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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염원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2일 기륭전자 노조 농성장. 문규현 신부가 김소현 기륭전자 노조 분회장의 링거주사 자국이 남아 있는 앙상한 팔을 붙들고 기도하듯 말했다. 형형하게 빛났던 김 분회장의 눈이 그때 촉촉해졌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이 아니었다. 40m 높이의 철탑에서 7일째 고공농성 중이던 KTX-새마을호 여승무원들은 '오체투지 순례자'들을 향해 "감사합니다"라고 손을 흔들었다. 조계사 내에서 59일째 농성 중인 촛불 수배자들은 "건강히 다녀오시라"며 고개를 숙였다.

 

이처럼 '기도, 사람의 길·생명의 길·평화의 길을 찾아' 떠나는 오체투지 순례단의 첫 걸음은 이 땅의 상처받고 외로운 이들을 향해 있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문규현 신부·전종훈 신부, 불교환경연대 수경·지관 스님은 이날 그들의 염원을 안고 서울을 떠났다.

 

오체투지 순례단은 평택 대추리 이주민들을 만나고 오는 3일 물길이 막힌 새만금 갯벌을 돌아본 뒤 지리산에 도착할 예정이다.

 

양 무릎과 팔꿈치, 이마 등 오체를 땅에 붙이는 본격적인 오체투지 순례는 4일 오후 지리산 노고단에서부터 오는 11월 계룡산 신원사까지 약 200여km 구간 동안 이어질 예정이다. 정부와 협의를 통해 북한 묘향산까지 순례를 이어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상처받고 외로운 노동자들 앞에서 먼저 오체투지한 순례단

 

순례단은 이날 오전 조계사에서 삼보를 올리며 "우리 시대의 아픔을 헤아리는 순례, 자연이 자연의 길을 가고,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하며, 생명이 살아 숨쉬고, 생명과 생명 간의 평화가 조화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모두의 순례이고자 한다"고 밝혔다. 순례단은 그 뜻대로 KTX-새마을호 여승무원,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 앞에서 오체투지하며 먼저 참회했다.

 

오체투지와 더불어 문 신부는 "누가 죽기 전에, 누구를 죽이기 전에 이 '명박산성'을 넘어 화해와 상생의 길로 더불어 가야 한다"며 "여러분의 희망이 온누리의 희망이 되도록 저희의 죄를 참회하며 죽지 않고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전종훈 신부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 앞에서 "10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인간답게 살게 해달라고 투쟁하고 있는 여러분을 그동안 찾아뵙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냐"며 "여러분의 승리가 우리 모두의 승리인 만큼 마음과 몸으로 여러분과 함께하겠다. 외롭지 않도록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대화 내내 눈을 감고 말을 아낀 수경 스님은 이날 만난 모든 이들에게 '불망초심(不望初心)'이라고 적힌 위로금을 건넸다. 명호 순례단 진행팀장은 "수경 스님이 불계를 받으며 가졌던 마음을 이번 순례를 통해 다시 다지는 계기로 생각하시는 것 같다, 아마 오랫동안 투쟁해온 이들에게도 해당되는 말 같다"며 "말은 되도록 아끼시면서 이번 순례를 진행하실 것"이라고 귀띔했다.

 

"독하지 않았던 사람을 독하게 만드는 세상... 기도해주셔서 감사"

 

그런 그들 앞에서 짧게는 611일(새마을호 여승무원 투쟁), 길게는 1107일(기륭전자 노동자 투쟁)을 외로이 싸워온 이들이 가슴을 열고 그동안의 서러움을 토해냈다. 또 자신들을 위한 기도를 드리는 순례단에게 감사를 표했다.

 

김영선 KTX 여승무원 상황실장은 "비정규직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900일이 넘는 투쟁을 통해 알았다"며 "저희를 위해 기도해주신다니 감사하다. 돌아오시는 그날 저 철탑에 오른 동지들도 승리를 거두고 땅을 밟았으면 한다"고 감사를 전했다.

 

윤종희 기륭전자 노조 분회원은 "최저임금보다도 10원 많은 64만1850원을 받으면서도 고용보장만 되기를 바라면서 살았다"며 "본래 독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세상이 독하게 만들고 있다"며 아픔을 드러냈다.

 

다른 기륭전자 노조 분회원 박행란(47)씨는 "우리가 재활용이라도 되는 음료수 병보다 못한 것 같다. 아까 신부님의 위로를 듣는데 눈물이 갑자기 쏟아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들을 향해 문 신부는 "여러분이 수백일이 넘도록 싸워온 것을 기억하며 나의 하루에 여러분들의 투쟁 모두를 담는 마음으로 기도하겠다"며 "우리가 가는 순례길이 여러분이 걷는 길과 다르지 않다"고 위로했다.

 

"뭇 생명들이 차별 받는 세상에서 평화와 공존의 길을 찾아간다"

 

1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외롭고 상처 입었던 이들에게 적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노동자들은 순례단이 떠나는 길 앞까지 나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순례단 역시 "승리할 겁니다, 힘내십시오"라고 외치며 길을 떠났다.   

 

서울을 떠나기 전 불교환경연대 지관 스님(용화사 주지)은 기자들에게 순례의 의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조했다.

 

"지금 이 세상에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뭇 생명이 차별 받고 있다. 이제 순례단은 누구보다 먼저 성찰하고 참회하는 자세로 길을 나선다. 그래서 평화와 공존의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태그:#오체투지, #순례단, #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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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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