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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1 -

 

 사진기를 잃어버리고 나서 한 주 여드레 동안 사진기 없는 몸으로 지냈습니다. 잠잘 때와 뒷간에 갈 때를 빼놓곤 늘 손에 닿는 자리에 사진기를 놓으며 살았고, 어디를 가든 어깨에는 사진기가 걸렸습니다. 이런 사진기이건만, 잠깐 마음을 놓으면서 잃거나 도둑을 맞습니다.

 

 사진기 없는 채로 살아야 하는가 생각하다가, 제 삶에서 볼펜과 사진기를 없애면 죽은 목숨과 다름없지 않으냐 생각을 고쳐먹으면서, 어머니와 형한테 아쉬운 소리를 했습니다. 또, 머리를 더듬어 우체국에 보험이 하나 남아 있었음을 떠올리면서 1/3을 손해 보면서 보험을 깹니다. 어머니나 형은 제가 어려울 때마다 언제나 아무 말 없이 도와주었습니다. 이번에도 쉽지 않은 부탁을 선선이 들어주었습니다. 한식구임을 넘어서 제 마음속에서 늘 함께 살고 있는 이웃입니다.

 

 

 - 2 -

 

 옆지기는 아침에 성당 나들이를 갑니다. 저도 부랴부랴 새벽일을 마무리짓고 사진기를 어깨에 걸치고 동네 마실을 나옵니다. 아침 열 시 반에 도서관을 열기 앞서 돌아다녀 보기로 합니다. 오늘로 꼭 아흐레 만에 사진기를 손에 쥡니다. 사진기가 곁에 없으니 골목마실을 하고 싶지 않았고, 사진기 없이 골목마실을 하자니, ‘이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야 하는데’ 하면서, 눈에 밟히는 모습을 그저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골목 모습을 마음에 담으면서 헤아려 보니, 옆지기가 말하는 대로 ‘사진기가 없으면 손으로 그림을 그리면 되고, 그림을 그리기 어려우면 마음에 담으면 된다’는 말 그대로입니다. 꼭 사진으로 담아야만 하지는 않으니까요. 제가 두 다리로 걸어서 다닌 골목길 느낌과 냄새와 맛과 모습은 제 몸 깊은 곳에 또렷이 아로새겨집니다.

 

사진으로 담아 놓으면 다른 이들도 눈에 그리듯이 함께 구경할 수 있습니다만, 다른 이들한테 제가 보고 느끼고 받아들인 대로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어요. 사진기가 아닌 눈을 거쳐서 마음으로 스민 골목 모습은 어느 골목에서 어디로 빠지면 어떤 집이 나오고, 이 집에 꽃그릇이 어떻게 놓였으며 철 따라 달 따라 날 따라 줄기와 꽃봉우리를 어떻게 올리는지가 환하게 새겨져 있으니까요.

 

 토요일 아침, 잔뜩 찌푸린 하늘. 비는 올듯 말듯. 우산 없이 나서는 길. 은행에 들른 다음 땅밑길로 건너서 화평동 냉면골목 건널목 앞에 섭니다. 이쪽으로 가 볼까? 새 사진기를 장만했으니, 새 사진기로 함세덕 선생 옛집을 살며시 담아 볼까? 그림할머니 박정희님 댁에 들러 볼까? 아, 지난번에 못 들렀던 곳에 가야지. 배나무였나 감나무였나, 집 앞 조그마한 흙밭에 심은 나무에 맺힌 열매마다 신문으로 봉지를 씌운 그 집!

 

 고작 왼쪽으로 십 미터 옆으로는 ‘관광명소 화평동 냉면골목’을 끼고 걷습니다. 인천사람이든 인천사람이 아니든, 또 인천 토박이이든 인천 토박이가 아니든, ‘화평동 = 냉면골목’으로 여깁니다. ‘화평동 = 골목동네’임을 헤아리는 분이 드뭅니다.

 

이곳에 냉면집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냉면집 건너편에 어떤 골목이 이루어져 있었는지를 떠올리는 분이 드뭅니다. 인천시에서는 이곳을 관광명소로 삼고 돈도 제법 들여 ‘들머리 탑’도 세우기는 했습니다만, ‘냉면을 먹고 나서 무엇을 느끼는 나들이를 하면 좋은가’까지는 살피지 못합니다. 큰돈을 들이지 않아도 되며, 작은돈조차 들이지 않아도 되는 멋진 골목꽃이 바로 냉면골목 안쪽으로 십 미터만 들어가도 널찍하게 펼쳐지는데.

 

 

 이윽고 ‘미니슈퍼’가 보입니다. 기와집에 깃든 구멍가게. ‘슈퍼’라는 이름을 붙이셨군요. ‘작은가게’라 이름붙여도 좋았을 텐데. 그러나, 이분들이 가게이름을 붙이던 그 즈음은 다들 ‘연쇄점’이니 ‘슈퍼’니 붙였지요.

 

 미니슈퍼 앞 네거리에서 어디로 갈까 망설이면서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두 번 돕니다. 오른쪽으로 가면 금세 큰길이니, 저기로는 가지 말고 앞으로 가자.

 

 

 다섯 걸음 걸었을까. 앞쪽 골목 오른편으로 퍽 넓은 동네텃밭이 나옵니다. 왼쪽 골목집 할아버지 한 분이 물조리개를 들고 부지런히 텃밭에 물을 줍니다. “요 앞 텃밭은 할아버지가 모두 간수하시나요?” “아니여. 나는 요기만 하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이 조금씩 하지.” “네.”

 

 할아버지 옆에서 물 주시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만석동 쪽으로 몇 걸음을 걷습니다. 저쪽으로 더 넘어가면 시간이 늦을 듯해 텃밭을 끼고 샛골목으로 접어듭니다. 시멘트로 마감된 벽에 스프레이로 ‘SEX’라고 적은 낙서가 보입니다. 이런. 누가 이런 짓을. 지 집이 아니라고 이렇게 했나. 괘씸한.

 

 

 - 3 -

 

사자머리 문고리가 달린 파란 문 앞에 섭니다. 문고리를 살짝 쓰다듬고 뒤돌아섭니다. 문고리 위쪽으로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라는 글이 적힌 쪽지가 붙어 있습니다. 지난달에 걸었던 길을 더듬으면서, 그때 안 걸었던 골목을 찾아갑니다.

 

골목이 끝나는 곳에서 저 멀리까지는 아니고 눈앞에 잡힐 듯이 2700세대가 사는 큰 아파트마을이 보입니다. 지난달에도 느꼈지만, 아파트마을은 수도국산 꼭대기부터 죽 올라섰습니다. 그래서 이 아파트마을 둘레에 자리한 골목집들은 대단히 낮아 보입니다. 꼭, ‘갈 수 없는 성터를 올려다보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쳐들어갈 수 없는 빈틈없는 요새를 바라다보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러나 자동차가 들어올 수 없는 골목 안쪽으로, 또 ‘개조심’ 문패가 붙어 있는 호젓한 골목으로 들어서면, 높직한 아파트 마을은 보이지 않습니다. 차소리도 들리지 않고, 다른 시끄러운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높지 않은 울타리로 마주하고 있는 골목집에서 밥짓는 소리와 텔레비전 보는 소리와 아이 어르는 소리만 들려옵니다.

 

 

 옅은 하늘빛으로 문과 창문살을 바른 집 앞에 우뚝 섭니다. 창문살 앞 손바닥 만한 꽃밭에 고추가 일곱 포기 나란히 심겨 있습니다. 꽃은 일찌감치 졌고, 머잖아 빨간 고추가 주렁주렁 열릴 테지요.

 

 

 골목이 끝나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여관 문간에 널려 있는 빨래 몇 점을 바라보며 왼쪽으로 꺾습니다. 송현동 골목집을 빠져나오니 송현시장. 저잣거리를 가로질러 송림동성당과 송현교회 사이 길을 지납니다. 싱크대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먼저 알아보고 인사말을 건넵니다. “한 바퀴 돌고 들어가시는 길인가?” “네, 이제 들어가려고요.” 꾸벅 배꼽인사를 하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태그:#골목길, #골목여행, #인천, #화평동, #냉면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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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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