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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매력과 한계

 

인천은 매우 매력적인 도시이다.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항구도시의 특성상 인천에는 여러 문화가 섞여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가장 먼저 근대 문물을 받아들인 곳으로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근대의 흔적이 곳곳에 새겨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인천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대학원 졸업 이후 선배의 소개로 인천문화재단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였다. 난 그곳에서 인천 문화공간과 관련된 자료를 취합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인천 시내를 구석구석 돌아다녀야만 했었고 덕분에 인천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인천이라고 하면 나는 으레 주안의 '인천 큰아버지'를 떠올리거나, 어렸을 때 가끔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갔던 자유공원을 회상했다. 그런 내게 인천이라는 공간을 재발견 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긴 것이다. 게다가 취직한 뒤 회사의 발령까지 인천지사로 나니 인천에 대한 관심이 고취될 수밖에.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근대문물이 처음 들어온 시공간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비록 서울과 근접했지만 오랫동안 그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지니고 있는 도시 인천. 특히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내게 인천은 그 자체로 하나의 텍스트였다. 인천 곳곳에 남겨진 근대건축물도 건축물이었지만, 오래 전에 형성된 차이나타운이 그대로 존재하는 인천은 아직 끝나지 않은 근대의 실험장이요,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힘들의 각축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이와 같은 인천의 매력을 아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역사와 지리에 도통 관심을 가지지 않는 우리의 교육도 문제겠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천은 다른 의미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인천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그 하나는 서울과 근접하여 산업이 발달한 연안부두가 있는 큰 항구도시로서의 정체성이요, 또 하나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진 곳으로서 '반공'이란 키워드가 여전히 중요한 도시로서의 정체성이다.

 

산업이 발달한 항구도시로서의 정체성은 인천이 바다와 맞닿아 있는 한, 그리고 서울이 그 규모를 유지하는 한 계속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과도 같다. 시대의 부침에 따라 양상은 변할 수 있어도 인천은 결국 세계 여느 항구도시들처럼 개방적이고 다문화적일 수밖에 없으며, 대규모 소비지 서울을 옆에 두는 한 인천의 산업은 다른 곳보다 발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인천의 또 다른 키워드 반공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산물로서 인천의 항구도시로서의 정체성과는 달리 매우 가변적인 성격을 띤다. 역사적 사실이 변하지는 않지만, 시대에 따라 그 해석과 중요도는 변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반공은 여전히 인천을 규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아직 우리 사회가 분단의 상처를 채 치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증거는 인천 곳곳에 존재한다. 아직 인천의 도심 한 복판에는 1개 사단이 자리하고 있으며, 아직도 맥아더 장군 동상은 그 이름마저 거룩한 자유공원에서 인천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다.

 

이 밖에도 인천에는 여러 증거들이 존재하는데 9월의 어느 토요일 내가 들린 송도유원지 앞의 '인천상륙작전기념관'도 그 중의 하나였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의 기념비들

 

 

내가 처음으로 인천 송도를 간 것은 송도유원지에서 열린 회사 체육대회 때문이었다. 인천으로 발령 난 지 한 달도 안 되었던 때라 나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기보다 자주 먼 산을 바라보았는데, 그때 눈에 띈 것이 바로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이었다. 나지막한 구릉 앞에 떡하니 서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기념관.

 

본래 인천상륙작전이 지금의 월미도쯤에서 일어났던 터라 그 기념관을 왜 하필 이곳 송도에 지었을까 고민하던 내게 송도유원지의 유래는 하나의 단서였다. 송도 유원지가 한국전쟁 당시 미군부대가 주둔했던 바로 그곳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래서 송도에 기념관을 세운 것은 아닐 테지만, 단순히 인천상륙작전 하면 연안부두 쯤을 떠올리던 내게 송도 유원지의 유래는 생각보다 '반공'의 키워드가 인천 곳곳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9월의 어느 토요일에 찾아간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의 풍경은 매우 평화로웠다. 몇몇 부부들은 유모차를 끌고 전시관 앞에 앉아 나른한 햇볕을 쬐고 있었으며 아이들은 그 거대한 화강암 벽 사이에서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있었다.
 
최근 국사 교과서 좌편향 문제 등으로 매우 시끄러운 우리의 현실과 달리, 반공 이데올로기의 첨병인 기념관이 오히려 한가로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아이러니란.

 

주차장에는 1989년 미국 농무성으로부터 종자를 받아 14년 동안 키운 뒤 2003년 인천상륙작전 53주년을 맞아 심게 되었다는 맥아더장군 나무가 자리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가 전쟁영웅 맥아더를 기념하기 위해 1945년 위스콘신 주의 어느 수려한 나무를 맥아더장군 나무로 지정했다는 사실도 우스웠지만 굳이 그 나무의 종자를 받아와 오랜 시간을 키운 뒤 정성스레 심은 우리 정부의 행위 역시 한 편의 코미디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기념비가 위엄을 갖추기 위해선 범인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어야 하기 때문일까? 무슨 험한 산 마냥 가파르기 짝이 없는 기념관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 끝에는 하늘을 찌를 듯 한 동상과 기념탑이 무슨 대단한 상징인 냥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이밖에도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는 여느 기념관과 마차가지로 볼 것 하나 없이 거대하기만 한 기념물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특히 눈에 띠는 것은 그 정체성을 분명히 하겠다는 듯 전시되어 있는 무기 몇 점이었다. 인천 앞 바다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늠름하게 서있는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군사 무기들.

 

여기에다 "어떤 전쟁도 일어나면 안 되고 이를 위해서는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평화통일 이루어야 한다"는 전두환 대통령의 말을 새긴 비석까지 보고 있으려니 과연 내가 몇 년도를 살아가고 있는지 잠시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여전히.'

 

기념하라, 인천상륙작전을!

 

기념관을 들어서니 어렸을 때부터 봐온 너무나도 낯익은 멘트가 전쟁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모두가 잠들어 있던 1950년 6월 25일 평화로운 새벽, 북한 괴뢰군들은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모윤숙의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와 으레 한국전쟁의 발발을 알리는 그 익숙한 박격포 사진.

 

그 다음은 뻔한 한국전쟁의 도식이 펼쳐졌다. 해방 이후 소련의 전격적인 지원을 받으며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던 북한과 그와 비교하여 너무나도 취약한 국방력을 지니고 있던 남한. 전쟁발발과 함께 북한은 노도와 같이 진격하였고, 수세에 몰린 남한은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되는데.

 

기념관은 그 절체절명의 위기에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펼쳐 우리를 구원했음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것은 유엔의 공식적인 지지를 받은 연합군의 작전이었으며, 명확한 선악구도에서 수세에 몰린 선이 악을 퇴출하는 계기가 되었던 위대한 작전이었다. 맥아더는 남한을 구한 영웅으로서 대한민국의 은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기념관의 전체적인 논지였다.

 

물론 50년 전 사건의 진위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그것은 모두에 의해 공인된 사실로서, 그것을 바탕으로 역사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인천상륙작전은 북한군의 허를 찌른 작전으로서 한국전쟁의 양상을 바꾸어 놓았으며, 그만큼 현재 대한민국이 존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역사적 사실 자체에 있지 않다. 우리가 성찰해야 할 문제는 그 역사적 사실이 지금에 와서 어떻게 해석되느냐는 것이며, 혹 그 사실이 신화화되고 있다면 누가 왜 신화화하며, 또 그 사회적 결과가 어떤 모습으로 발현되고 있는가에 있다. 결국 무언가를 신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왜곡과 누락이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맥아더가 중국의 개입을 막기 위해 수많은 원자탄을 한반도에 떨어뜨리려고 했던 사실이 잊히고, 기념관에 자랑스럽게 걸려 있는 남한 장군들의 일제 강점기 시대 때의 경력이 누락되는 것은 인천상륙작전을 신화화하려는 자들의 대표적인 행위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우리가 입은 미국의 은총을 떠올리게 하여 미국과 맥아더에 대해 맹목적인 추종을 이끌어내며, 내부적으로는 일제 강점기 때의 친일 인사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한다. 기념관이 단순히 역사교육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정치사회적인 의도를 가지고 역할을 하는 것이다.

 

기념관에는 맥아더 장군의 흉상과 당시 연합군의 군복과 장비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마지막으로는 그 유명한 1950년 당시 남북한의 국방력 비교 도표가 걸려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봐온,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천문학적인 국방비를 지출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게 만들었던 그 도식이었다.  

 

어쩌면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막을 내린 지 55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남북한 국방력 비교 도표는 지금의 국방부가 예산을 타는데 있어서 가장 큰 힘인지도 모른다. 그 단순무식한 비교가 30배가 넘게 차이나는 남북한의 경제규모를 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70년대까지 계속되었던 남북한 군비 경쟁에서 무릎을 꿇고 결국 핵으로 전향할 수밖에 없었던 북한의 고뇌를 그 도표는 깡그리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기념관을 나선다. 인천 출신 회사 동료들의 이야기인 즉, 인천지역 초등학교 소풍은 대부분 이곳이라는데 아이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배우고 갈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 사회에 어떤 작용을 일으키게 되는 것일까? 비록 현재 자유공원을 기존의 만국공원으로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다고 하지만 아마도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이 있는 한 인천은 '반공'이란 키워드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기념관 뒤에는 인천시립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느 지역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그곳에는 인천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었다. 석기 시대서부터 시작해서 삼국시대의 미추홀, 고려·조선시대의 부평, 인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인천의 개항까지 박물관은 인천의 시대적 흐름을 비교적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인천시의 하나의 구로 편입되어버렸지만 그 명칭 부(富)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쌀농사가 주업으로서 인천보다 더 크고 중요한 행정구역으로 분류되었던 부평의 얄궂은 운명이나, 계속된 간첩사업으로 이제는 그 흔적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인천의 옛 지형 등은 내가 박물관에서 찾은 수확물이었다.

 

그러나 박물관을 나서는 나의 발걸음은 역시 가볍지 못했다. 박물관을 들어서기 전 보았던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의 여파가 그 모든 것을 가리고 있는 탓이었다. 그것은 1950년의 어느 날, 하루 동안 벌어진 사건이 석기시대부터 시작해 근대까지 이어진 길고 긴 인천의 역사를 집어삼킨 꼴이었다.

 

2008년 대한민국. 비록 복고의 시기를 거치고는 있지만 이제 한국전쟁의 상흔을 극복할 때다. 빨간 색안경을 벗고 좀 더 크게 우리의 역사를 바라봐야지 않겠는가.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것은 결국 현재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 기념관 앞의 길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인권의 길'로 불리고 있었다. 인천에서 비싼 단란주점 많기로 유명한 그 길을, 많은 취객들이 주머니 속 돈만 있으면 술집 여자는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길을 누가 왜 인권의 길이라고 칭했을까? 인권 좀 생각해 보라는 역설인가? 어쨌든 화창한 토요일, 그 길을 걷는 내내 난 우울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인천상륙작전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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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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