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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김치'가 브랜드 김치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가족 맛'은 '외식 맛'으로 바뀌고 있다. 그만큼 서민들이 접할 수 있는 손맛 가짓수는 줄어드는 추세다. 상대적으로 인간미(人間味)에 대한 그리움도 커지고 있다. 꺼벙이, 고인돌, 맹꽁이 서당 등 추억의 만화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는 사람이 적지 않은 현상도 그 중 한 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만화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작품에 나타난 인간미의 소중함을 재확인하고, '맛'의 현재적 의미를 모색하는 기획시리즈 '만화미(味)담 오미공감'을 마련했다. 독자님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편집자말]
바지저고리 만화가 이두호 선생. "민초들의 삶을 만화의 공간 속으로 끌어들여 한국만화의 지평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거나, 그의 작품은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 된장찌개처럼 친근하고 정겹고 구수하다는 평가" 등을 통해 드러나듯, 그는 가장 한국적인 만화가로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다. 꼭 만나야 할 작가로 내심 점찍은 것도 당연했다.

첫 번째 이두호의 벤허 이야기 '열네 번 본 영화'

만화가 이두호 선생
 만화가 이두호 선생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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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문제가 있었다. 주제는 '가장 한국적인 만화'에 꽂혔는데, 가장 잘 아는 소재는 '로마 저고리'에 머물러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 읽었던 선생의 <벤허>만 새록새록 떠올랐다. 우정을 무참하게 배신한 멧살라 앞에 집정관 양아들로 벤허가 컴백하는 장면의 짜릿짜릿함이 지금도 생생하다.
제대로 읽은 선생 작품이 없기도 했다.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허영만이나 이현세란 '이름'을 편식했고, <머털도사>(1985)가 뜰 때는 머리통이 너무 굵어버린 후였다. 다 아는 이야기 <임꺽정>(1991)도 굳이 만화로 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었다. '민초'나 '한국적'이란 말에 그저 혹했을 뿐, '내 인생의 이두호 만화'는 <벤허>에서 꽉 막혀 있었던 셈이다.

그나마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 것은 '이두호 인생의 영화'가 <벤허>란 것을 알면서부터.

선생은 <벤허>를 "그냥 아홉 번, 그림 때문에 다섯 번"이나 봤다고 소개했다. 도합 열네 번이나 보고 대사까지 외울 정도였다고 하니, 나중에 '단관'으로 구경한 영화보다 선생의 만화가 더 생생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던 셈이다. 선생은 2005년 발간된 그의 자서전 <내 인생의 영화>에서 <벤허>를 이렇게 추억한다.

"나는 고등학교를 야간에 다녔다. 가끔 전기가 나가고 석유램프나 촛불로 공부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선생님께서 곧잘 이야기를 해주곤 했는데, 평소에 별 말이 없었던 내가 이야기를 자청하고 나섰다. 물론 <벤허> 이야기였다 …… 까만 교복의 여고생이었던 마누라와도 세 번이나 봤으니 영화장면은 물론 대사까지 줄줄 외울 정도가 되었다. 나중엔 류 웰리스가 쓴 소설 <벤허>까지 사봤다."

두 번째 이두호의 벤허 이야기 '가난 때문에 벤허를 팔다'

가난이 만들어낸 '벤허 이야기'도 있다. 오직 화가가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홍익대학교 서양학과에 진학했지만 "하루 하루가 전쟁이었다"고 하는 서울 유학생 시절. 선생은 자서전 <무식하면 용감하다>(2006)를 통해 춥고 배고팠던 그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마음의 양식도 좋지만 몸의 양식이 더 절박했다. 쌀을 살 돈이 없어 굶던 끝에 책을 한 권씩 팔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내가 애지중지하던, 열 네 번이나 본 영화 <벤허>의 원작소설까지 팔아먹었다. 그렇게 한 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닥쳐왔다."

제대 후 닥친 '또 다른 고비'는 더욱 높았다. 캔버스를 직접 만들고, 유화 물감이 없으면 페인트를 섞어서라도 그림을 그릴 수 있었지만, 복학까지 하기는 어려운 사정이었다고 한다. 무얼 해서 먹고 살 것인가. 그 대답은 중학생 시절 자신의 이름으로 만화를 출간했던 경험을 되살리는 것뿐이었다.

본격적인 만화가 생활, 형편이 풀리기 시작했다. "회사 다니는 친구 월급보다 서너 배는 많을 정도"로 수입이 괜찮았다고 한다. 고양이 세수로 목이 늘 새까만 '까목이'를 등장시킨 <폭풍의 그라운드>나 야구하는 스님 '팔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바람처럼 번개처럼> 등 잇따라 히트작을 내면서 '이두호'란 이름은 스타 작가군에 당당히 포함됐다.

이두호 선생의 '벤허'. 선생은 자서전에서 이 장면을 통해 창날조차 그릴 수 없었던 '사전검열 시대'를 회고하고 있다.
 이두호 선생의 '벤허'. 선생은 자서전에서 이 장면을 통해 창날조차 그릴 수 없었던 '사전검열 시대'를 회고하고 있다.
ⓒ 이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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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이두호의 <벤허> 이야기 '터닝 포인트'

'문제'는 '만화가 이두호'를 스스로 인정할 수 없는데서 비롯됐다. 10년 가까이 만화를 그렸으면서도, 어디까지나 만화는 오로지 '생계수단'이었다. "돈이 어느 정도 생기면 회화를 해야겠다는 화가의 꿈을 가슴속에 불씨처럼 간직한 상태"였다. 이런 '교착 상태'에서 나온 작품이 또한 바로 <벤허>였다.

"<벤허>는 만화를 계속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정말 갈등이 심할 때였다. 마지막으로 <벤허>한다고, 연재 시작하면서 잡지 담당자에게 말했었다. 이거 끝나면 만화 더 그릴지 안 그릴지 모른다고 했다. 이렇게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10월 29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실제로 선생은 '더 이상 못했다'. 자신의 만화는 친구에게 부탁하고, 정작 본인은 "드디어 만화 아닌 그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마음 가는 대로 전구, 권투, 철조망, 기차레일, 평행선 등을 미친 듯이 그렸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선생은 "그림에 미칠 수 없는 나"를 깨달았다고, 그랬더니 비로소 만화가라는 '내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 고단하고 어렵게 살던 사람들,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휘말려 어쩔 수 없는 고통을 겪지만 바른 방향으로 이끌려고 애쓰는 사람들, 아름다운 사람들, 추한 사람들, 양반, 노비, 비렁뱅이, 기생, 농민, 화적, 보부상,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이 다양하게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다." (그의 자서전에서)

이두호 선생의 독대 '관상론'. 선생은 "독대가 못생겼다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 관상책도 하나 샀다"고 한다.
 이두호 선생의 독대 '관상론'. 선생은 "독대가 못생겼다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 관상책도 하나 샀다"고 한다.
ⓒ 이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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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하지 않는 만화가 이두호가 그리운 이유

이두호의 '벤허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지금 하고 있는 일과 내가 하고 싶은 일, '두 마리 토끼' 사이에서 선생은 한 바탕 살풀이를 통해 <벤허>를 터닝 포인트(전환점)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대표하는 캐릭터 중 하나인 '독대'를 탄생시킨다. 잘 생긴 벤허 대신 그리기 시작한 하필 못 생긴 독대.

"처음 독대를 등장시켰을 때 왜 이렇게 못생기게 그렸냐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편집장도 원고를 들고 하는 말이 '이게 주인공인가요? 왜 하필 주인공을 못생기게 그렸습니까?'하고 물었다. 내가 답하길 '못 생긴 놈이 잘 생긴 놈을 이기며 더 재밌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못생긴 사람이라고 세상에 좋은 일 못하라는 법도 없고, 잘나지 못하라는 법도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그의 자서전에서)

그래서일까. 선생은 '잘난 척'을 하지 않는다. 자서전을 통해 "일본만화를 그대로 베낀 작품도 했었다"고 밝히는가 하면, '살풀이' 2년 동안 "스토리는 내가 쓰고 그림은 친구 한희작씨가 그렸다"고 털어놓기까지 한다. 대신 '적당 적당히' 양보하지도 않는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검찰에 맞서 '절필'까지 선언했던 작가로서의 고집도 가감 없이 내비친다.

위선이 판치는 요즘, 독대를 닮은 만화가 이두호 선생이 더욱 그리운 이유들이다.

'천국의 신화' 사건 당시 법정 증인으로 출두받은 이현세 선생과 함께. 출두비를 들고 있는 모습을 통해 당시 상황을 희화화한 '기념 사진'이다.
 '천국의 신화' 사건 당시 법정 증인으로 출두받은 이현세 선생과 함께. 출두비를 들고 있는 모습을 통해 당시 상황을 희화화한 '기념 사진'이다.
ⓒ 이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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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독대를 닮은 이두호의 인터뷰를 담은 두 번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태그:#독대, #만화, #이두호, #임꺽정, #벤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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