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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KBS 새 사장으로 취임한 이병순 사장의 취임사는 KBS 안팎에서 그에 걸었던 일말의 기대마저 접게 하는 것 같다.

 

이병순 사장은 그의 말대로 어쨌든 "KBS가 공사가 된 지 35년 만에 배출한 첫 KBS 출신 사장"이다. 이사회가 그를 새 사장으로 선임하면서 그에 대한 인물평이 무성했다. 그가 지난 KBS 보도국에서 일하던 시절, 보수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노골적인 정치적 경향성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정연주 사장 해임 과정 자체가 KBS에 대한 권력의 통제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만큼, 그 연장선상에서 선임되는 새 사장에 대해서는 사실 별 기대를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른바 'KBS 사장 사전 대책회의'가 폭로되면서, 권력이 애초 시나리오와 달리 선택한 제3의 대안이었기에 일말의 기대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취임사는 그런 기대를 완벽하게 저버리고 있다.

 

취임사 곳곳에서 드러난 조·중·동의 시각

 

물론 그는 취임사에서 KBS의 공정성과 중립성·공공성을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른바 조·중·동의 시각을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영방송인 KBS가 지향해야 할 공정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병순 사장은 방송의 '공정성'과 '중립성'을 말하면서 "대내외적으로 비판받아온 프로그램,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도 변화하지 않은 프로그램은 존폐를 진지하게 검토하겠다"고 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그동안 줄곧 KBS를 '코드방송' '편파방송' '좌파방송'이라고 비난해온 조·중·동 왜곡 언론에 백기를 드는 항복선언이나 다름없다. 또한, 조·중·동과 같은 시각으로 비난을 퍼부어왔던 한나라당의 지극히 정파적 비난에 무릎을 꿇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그동안 KBS의 보도와 논평, 시사 프로그램들이 모두 공정했고 완벽했다고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보도와 논평에서는 물론 시사프로그램에서도 미흡한 측면이 있고 개선할 점도 적지 않다.

 

공정성의 가치는 아무리 추구해도 완벽을 기하기 어렵다. 그것은 공영방송이 구도자적 태도로 하염없이 추구할 이상향이다. 그런 점에서 KBS와 그 구성원들은 안팎의 비판과 쓴소리를 더없이 겸손하게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집권세력과 일부 왜곡언론의 부당한 비난까지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권력의 압력에 대한 굴종이다. 그것이야말로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결정적으로 훼손하는 일이다. 그것은 KBS의 구성원들이 지금까지 어렵사리 구축해온 공정성과 신뢰를 뿌리부터 무너트리는 일이 될 것이다.

 

이병순 사장은 취임사에서 KBS의 위상과 관련해 "지나친 편향성으로 시청자의 따가운 지적을 받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라며 역시 조·중·동의 지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듯한 시각을 곳곳에서 드러냈다.

 

이러한 시각 때문에 "공정성을 위한 사전 기획단계에서부터의 철저한 게이트 키핑"을 강조한 것이나 "제작진과 출연진의 자율적 내부 규제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 역시 원론적인 필요성과 무관하게 그 의도가 의심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정권의 KBS 장악 우려에 대한 언급은 왜 없나

 

무엇보다 이병순 사장은 공정성과 독립성을 위해 꼭 해야할 언급을 회피했다.

 

그는 자신이 '첫 KBS 출신 KBS 사장'이라는 점에서 "벅찬 감회와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지만, 정작 그에 걸맞은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진정 KBS 출신 첫 사장으로서 KBS의 공정성과 독립성 수호에 앞장설 각오라면, 정연주 사장 해임 사태와 새 사장 선임과정에서 나타난 현안에 대해 당연히 언급해야 했다.

 

물론 정연주 사장 해임에 따른 후임 사장으로서, 이에 대한 언급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사장으로 취임한 이상 그는 정연주 사장 해임 강행에서 드러난 이 정권의 KBS 장악 의도에 대한 안팎의 우려와 새 사장 선임과정에서 폭로된 이른바 'KBS 사장 대책회의' 등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혔어야 옳다.

 

그가 취임사에서도 밝힌 것처럼 "KBS의 독립이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사회이익집단으로부터의 독립과 자율"을 의미한다면, 기자와 PD 등 KBS 사원들이 자신의 취임을 막으려고 했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분명한 입장 표명이 필요했다.

 

그것이야말로 취임사에서 가장 분명하게 했어야 할 내용이다. 앞으로 이 권력이 KBS를 통제하거나 간섭하려는 그 어떤 기도에도 단호하게 맞설 것임을 분명히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권력과 조·중·동의 주문에는 세심한 배려를 한 셈이다. 그의 취임사가 시청자들이나 국민·사원들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권력과 조·중·동에 대한 서약처럼 들리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취임사만으로 앞으로의 행보를 재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 섣부른 예단일 수 있다. 하지만 이날의 취임사는 그가 KBS 출신 첫 사장으로서 권력의 통제 기도에 과연 제대로 맞설 수 있을지 기본적인 의문을 갖게 한다.

 

이병순 사장은 논란이 된 프로그램의 존폐 문제를 거론하고 프로그램 편성 등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사안까지도 직접 챙길 뜻임을 분명히 했다.

 

정연주 사장이 KBS에 기여한 중요한 업적의 하나는 보도와 제작의 자율성을 거의 완벽하게 보장했다는 점일 것이다. KBS 사원들이 그토록 원해왔던 '내적 자율성'의 바탕이 정 사장 시절 비로소 마련됐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정 사장 퇴진을 요구했던 KBS 구성원들도 상당수 동의하고 있다.

 

어렵사리 구축한 내적 자율성의 토대를 KBS 출신 첫 사장이 허문다면 그것처럼 아이러니한 일도 없다. 그것은 KBS에 지울 수 없는 큰 상흔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가 진정 KBS인으로서 KBS를 사랑한다면, 유념하고 또 유념해야 할 점이다.


태그:#이병순, #KBS, #KBS 독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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