 억만금을 싸들고 온들 지금 내가 겪은 일을 절대 겪을 수는 없으니까. 사람사는 게 그래. 이런 거, 돈으로 안될걸?"

덧붙이는 글 | KB-YMCA 라온아띠 해외봉사단 태국 팀은 2008년 8월부터 2009년 1월까지 태국 북부 일대에서 봉사활동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1월 20일 태국 팀은 귀국했고, 마지막 일정 중 여의치 않은 인터넷 사정 탓에 귀국 후 기사 몇 개를 더 송고합니다. 감사합니다.


태그:#라온아띠, #YMCA, #KB, #태국, #해외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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