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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체불 및 산업재해 등에 대한 상담 자원봉사에 나선 김성중 전 노사정위원장이 재중동포에게 관련 책자를 들어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임금체불 및 산업재해 등에 대한 상담 자원봉사에 나선 김성중 전 노사정위원장이 재중동포에게 관련 책자를 들어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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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하루 앞두고 제자들의 자리다툼 사건이 벌어졌다. 3년 동안 스승과 동고동락하는 동안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풍랑을 잔잔케 하며 바다 위를 걸어오고, 오천 명의 군중을 먹인 오병이어 기적 등 예수가 행한 여러 기적을 목격한 제자들은 예루살렘 입성의 시간이 가까워지자 흥분하기 시작했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곧, 헤롯정권과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전승(戰勝)의 길이라고 믿었다. 해방조국에 세울 새 정권의 실세가 될 것이란 설렘으로 흥분한 열 두 제자들은 누가 권력의 실세가 될 것인가를 놓고 논공행상을 벌인 것이다. 그렇게 수차례나 일러주었건만 십자가 처형을 앞둔 스승의 아픔을 눈치 채거나 애통해 하는 제자는 한 명도 없었다.

예수는 스승마저도 팔아넘길 수밖에 없는 인간의 비열함과 나약함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제자들을 꾸짖지 아니했다. 약한 이들로 하여금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해 온 그는 진정으로 높은 자가 갖춰야 할 덕목을 가르쳤다. 촛불처럼 제 몸을 살라 어둠을 밝히고, 제 몸을 녹이면서 생명을 존재케 하는 소금처럼 자기를 낮추거나 아예 없게 하면서 이웃을 섬기라고 당부했다. 그리하여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욕망을 버리고 낮은 곳으로 임하라며 이렇게 가르쳤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잔이 넘치도록 누렸으니 오직 감사"...상담 견습생으로 제2의 인생은 쾌청

퇴임 이후 제2의 인생으로 자원봉사자 삶을 산 그 이후인 제 3의 인생에서나 휴식을 취하거나 여행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잔이 넘치도록 받았으니 이제는 돌려주어야 할 때라는 것이다.
 퇴임 이후 제2의 인생으로 자원봉사자 삶을 산 그 이후인 제 3의 인생에서나 휴식을 취하거나 여행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잔이 넘치도록 받았으니 이제는 돌려주어야 할 때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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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56) 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장(장관급)은 지난 7월 4일 퇴임식을 끝으로 31년 3개월의 기나긴 공직생활을 마쳤다. 그의 임기는 2009년 8월까지였으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의를 표한 것이다. 자유인이 된 지 100일째인 지난 14일 그를 만나 퇴임 이후의 심경을 물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에 의해)잘린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정권이 바뀌었으니 재신임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꺼이 사의를 표한 것이다. 비록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잔이 넘치도록 많은 것을 누렸으니 오직 감사할 따름이다.

노동부 (정통관료)출신으론 거의 유일하게 장관급의 자리에까지 있다가 물러났으니 과분할 뿐이고, 노사 반대로 무산될 뻔 했던 고용허가제와 주5일제, 최저임금제를 제정하는 등 나름대로 노사안정을 위한 일을 했으니 아쉬움이 크지는 않다."

정권에 의해 밀려난 것에 대한 아쉬움 혹은 억울함을 예상한 질문이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것은 상담 자원봉사자로서 제2의 인생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지난 7월 16일 소천(召天) 한 어머니의 장례를 마친 그는 지난 8월 중순부터 서울 구로구 가리봉1동에 위치한 '(사)지구촌사랑나눔'(대표 김해성 목사) 산하 '한국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임금체불, 산업재해, 이혼, 폭행 등에 대한 상담 자원봉사에 나섰다.

지난 2월 무렵 공직을 떠나기로 결심한 가운데 사회 약자 중에 약자인 이주노동자가 떠올랐다. 고용허가제 논의 과정에서 가까워진 김해성 목사에게 자원봉사의 뜻을 전하자 흔쾌히 반겼다. 김 목사는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지구촌사랑나눔'의 대표 자리를 권했지만 그는 자원봉사자 역할에 충실하고 싶다며 사양했다. 대신 이주노동자와 사단법인에 도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상임고문'이란 직함은 수락했다.

9월 중순에는 법무법인 태평양의 상임고문으로 영입됐다. 그는 '태평양이 단순한 이익집단이 아니라 가치집단이라는 점', '특정사건 해결을 위해 청탁해달라거나 부탁하지 않겠다는 점', '이주노동자에 대한 봉사활동을 적극 인정해 준 점'을 들어 수락했다면서 "강남에서 벌어 구로동에서 쓰게 됐다"며 웃었다. 3일은 법무법인에서 일하고, 3일은 자원봉사자로 일한다. 그가 쉬는 날은 주말부부인 아내를 맞는 토요일뿐이니 자신이 주도해 제정한 주 5일 근무제를 스스로 어기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시작된 자원봉사 견습 생활. 1976년 행정고시(19회) 합격으로 정통관료 생활을 하는 동안 해보지 못했던 일들도 해본다. 노동 상담의 필수인 근로기준법과 통상임금 계산법 등을 공부하는 게 새삼스럽다. 커피를 직접 타서 마시거나 복사해서 진정서 등의 서류를 꾸미는 등 자원봉사자 생활이 벌써 두 달째로 접어들었다.

관료 시절부터 빛났던 특유의 친화력은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됐다. 짬이 나면 젊은 직원들과 사다리타기를 해서 피자를 사주는 등 상담에 지친 그들을 위로하는 등 제 2의 인생은 쾌청했다.

닭장에서 잠드는 절망의 가리봉... 이들을 쉽게 떠나지 않으리!

"가리봉 이주노동자들을 보면서 한국인이란 사실이 죄스러웠고 공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지식인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가리봉 이주노동자들을 보면서 한국인이란 사실이 죄스러웠고 공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지식인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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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양지에서 너무 좋은 대우를 받으며 편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여기 와서 깨닫고 부끄러웠다. 악덕 인력소개업자와 사업주들에 의해 임금을 떼이고, 폭행을 당해도 불법체류자라는 약점 때문에 항의조차 하지 못한다.

가난과 절망의 고통에 갇혀 사는 가리봉 이주노동자들을 보면서 한국인이란 사실이 죄스러웠고 공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지식인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김 양식장에서 일하다 짐도 못 챙기고 도망 나온 밀항자 신분의 중국인, 퇴직금을 요구했다가 폭행당한 불법체류자, 한국 시댁의 차별과 무시에 못 견뎌 찾아온 재중동포 새댁.

중풍 들린 뒤에 버려진 병자들의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과 한 끼니의 밥에도 눈물 나는 이들로 넘쳐나는 '중국동포의집' 쉼터, 그리고 닭장과 쪽방으로 뒤덮인 가리봉은 절망스럽다 못해 암울하다. 인간의 존엄은커녕 생존조차 힘겨운 이 거리를 쉽게 떠나지 않겠다고 그는 다짐한다.

그에겐 부채의식이 있다. 고용허가제 등 이주노동자 정책 입안자로서의 부채가 하나이고, 또 하나는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이로서의 부채이다. 민청학련 세대인 그는 대학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다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뒤 제도권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바꾸리라 결심하고 행정고시를 선택했다. 가리봉 행은 우연찮게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이주노동자들은 그를 '아저씨' 또는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머리 희끗한 그에 대해 나름의 예의를 갖춰 붙인 호칭인 것이다. 더 이상 고관의 예우도 없고, 그런 예우를 바라지도 않는다. 낮은 자가 되겠다는 말은 쉽지만 막상 낮은 땅에 내려와서는 아니 올 곳에 온 것처럼 낮은 이들과 불협화음을 내기 쉬운데 막힘없이 잘 어울리고 소통한다.

물론 봉변당하는 일도 적지 않다. 퇴직금 정산을 요청했더니 임금체불 업체의 경리 왈 '당신이 뭔데 퇴직금을 내놓으라 말라 하느냐!', '당신은 한국사람 아니냐!' 등 막말도 들어야 했다.

가족, 인맥, 학맥은 끔찍하게 아끼면서도 내 편이 아닌 남은 용납하지 않는 몹쓸 패거리 의식. 하물며 피부색이 다른 가난한 이주노동자는 오죽하랴! 차별의 현장에서 절절한 목소리를 듣게 된 그는 "이방인을 유독 차별하는 한국인의 '인격적 이중구조'와 관용과 포용력 부재의 한국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면 국제화, 세계화의 물결을 헤쳐 나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겉치레에 치중한 다문화, 위선적 이중구조를 극복할 다문화 정책과 상생과 소통의 문화가 절실하다고 진단한다.

노사 간의 다리를 놓았던 그가 가리봉에서 또 다시 다리를 놓고 있다. 지인들에게 자원봉사를 권한 결과 조우현 숭실대 교수와 법무법인 태평양 등이 자원봉사 대열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그는 이주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입법과 현장의 간극을 확인한 그는 제도 개선에 대한 방안을 후배 관료들에게 전하면서 현장과 행정을 잇는 다리를 놓고 있다. 전관예우를 누리고자 함이 아니다. 이주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행정을 통해 국가신뢰도와 인도주의의 위상을 높이도록 기여하는 길이 공직자로서 누린 빚을 탕감 받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퇴임 이후가 더 아름다운 공직자를 보고 싶다!

김성중 전 노사정위원장(왼쪽)과 김해성 목사(지구촌사랑나눔 대표)가 대화 도중 환하게 웃고 있다. 이주노동자를 돕는 고달픈 길에서 만났으니 서로 든든할 뿐이다.
 김성중 전 노사정위원장(왼쪽)과 김해성 목사(지구촌사랑나눔 대표)가 대화 도중 환하게 웃고 있다. 이주노동자를 돕는 고달픈 길에서 만났으니 서로 든든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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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투기사실이 들통 나고도 뻗대는 공직자, 부패혐의로 자살하거나 수감된 공직자, 쌀 직불금을 가로채려다 들통 난 공직자 등 조선시대의 탐관오리를 뺨치고도 남을 추하고 뻔뻔한 공직자들로 인해 분노가 빗발친다. 복장이 터진다. 퇴임 이후가 더 아름다운 카터 전 미 대통령처럼 퇴임 이후가 더 아름다운 공직자를 이 땅에서도 보고 싶다. 그래서 그에게 몇 가지 물었다.

- 고통 받는 이웃을 섬기라고 예수께서 신신당부했지만 권력의 위치에 있거나 혹은 있었던 사람들이 이를 실천하는 경우를 보기 어렵다.
"권력은 속성상 '나를 따르라'고 할 뿐이다. 국가는 법과 제도라는 힘으로, 뒷골목의 패거리들은 주먹이라는 힘을 사용하면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켜온 것이 인류의 역사였다. 감히 누구를 섬긴다는 생각으로 여기 온 것은 아니다. 다만 어머님의 밥상머리 교육 덕분에 약자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어머님은 어려서부터 어려운 이웃을 돌보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했다."

- 욕망으로 삐뚤어진 인간을 향해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나님이 명령했다. 결국 흙으로 끝나는 인생들이건만 권력, 돈, 명예를 탐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한다. 인생관을 듣고 싶다.
"아흔 넘게 장수하시던 어머님이 최근에 돌아가셨다. 입관 예배를 드릴 때 모습이 눈에 선한데 마치 달콤한 잠에 빠지신 것 같았다. 어머님의 임종 후 모습을 본 목사님께서 천사가 와서 모시고 간 것 같다고 표현했다. 어머님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애쓴 분이었다. 이웃에 대한 사랑, 희생과 봉사가 신앙인으로서 어머님의 일생이었는데, 학 같이 꼿꼿하게 사셨던 어머님의 길을 감히 따라가지는 못하겠지만 어머님처럼 인생을 마쳤으면 좋겠다. 어머님이 보고 싶다."

- 향후 계획은 무엇인가.
"상담 자원봉사뿐 아니라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과 '중국동포의집' 쉼터 등에서 간병과 무료식사 봉사 등으로 봉사 영역을 확대할 생각이다. 아울러 틈이 나는 대로 공직생활을 해오면서 겪은 성공과 실패 등이 담긴 글을 정리할 계획이다. 사람은 바뀌어도 공직에 대한 경험은 전수되어야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

사람을 격의 없이 좋아하는 그는 지인들과 주변 사람들을 가리봉에 초대해 쓴 소주를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들려주면서 이들을 돕는 일에 한 발 담그게 하려는 의도이다. 전라도 말로 '가슴 짠한' 그들의 사연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 일이 혼자만 해선 안 되는 일이기에 여럿이 도모하려는 것이다.

그는 노동부 후배 관료들에게 "노동부는 아무리 일을 잘해도 칭찬은커녕 노사로부터 이의제기를 당하는 자리니 속상해하지 말고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묵묵히 일하면서 노사와 이주노동자를 위한 좋은 정책을 개발해 달라"고 부탁했다. 특히 노사 양측에 "30년 넘는 공직 경험을 보면 진이 빠질 정도로 대화하고 이해하면서 타협하는 길이 가장 바람직한 해결방법인 것 같다"고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 블로그뉴스/뉴스앤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노사정위원장, #김성중, #이주노동자, #지구촌사랑나눔, #가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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