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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내가 말을 걸자 그 어눌한 말솜씨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이던 녀석들이 카메라를 들이밀자 이렇게 개구쟁이 포즈를 취한다. 주변 어른들은 폭소를 자아내며 잠시 고단함을 잊는다.
▲ 개구쟁이들. 처음 내가 말을 걸자 그 어눌한 말솜씨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이던 녀석들이 카메라를 들이밀자 이렇게 개구쟁이 포즈를 취한다. 주변 어른들은 폭소를 자아내며 잠시 고단함을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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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살이 5년차인 나는 100여명 공장식구들의 먹을거리를 책임지고 있다. 해서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큰 시장에 다녀와야 한다. 저렴한 가격에 좋은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파는 사람만큼이나 치열한 경쟁이 필요하다. 될수록 많은 상품을 둘러보고 그날의 적정가를 알아채야만 제대로 된 가격에 물건을 구매할 수 있다. 특히나 외국인인 나는 남보다 바가지 쓸 확률도 훨씬 높아 장보기는 늘 고단한 노동이다.

요즘처럼 날씨가 더울 때는 그 고달픔은 배가 된다. 특히 야채시장은 상가 건물이 둘러싸고 있고 지붕은 값싼 플라스틱으로 덮어진 탓에 그 열기는 한증막을 방불케 한다. 특히 비라도 내리는 날엔 장 바닥이 빗물과 버려진 쓰레기들이 한데 어우러져 한눈이라도 팔다간 미끄러지기 십상이고, 채소 썩는 냄새와 사람들 몸에서 나는 중국인 특유의 냄새는 최고조에 달해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게다가 나만의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끌고 나온 오토바이·수레·자전거 등등 바퀴 달린 온갖 운반도구는 좁디좁은 통로를 늘 북새통으로 만든다. 자칫 잘못해 수레나 자전거 틈새에 끼어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는 날도 부지기수다. 먼저 빠져나가려는 수레에 옷이나 신발이 걸려 찢기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그런 날은 "내가 왜 이 땅에까지 와서 이러고 살아야 하나…" 한숨을 절로 토하게 된다. 그렇다고 밤을 낮 삼아 일하는 직원들 먹을거리를 함부로 구매할 수도 없고, 또 잘 먹이지 않으면 그나마 붙어 있는 아이들이 가버릴까 염려도 되고, 나만큼 성실하게 잘해 줄 사람 또한 구하기도 어려우니 어찌하랴.

서로 먼저 가려고 한치의 양보도 보이지 않는다. 때때로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기도 하지만 어쩌랴. 모두 먹고 살기 급급하다 보니 양보를 잠시 잊는 것을...
▲ 아수라장의 시장통. 서로 먼저 가려고 한치의 양보도 보이지 않는다. 때때로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기도 하지만 어쩌랴. 모두 먹고 살기 급급하다 보니 양보를 잠시 잊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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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새벽잠이 없는 나는 여름엔 동트기 전 시장에 다녀오는 것으로 그 고달픔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는데 이 때문에 나와 함께 장을 보는 주 기사는 늘 볼이 부어 있다. 하긴 밤늦게까지 일하고 또 새벽 일찍 나오려니 오죽 힘이 들까. 미안하긴 하다.

결국, 주 기사를 차 안에서 쉬게 하고 나 혼자서 장을 보기로 한다. 이제 장보기 4년차라 단골도 생기고 친구처럼 대해주는 사람들도 있어 오히려 주 기사 없이 시장 보는 게 나을 때도 있다. 중국어가 서툰 탓에 가끔 주 기사가 중간에 수수료를 챙기기도 하는 모양인데 이를 또 내게 이르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모르는 게 약'이란 말처럼 알고 나면 주 기사 대하는 내 태도가 냉랭해지곤 한다.

새벽장 보면서 좋은 점이 또 하나 있다. 느긋하게 장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엔 내게 주어진 시간이 두 시간여 뿐이라서 늘 쫓기듯 달음박질하며 시장보기를 마쳐야 하기 때문에 웬만한 곳엔 눈길조차 주지 못하고 그날의 필요한 물건만 사서 돌아가곤 했었다. 약간의 시간 여유가 생기면서 이런 아쉬움을 조금은 해소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엄마를 따라나와 시장통에서 자라는 아이들과 잠시라도 놀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 큰 기쁨이다. 아이가 귀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그래도 요즘 내 아이 사랑은 그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다. 우는 아이 달래겠다고 시장통에서 한국동요를 부르며 율동까지 해 보이는 못 말리는 내내(할머니)가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중국살이에서 느끼는 사람에 대한 불신이 어른들과 잘 친해지질 못하면서 생긴 외로움의 반증인지, 아님 이제 나이가 들어 아이들이 더 예뻐지기 시작한 건지, 나도 내 맘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젠 아이들이 눈에 띄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꼭 아는 체를 하곤 한다.

내가 아는 체를 하면 쭈빗쭈빗하던 아이들도 이젠 내가 모르고 지나치면 먼저 아는 체를 하며 따라올 정도가 되었다. 이런 아이들에게 뭔가 주고 싶은 마음에 사진을 생각해 냈다. 처음 카메라를 들이밀면 어색해하던 아이들이 이젠 아주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사실 사진 실력이 어디 내놓을 형편이 못 되지만 뭐 개의치 않기로 했다.

아이의 재롱에 엄마의 고단함은 봄눈 녹듯 사라진다. 사진을 찍어주자 너무 좋아라 하던 젊은 엄마. 덕분에 난 한근에 0.05위안 싸게 샀다.^^
▲ 고단하지만 행복한 엄마. 아이의 재롱에 엄마의 고단함은 봄눈 녹듯 사라진다. 사진을 찍어주자 너무 좋아라 하던 젊은 엄마. 덕분에 난 한근에 0.05위안 싸게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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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반응이 좋다. 물론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아이 엄마다. 덕분에 사진을 현상해 가져다주는 날은 물건값이 다른 곳에 비해 좀 싸지기도 한다. 그래서 내 사진 찍기는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가 되었다. 사진을 보며 좋아하는 아이와 그 부모를 보면 장보기에 지쳐 무거워진 내 마음도 새털처럼 가벼워지니 말이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아기를 강보에 싸 유모차에 눕혀놓고 장사하는 엄마를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앞이 흐려지기도 한다. 어린 것이 고단한 부모한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청결조차 보장되지 않는 장바닥에 누어 함께 고단하게 세상살이를 시작해야 하는 현실에 목이 메곤 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자신의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당차게 살아간다. 아무리 힘들고 고단해도 자신들의 삶을 원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때로는 한 푼의 이익을 위해 속임수를 쓰기도 하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동료끼리 머리채 잡고 싸우기도 하지만, 나보다 처지가 더 어려운 사람을 보면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한다. 자신의 고단함에 비추어 남의 고단함을 볼 줄 안다.

시장통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그곳 사람들 모두의 아이가 된다. 서로서로 돌봐주기도 하고 아이들 재롱에 잠시 시름을 잊기도 한다. 그래서 이곳에선 잘난 사람들 세계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진솔한 사람냄새가 난다. 나 역시 이런 사람냄새에 내 고단함을 위로받는다.

"지난번에 찍은 사진 가져 왔어요."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작은 친절 하나에 금방 환한 미소가 퍼지며 우리 모두는 잠시나마 행복감에 젖는다.

환한 웃음을 잃지 않는 아이를 보면서 내 고단함도 위로 받는다. 요 꼬마녀석은 카메라가 신기하단 표정. 내 볼펜을 달라고 떼를 써서 잠시 목에 걸어줬다 도로 가져오려니 미안하다. 다음에 하나 가져다 준다고 하고 아직 그 약속을 못 지켰네.
▲ 미소천사. 환한 웃음을 잃지 않는 아이를 보면서 내 고단함도 위로 받는다. 요 꼬마녀석은 카메라가 신기하단 표정. 내 볼펜을 달라고 떼를 써서 잠시 목에 걸어줬다 도로 가져오려니 미안하다. 다음에 하나 가져다 준다고 하고 아직 그 약속을 못 지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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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함을 이기는 힘, 그것참 별거 아니다. 한때는 '삶의 의욕을 되찾기 위해선 재래시장을 가보라'고 조언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매일 그곳에서 한번 살아보시지, 기운이 나는지 빠지는지'하며 코웃음 치던 내가 어느새 이들과 어울려 내 고단함을 위로받게 될 줄이야.

다 요 꼬맹이들 덕분이다.

가게 앞에서 혼자 소세지를 먹고 있던 녀석이 내가 아는 체를 하자 활짝 웃으며 달려든다. 잠시 안아 주었더니 날 따라오겠다고 떼를 써서 오히려 엄마만 피곤하게 했다. "아가야 미안해, 다음에 또 놀아줄께~"
▲ 가장 행복한 미소. 가게 앞에서 혼자 소세지를 먹고 있던 녀석이 내가 아는 체를 하자 활짝 웃으며 달려든다. 잠시 안아 주었더니 날 따라오겠다고 떼를 써서 오히려 엄마만 피곤하게 했다. "아가야 미안해, 다음에 또 놀아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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붐비는 장날 목이 쉴 만큼 울어서 내 발목을 잡던 녀석이다.
▲ 토마토와 아이. 붐비는 장날 목이 쉴 만큼 울어서 내 발목을 잡던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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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목이 쉬어라 울던 녀석이 어느새 이렇게 의젓하게 자랐다. 이제 엄마와 상관없이 친구와 어찌나 잘 뛰어노는지. 나만 보면 졸졸 따라와 혹 길을 잃을까 염려가 될 지경이다.
▲ 벌써 이렇게 자랐어요. 작년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목이 쉬어라 울던 녀석이 어느새 이렇게 의젓하게 자랐다. 이제 엄마와 상관없이 친구와 어찌나 잘 뛰어노는지. 나만 보면 졸졸 따라와 혹 길을 잃을까 염려가 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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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시장통아이들, #작은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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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살면서 오블에 <고단한 삶의 놀이터>란 방을 마련하고 타국살이의 고단함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블로그 운영한 지가 일 년 반이 되었으나 글쓰기에 대해 늘 자신이 없어 좀 더 체계적이고 책임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에 시민기자 활동을 신청합니다. 주로 사는 이야기와 여행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주부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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