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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지 꽃 노랗습니다/산수유 개나리/낮은 민들레꽃 노랗습니다/지친 아내 얼굴도 노랗습니다/일 끊겨 넉 달/오늘도 새벽 로타리 허탕치고 돌아서는/노가다 이십 년/내 인생도 노랗습니다/말짱 황입니다 - 김해화 '노란 봄'

'가난은 나랏님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배부른 사람들이 지어 낸 말일 것이다. 나누고 나누면 못할 일도 아닐 것인데 힘없는 민중들의 삶은 고달프고 서럽기만 하다. 요한 씨의 겨울 나기를 지켜보면서 그의 어깨를 누르는 가난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웃으며 살아가야 하겠지? 목련이 봉오리를 터트리지는 않았지만 봄이다. 요한 씨의 봄이 '말짱 황'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 책속에서

<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책으로 여는 세상 펴냄)의 '가난한 사람들의 겨울나기'란 제목의 글은 김해화 시인의 '노란 봄'으로 시작, "(인용 아래)…요한 씨의 봄이 '말짱 황'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로 끝난다.

-달동네 외과의사의 가슴따뜻한 이야기 겉그림
▲ <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 -달동네 외과의사의 가슴따뜻한 이야기 겉그림
ⓒ 책으로 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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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은 계속 치솟는 기름 값과 물가로 기억될 것 같다. 한여름부터 멀기만 한 겨울이 걱정될 정도였다. 이 때문인지 이 글이 머릿속에서 자꾸 맴돌고 있다.

저자가 글의 주인공 요한 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99년 추운 겨울. 그는 항문으로 흘러나온 피고름으로 속옷을 흠뻑 적신 채 나무 지팡이를 짚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외래진료실로 들어섰단다. 이렇게 만나 7년째 치료를 해준 진료 기록지만도 두툼한 책 한 권 분량.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치료를 해주면서 자주 만나다보니 의사와 환자 관계를 떠나 우스갯소리까지 스스럼없이 주고받는 살가운 존재가 되었단다.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면 어찌 지내는지 궁금해 하고 그의 집까지 찾아갈 정도니 말이다.

저자는 2006년 3월, 눈 귀한 부산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린 날 요한 씨 생각을 한다. 며칠 전에 퇴원한 그가 통원치료를 받으러 왔는데 다시 수척해지고 있어 마음 아프다.

병도 병이지만 머물 곳 없어 입원해야 하는 처지

올해 1월 중순쯤 다시 나무 지팡이를 짚고 진료실로 들어섰다.
"과장님, 입원 좀 해야겠십니뎌."
"왜요? 항문이 또 곪았습니까?"
"똥구멍도 우리하니 아프고, 도대체 허기가 져서 못 살겠다 아입니꺼!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춥기도 춥고 배가 고파 친구 집에 가서 남아있던 밥과 김치를 마구 퍼먹어도 배가 고파서…."

허기가 져서 견딜 수 없는 요한씨가 입원할 수 있게 된 데는 저자가 몸담은 병원이 마리아 수녀회가 운영하는, 몇몇 뜻있는 사람들의 헌신으로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주는 구호병원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부산의 가장 가난한 달동네 병원인 지금 현재의 '남부민 의원'을 후배와 운영하기 전에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이 구호병원에서 8년간 진료를 했다. 지금도 일주일에 2회, 필요한 경우 수시로 드나들며 진료와 수술을 해주고 있다. 이 책은 이 두 병원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우리의 부끄러운 의료현실에 대해 이야기 한다.

1941년생 요한씨가 항문병과 함께 앓고 있는 병은 협심증, 신부전증 외에 양쪽 고관절 대퇴골이 썩어 들어가는 '대퇴골 두무혈성 괴사'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병은 우리나라 사람의 경우 지나친 음주가 원인인 경우가 많단다.

고관절에 인공관절 치환 수술을 하면 되련만 치료비가 수 백 만원. 돈이 없는 요한씨는 임시방편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그러니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다. 치료는커녕, 끼니까지 걱정할 판이다. 이 때문에 다른 병까지 생겨난다. 아프지만 치료할 수 있는 돈이 없어 죽음으로까지 이르는 가난한 사람들의 전형이다.

항문 검사를 해보니 수술했던 곳이 다시 발그스레해져 있었고 살짝 눌렀더니 조금 아파했다. 통원치료를 해도 괜찮을 듯했지만 추운 날씨에 다리도 불편한 사람이 움막 같은 집에서 혼자 겨울을 날 것을 생각하니 차마 통원치료 하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원하십시다. 요한씨."

이런 경우는 얼마간 사회 입원이다. 굳이 병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다른 까닭으로 입원을 결정하는 경우였다. 주방 수녀님에게 밥을 꼭꼭 눌러 담아 달라고 부탁도 했다. 고관절만 이상이 없다면 다시 수술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수술 뒤 똥이 새는 가장 나쁜 결과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말이다. -책속에서

이 책의 주인공들은 요한씨처럼 '가진 것이라고는 병든 몸뚱아리뿐'인 가난한 사람들과 저자처럼 그늘진 그들의 삶에 온기를 더해주고 있는 사람들이다.

인공 항문으로 노숙자로 살다 죽은 형근씨, 진료비 3천원이 없어 가장 가난한 달동네 병원의 문턱도 높고 멀기만 한 사람들, 이십만원 남짓한 생활보호연금에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 독거노인, 가난한 달동네 비가 새는 우리누리 공부방, 미혼모의 아기….

'죽디 살디 한번 해보자, 할배'라는 글은 제목이 재미있어서 먼저 넘겨 읽었는데 추측과는 정반대인 마음 짠해지는 이야기였다. 18살 미혼모가 2주 앞당겨 출산한 아기가 정체불명의 커다란 혹을 가지고 태어나 수술 직전에 죽는다. 저자와 저자를 할배라고 부르는 수녀님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단의 빈민들을 위해 살고 있는 이태석 신부가 저자에게 보내온 전문이 소개되는 '수단에서 온 의사 신부님 편지'와 '쪽방촌의 슈바이처 선우경식 원장님'은, 성직자와 의료인의 역할은 물론 봉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삶의 가치관을 형성하기 시작하는 청소년들이 특히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보기도 했다.

오마이뉴스 블로거 플라치도님을 책으로 만나며

저자는 '플라치도'라는 닉으로 내게 낯익다. 그는 <오마이뉴스> 블로그 이웃이기 때문이다. 몇 년째 저자의
'돌팔이의 블로그
'에 들러 글 한 꼭지씩 가슴 짠하게 읽고 돌아오던 터였다.

송도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가난한 달동네에 태어나 그 골목을 누비며 자라난 그는 의대에 입학해 1학년 때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7년 징역을 선고받는다. 출생신고를 늦게 한 덕분으로 구치소 대신 김천 소년교도소에 수감된 그는 수감 생활 중 세례를 받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도움 되는 사람으로 살리라는 각오를 한다.

IMF의 구조 조정은 병원에도 몰아쳤다. 그가 근무하는 병원에도 누군가 잘려야 할 판. 그는 미련 없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구호병원을 새 일터로 선택한다. 그렇게 8년, 2006년에 구호병원을 그만두고 부산의 가장 가난한 달동네에 자신과 뜻이 같은 후배와 '남부민 의원'을 연다. 일요일에는 이주노동자들의 쉼터인 '도로시의 집'에 가 진료봉사를 한다.

남을 위해 참 많이 마음 아프고 참 많이 바쁜 저자와 저자가 만난 우리사회 가난하고 힘없는, 소외된 그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저자의 따뜻한 시선을 통해 가슴 아리고 훈훈하게 소개된다.

말뿐인 나의 이웃사랑을 부끄러워하며 읽었다. 저자나 저자를 할배라고 부르는 수녀님, 또 다른 수녀님들과 이태석 신부님과 선우경식 원장님은 '생명으로서 함께 나눔'의 한계란 결코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좀 더 많은 이웃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이다. <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를 다 읽고 덮자 뒤표지의 글이 눈을 붙잡는다.

바다가 보이는 가난한 달동네 작은 병원에는 오늘도 삶의 바다가 물결칩니다. 희망의 파도가 부서지고 또 다시 밀려옵니다. 환자들이 뜸한 틈을 타 가만히 진료실 창밖을 바라보면 가난한 달동네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배달할 신문을 들고 가파른 계단을 비틀거리며 오르는 벙어리 단골 환재 영대씨, 폐지와 빈 상자를 주워 담으며 카트를 끌고 가는 할아버지, 생선을 팔고 빈 고무대야를 들고 가는 할머니….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위대하고 초라할 뿐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 것이 염불이듯이 빈곤의 덫에 걸린 가난한 이웃들이 치료비 걱정하지 않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저자의 말 중에서

덧붙이는 글 | - <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최충언 지음/책으로 여는 세상/2008.8/11,000)
- 플라치도님의 블로그 주소 http://blog.ohmynews.com/surgery/



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 - 달동네 외과의사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

최충언 지음, 책으로여는세상(2008)


태그:#무료진료, #달동네, #플라치도, #구호병원, #남부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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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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