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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주: 알코올을 발효시킨 사료를 먹여서 육질, 육량 모두 1++이야. 최고 등급.
종구: 어때요, 마블링이 예술이죠?
주희: 네. 정말 되게 신기하네요.
봉주: 소 등급 매길 때 여기 1번 요추부분을 끊어서 등심부위를 결정하거든. 그래서 미리 초음파로 찍어보면 답이 딱 나오게 돼 있어. 이놈 잡아보면 육질 또한 환상적일거야.
주희: 대놓고 말하니까 좀 그렇다.
봉주: 하하. 뭐가 또 어때서. 최 주임, 이 놈 뼈랑 살 발라내는데 얼마나 걸립니까?
주희: 그만해. 소 놀라잖아.

소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큰 눈을 껌뻑이며 불안에 떠는 소의 등 털을 밀고 초음파 기기를 갖다 대며 육질을 논하고, 뼈와 살을 발라내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그들 때문에.

허영만의 만화가 원작인 SBS 드라마 <식객>은 대한민국 최고의 한식 요리사를 꿈꾸는 성찬(김래원)과 봉주(권오중)의 대결을 흥미롭게 그려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식객>을 잘 챙겨보지 않다가 우연히 지난 15일 방송된 10회분을 보게 되었다. 최고의 한우를 찾는 에피소드였다. 채식을 하는 나에겐 너무나 불편한 이야기였다.

주인공들은 최고의 한우를 찾기 위해 전국의 우시장을 누빈다. 그들은 맛있는 소, 좋은 소를 고르려고 소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뜯어본다. 입을 벌려 치아를 살피고 뿔도 만져본다. 눈대중으로 육량도 가늠한다. 그런데 이 과정을 지켜보는 게 썩 편하지 않다. 미인대회의 수영복 심사 같다고 할까. 여성의 몸을 대놓고 감상하고 점수까지 매기는 수영복 심사와 한우 심사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시청자들의 눈물을 뽑아낸 꽃순이... 결국 저 세상으로?

시청자들을 울린 꽃순이. 결국 도축되었다.
 시청자들을 울린 꽃순이. 결국 도축되었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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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객> 10회의 시청률은 20.7%(TNS 미디어 코리아 조사)였다. 성공드라마의 기준이라는 20%를 넘어섰다. 견인차는 단연 '꽃순이'였다. 성찬일행은 한 농부로부터 꽃순이라는 이름의 소를 산다. 농부의 어린 아들은 꽃순이를 동생처럼 아끼고 기른 탓에 이별이 쉽지 않다. 많은 시청자들이 이들의 이별장면을 보고 눈물을 쏟았다.

슬픔은 그때뿐이었다. 꽃순이와 소년의 헤어짐이 아무리 슬퍼봤자, 꽃순이는 도축되어 고깃덩어리가 될 운명이다. 나는 슬슬 뿔이 났다. 요리시합을 위해 희생되는 소의 생명도 마뜩치 않은데, 이런 감동스토리가 드라마를 미화하기 위한 장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끝난 후 인터넷 채식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글 제목은 '불편한 드라마 식객'. 비슷한 생각을 가진 채식인들의 댓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어제 식객 보면서 저도 글 올릴까 생각했었는데, 좀 어이가 없더라고요. 꼬마 애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어쩔 수 없다면서, 잡아가버리고, 잡아먹을 거면서 그 둘 앞에서 연민을 느끼는 장면에서, 주인공들이지만 참 가식스럽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털 밀고 초음파기계로 마블링이 예술이라는 말 듣고 괜히 내 팔뚝을 붙잡고 덜덜…."

드라마 식객 10회에 대한 채식인들의 생각.
 드라마 식객 10회에 대한 채식인들의 생각.
ⓒ 인터넷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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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김에 영화 <식객>까지 보았다. 첫 장면부터 움찔했다. 도마 위에서 몸부림치는 생선(황복)을 회 뜨는 장면이었다. 주둥이를 쳐내고 지느러미를 도려내고 껍질을 벗기는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드라마와 비슷한 포맷이어서 한우 대결도 빠지지 않았다. 꽃순이 대신 주인공 성찬(김강우)이 동생처럼 기른 암소 한 마리가 나왔다. 이 소 역시 성찬의 요리시합을 위해 도축되고 만다. 영화에는 소의 정수리에 철심을 박아 죽이는 장면까지 나온다. 고깃덩어리가 되어 나온 '동생의 시체' 앞에서 성찬은 다짐한다.

"약속해. 네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을게."

전혀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가족처럼 여겼던 소를 죽여야 하는 주인공의 갈등이 부각되지만, 그랬다면 죽이지 말아야 했다.

채식과 육식의 대결을 그리는 드라마는 어떨까?

드라마 식객에서 오숙수(최불암)가 양아들 성찬(김래원)을 위해 끓인 된장찌개.
 드라마 식객에서 오숙수(최불암)가 양아들 성찬(김래원)을 위해 끓인 된장찌개.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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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은 요리들이 드라마와 영화에 등장한다. 영덕 대게요리, 민어요리, 꿩 요리, 복어 회, 육회, 쇠고기 탕 등, 하나같이 화려하고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은 밥상은 따로 있었다. 드라마 식객 10회에서 오숙수(최불암)가 성찬을 위해 지은 솥 밥과 두부와 호박을 넣어 끓인 된장찌개가 더 맛있어 보인다.

영화 식객에서 성찬은 오이장아찌, 나물된장박이, 깻잎장아찌를 항아리에서 꺼내 쫑쫑 썰어 담고 가마솥 밥에 누룽지까지 긁어 차린 밥상을 손님에게 대접한다. 자연의 맛이 푸짐히 담긴 그 시골밥상이 최상급 한우 숯불구이보다 더 입맛을 당긴다.

맛있는 음식은 인간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선사한다. 그러나 혀끝에서 느끼는 찰나의 쾌락을 위해 죄 없는 생명들이 숱하게 희생된다는 사실도 한번쯤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커뮤니티 게시물의 댓글을 통해 채식과 육식의 대결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제안한 누리꾼이 있었다.

"진정한 요리사는 비동물성 재료만 가지고 최고의 맛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런 점에서 채식요리사와 육식 요리사의 대결을 다룬 드라마 같은 건 없을까요. 심사위원이 재료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런 대화가 오가는 거죠.

'이 요리는 무슨 고기를 썼는데 이렇게 맛이 기가 막힌 거죠?'
'고기는 전혀 안 들어갔습니다.' (놀라면서 눈이 휘둥그레지는 출연자들)"

그런 드라마라면 '닥본사('닥치고 본방 사수'의 준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태그:#식객, #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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