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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아이들> 표지 사진
 <히틀러의 아이들> 표지 사진
ⓒ 지식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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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 히틀러!' 세상이 다 아는 나치식 경례다. 세계를 전쟁의 불구덩이로 몰아넣은 나치의 역사가 64년 전 막을 내린 후 이 경례를 다시 구경하리라고 상상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치의 망령은 여전히 독일을 배회하고 있으며, 당시 가장 큰 희생을 치른 러시아에서조차 이들이 배회하고 있다.

바로 나치를 추종하는 신나치 '히틀러의 아이들'이 오늘도 독일과 러시아 등지에서 버젓이 활보하고 있다. 그들은 외국인 증오를 앞세워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하며 '하일 히틀러!'를 외친다. 악몽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수전 캠벨 바톨레티가 쓴 <히틀러의 아이들>은 그 악몽의 시간을 생생히 파헤친 책이다.

나치가 되어 간 아이들

이 책을 쓴 수전 캠벨 바톨레티는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과 소설, 논픽션을 써 온 작가다. 그녀가 이 책을 쓴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60여 년 전 카를 페텔이 쓴 <21세 이하의 나치>라는 글 속에 나치가 "정치적 적극성을 가진 청년들에게 편승해 권력을 잡았다"는 문구를 몇 년 전 발견했던 것이다.

그녀는 도서관과 박물관, 공문서 보관서 등을 다니며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젊은이들과 어린이들까지 나치의 도구, 전쟁의 도구로 세뇌시키고 있었다는 무수한 증거들이 당시에 있었음에도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언론인, 정치가들의 무관심한 반응을 보고선 그녀는 깜짝 놀랐다. 과거 히틀러청소년단 활동을 했던 사람들까지 수소문해 찾아다니며 증언을 모은 그녀는 2년에 걸친 노력의 결과물로 이 책을 펴냈다. 지은이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이 책은 우리의 세계를 영영 변화시켜 놓은 12년간의 파괴적인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젊은이들이 맡았던 역할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증오와 살인, 타인에 대한 우월감을 가르쳤다는 사실로부터 새로운 이해를 끌어내려는 시도다. 결국 히틀러청소년단은 나치로 태어난 게 아니었다. 그들은 나치가 되어 갔다." (위의 책, 196쪽)

이 책은 아돌프 히틀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를 추종했던 청소년들에 관한 이야기다. 히틀러는 이런 청소년들을 자신의 야욕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철저하게 이용했다. 그는 자신의 의도를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청소년들에게서 시작하련다. 우리 나이 든 이들은 기력이 소진됐다. 하지만 저 훌륭한 청소년들! 세상에 저보다 멋진 이들이 어디 있으랴. 이 모든 남성들과 소년들을 보라! 얼마나 좋은 도구인가! 이들과 함께라면, 나는 새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위의 책, 7쪽)

교육, 나치의 틀로 찍어내다

1934년 독일 청소년의 날에 포츠담에서 찍은 이 사진에서 나치 돌격대(SA) 제복을 입은 한 아이가 손을 들어 나치식 경례를 하고 있다.
▲ 나치식 경례를 하고 있는 한 아이 1934년 독일 청소년의 날에 포츠담에서 찍은 이 사진에서 나치 돌격대(SA) 제복을 입은 한 아이가 손을 들어 나치식 경례를 하고 있다.
ⓒ 프로이센 문화재단 시각자료 보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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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1926년 히틀러청소년단(Hitler Youth)이 결성되었다. 처음에는 6천여 명 정도의 단원으로 출발했다. 히틀러가 수상으로 지명된 1933년에는 단원수가 무려 230만 명에 달했다. 그 후 단원수가 급격히 늘어나 1938년에는 700만 명을 넘어서게 된다. 이들은 후방에서 전쟁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말기에 가서는 전투에 직접 참가하기도 했다.

청소년들을 도구화하는 데 있어서 히틀러가 가장 중요하게 본 것은 바로 교육이었다. 이 대목에선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교과서 개정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는 한국사회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근현대사 교과서부터 지금은 도덕 교과서, 사회 교과서까지 개정 작업이 시도되고 있다. 정부와 뉴라이트 세력이 교과서를 편향적으로 개정하는 데 열을 올리는 것은 이러한 '도구적 관점'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히틀러에게 교육이란 한 가지 목표밖에 없었다. 어린이들을 훌륭한 나치의 틀로 찍어내는 것이었다. 나치는 집권하자마자 '국립학교'라고 불리는 공립학교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낡은 교과서를 던져 버리고 새 교과서를 도입했다. 오로지 나치가 승인한 사상만 가르치도록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교과 과정을 다시 썼다." (위의 책, 49쪽)

전쟁이 끝나고 히틀러청소년단 지도자들도 뉘른베르크에서 재판을 받았다. 최고 지도자였던 발두르 폰 시라흐는 법정에서 "신과 독일 국민 앞에 제가 유죄임을 밝힙니다. 독일 청소년들을 수백만 명을 살해한 살인자로 교육한 점에 대해 저는 유죄입니다"라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그는 반인륜적 범죄행위로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뉘른베르크 법정은 히틀러청소년단 단원들을 단죄하지 않았다. 그들이 나치에 의해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에게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여주는 등 탈나치화를 위한 여러 노력들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들이 범죄적 동기를 위해 복무한 노예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큼 나치의 세뇌 작업은 철저했다.

저항을 꿈꾼 청소년들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청소년들이 나치의 세뇌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40년 중부 독일의 모링겐에는 청소년 저항 운동가들을 수용하는 특별 강제 수용소까지 만들어졌다. 불과 열일곱의 나이였던 헬무트 휴베너는 반나치 전단을 돌린 혐의로 1942년 10월 27일 참수형에 처해졌다.

"1942년 여름, 궁지에 몰린 유대인들의 소식을 듣고 한 무리의 용감한 뮌헨 대학생들이 행동을 개시했다. 대중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그들은 나치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들춰내는 전단지 수천여 장을 뮌헨을 비롯한 남부 독일 마을에 돌렸다. … 학생들은 스스로 '백장미단'이라 칭했다. 그 백장미단을 만든 이들 가운데는 한스 숄도 있었다. 전쟁에 신물이 나고 나치의 잔혹상에 괴로워하던 한스는 터놓고 말할 용기와 한 대의 복사기를 찾아냈다." (위의 책, 129쪽)

대학생이 되기 전 히틀러청소년단 활동에 염증을 느꼈던 한스 숄도 동료 학생 두 명과 함께 나치를 비판한 전단지를 돌린 혐의로 1943년 2월 22일 인민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곧바로 참수되었다.

백장미단은 숄 남매를 비롯한 뮌헨 대학생들이 주도한 비밀 지하 조직이었다. 그들은 1942년 6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주로 뮌헨과 독일 남부지역에서 나치에 반대하는 전단을 배포하면서 용감히 행동했다. 당시 수많은 히틀러의 아이들이 앵무새처럼 히틀러 만세를 외칠 때 그들은 꽃다운 목숨을 바쳐 저항했다.

백장미단에서 활동하다 처형당한 한스 숄의 누나이자 소피 숄의 맏언니인 잉게 숄은 나치 치하에서도 저항운동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기억과 남아 있는 자료들을 토대로 두 동생의 일생과 백장미단의 활동을 책으로 엮었다. 그 책이 바로 1970~80년대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필독서처럼 여겨졌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원제 '백장미단')이다.

우리는 영원히 너를 기억할 것이다

뻬쩨르부르크에서 파시스트에 의해 살해된 러시아의 한 대학생을 추모하는 글귀와 꽃, 그리고 그의 사진
▲ 파시스트의 살인 테러 현장 뻬쩨르부르크에서 파시스트에 의해 살해된 러시아의 한 대학생을 추모하는 글귀와 꽃, 그리고 그의 사진
ⓒ 최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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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초였다. 당시 나는 핀란드 헬싱키로 가기 위해 뻬쩨르부르크 시내 중심의 간이 버스정류소로 향했다. 모스크바 기차역 건너편에 있는 그곳에서 버스표를 끊고 나서 주변을 돌아보니 벽에 큰 글씨로 "우리는 영원히 너를 기억할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고 추모사진이며 꽃들이 놓여 있었다.

마침 이 사진 속 주인공을 잘 아는 것처럼 보인 두 남녀 대학생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들렀다. 그들은 간단히 묵념을 하고 우두커니 서서 비장함이 흐르는 슬픈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조심스레 다가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사진 속 주인공은 대학생인데, 바로 그 자리에서 스킨헤드로 추정되는 극단적 인종주의자들에게 칼로 난자당해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그 청년은 반파시즘, 반인종주의 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러시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표적이 된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울분을 토하며 매우 격정적인 어조로 반파시스트 운동의 긴박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두 달 뒤인 6월 말 다시 그곳에 들를 기회가 있었다. 벽에 쓰인 글씨는 거의 다 지워지고 사진이며 꽃들도 놓여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글귀는 여전히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 또한 영원히 당신을 기억할 것이다'라고 마음에 새기며 자리를 떴다.

파시즘은 그렇게 도래한다

러시아 일간 <이즈베스찌야> 2006년 4월 3일자 신문에 실렸던 한 반파시스트 운동가의 인터뷰 내용 중 아직도 기억하는 대목이 있다.

"1930년대 독일에서 일군의 청년들이 뮌헨의 맥주 집에서 회합을 할 때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파시즘은 그렇게 도래했던 것이다."

값비싼 대가를 치른 독일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본 러시아, 대부분의 가정 혹은 그 친지 가운데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으로 인한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러시아에서조차 히틀러의 추종자들이 활개를 친다는 것을 상상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사이, 때론 상상하지 못한 결과가 도래하는 것이 역사다. 때문에 우리는 경계를 늦출 수 없으며 촉수를 곤두세워야 한다. 그것만이 히틀러의 아이들을 다시 만나지 않을 수 있는 길이다.

덧붙이는 글 | 최광은 기자는 사회당 대표입니다. 이 기사는 <프로메테우스>, <울산노동뉴스>에도 보냈습니다.



히틀러의 아이들

수전 캠벨 바톨레티 지음, 손정숙 옮김, 지식의풍경(2008)


태그:#히틀러, #파시즘, #독일,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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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비교정치, 한국정치 등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연세대학교 복지국가연구센터에 적을 두고 있다. 에식스 대학(University of Essex, UK)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두에게 기본소득을>(박종철출판사, 2011) 저자이고,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asic Income Earth Network) 평생회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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