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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원 회고록 <피스메이커>
 임동원 회고록 <피스메이커>
ⓒ 중앙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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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 8주년을 앞두고 2000년 6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정상회담 추진 과정과 대화록, 그리고 숨겨진 비화 등이 담긴 742쪽의 방대한 저서가 8일 공개됐다.

책의 제목은 <피스메이커>(중앙북스 발행, 2만5천원), 저자는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다. 그는 노태우 정부 당시 고위급회담 대표로서 남북한이 역사적인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합의, 채택하는 데 산파역을 했다.

또 그는 김대중 정부 당시 외교안보수석비서관, 통일부장관, 국가정보원장, 통일부장관(중임),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를 역임하면서 '햇볕정책'을 설계했다.

한 마디로 말해, 그는 남북기본합의서와 6·15공동선언이라는 한반도 평화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를 모두 기초한 유일한 '당국자'이다.

따라서 국제냉전이 종식된 1988년(외교안보연구원장 시절)부터 현재(세종재단 이사장)까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관여한 그의 막중한 역할에 비추어 '남북관계와 북핵문제 20년'이라는 책의 부제는 오히려 '임동원 프로세스'라고 고쳐 부를 만하다.

한반도 평화의 '마그나 카르타'를 기초한 유일한 '당국자'

그는 회고록에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남북기본합의서를 탄생시킨 남북고위급회담의 전개 과정,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수립과 클린턴 행정부와의 정책공조 과정, 남북정상회담 추진 과정, 그리고 북핵문제의 발단에서부터 '고농축우라늄(HEU)' 계획 의혹으로 야기된 제2차 북핵 위기의 전개과정 등을 상세히 다루면서 그동안 베일 속에 감춰졌던 대북 화해협력 정책의 추진과정을 상당 부분 공개했다.

6.15 남북공동선언 5주년 기념행사에 정부대표단으로 참석한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17일 가진 오찬에서 건배하고 있다.
▲ '피스메이커'의 여정 6.15 남북공동선언 5주년 기념행사에 정부대표단으로 참석한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17일 가진 오찬에서 건배하고 있다.
ⓒ 통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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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전 장관은 우선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이 기회에 두 정상간 비상연락망을 마련하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제의하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게 합시다"라고 동의했으며 "북측의 적극적인 호응에 힘입어 (회담) 4일 후에는 이 핫라인이 정식 개통할 수 있게 됐다"고 공개했다.

그는 특히 "이렇게 만들어진 양 정상간 비상연락망은 '국민의 정부' 마지막 날까지 계속 유지되면서 남북문제 해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며 "개인적으로는 이 핫라인의 개설이야말로 정상회담 최대의 성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역설했다.

이를테면 2002년 6월 서해에서 교전이 발생했을 때는 북측이 이 채널을 통해 "이 사건은 순전히 아랫사람들끼리 우발적으로 발생 시킨 사고였음이 확인됐다. 이에 대해 유감이다"라는 긴급 통지문을 보내왔다. 우리 정부도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보장하라"는 회신을 보내는 등 남북관계의 고비 때마다 핫라인이 가동됐다고 임 전 장관은 설명했다.

북한은 당시 "서해상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무력충돌 사건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이러한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는 김령성 장관급회담 단장 명의의 전화통지문을 남측에 보내왔다. 이는 핫라인을 통한 요구에 응한 셈이다.

남한의 국가정보원과 북한의 통일전선부 사이에 개설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핫라인은 김대중 정부에서뿐 아니라 노무현 정부에서도 활용됐다. 특히 제2차 남북정상회담(2007년) 성사 과정에도 활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 미국에 김용순 특사 보내 "미군 계속 주둔해 달라"

김일성 주석이 1992년 초 미 공화당 정부 시절에 김용순 비서를 미국에 특사로 보내 "미군이 계속 남아서 남과 북이 전쟁을 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해 달라"고 요청한 것도 새롭게 밝혀진 내용이다.

2000년 6월 14일 오후 평양 백화원에서 4시간 동안 진행된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통일 후에도 주한 미군의 계속 주둔이 필요하다는 김 대통령의 주장에 동의를 표시했다. 그러면서 흥미로운 발언을 했다.

"대통령께 비밀 사항을 말씀 드리겠다. 1992년 초 미 공화당 정부 시기에 김용순 비서를 미국에 특사로 보내 '미군이 계속 남아서 남과 북이 전쟁을 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해 달라. 동북아시아의 역학 관계로 보아 조선반도의 평화를 유지하자면 미군이 와 있는 것이 좋다'고 요청했었다."

이는 미군이 계속 주둔하되 "북한에 적대적인 군대가 아니라 평화유지군 같은 역할을 해 주기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는 의미다. 김 대통령이 "그런데 왜 언론 매체를 통해 미군 철수를 주장하느냐"고 묻자 김 위원장은 "우리 인민들의 감정을 달래기 위한 것이니 이해해 주기 바란다"고 답변했다.

김정일 "주석님은 소련제 구형 심장박동기와 소련 의료진 탓에 급사"

1994년 7월 무산된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언급하다가 김일성 주석의 사망 경위로 화제가 옮겨 갔을 때 김 위원장이 밝힌 사망 원인도 처음 밝혀진 내용이다. 당시 일부에서는 김 주석이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스트레스를 받아 급사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2000년 6월 3일 2차로 비밀방북한 임동원 특사 일행이 신의주 근처 김정일 위원장의 특각에서 김 위원장의 중국방문 기록영화를 보고 있다(앞줄 오른쪽과 왼쪽은 각각 국정원의 대북전략 전문가인 김보현-서훈씨이고 뒷줄에 김용순 비서와 임동옥 통전부부부장이 앉아 있다).
▲ 김정일과 함께 기록영화 감상 2000년 6월 3일 2차로 비밀방북한 임동원 특사 일행이 신의주 근처 김정일 위원장의 특각에서 김 위원장의 중국방문 기록영화를 보고 있다(앞줄 오른쪽과 왼쪽은 각각 국정원의 대북전략 전문가인 김보현-서훈씨이고 뒷줄에 김용순 비서와 임동옥 통전부부부장이 앉아 있다).
ⓒ <피스메이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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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주석께서) 당시 평양에 있던 저에게 '이제 내가 준비할 것은 모두 끝냈다'고 전화를 주셨는데 그로부터 한 시간 반 뒤에 급사하셨습니다. 원래 주석님께서는 서거하시기 4, 5년 전에 심장질환을 일으켰던 적이 있어요. 그때부터 소련 크레믈린병원이 제공한 페이스메이커(심장박동기)를 설치했습니다.

당시 소련의 의학은 미국에 비하면 유치한 수준이었지요. 원래 페이스메이커를 설치하면 아무래도 혈액의 응집현상이 일어나 급사하게 될 위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방세계에서는 아스피린을 복용하고, 중국에서도 개혁개방 이후에는 미국에서 배워 아스피린을 복용한다는데…그때 당시 소련 의료진은 아스피린을 권고하지 않았어요., 그냥 물고기만 많이 먹으면 된다는 기존상식에 의존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성능 좋은 미제가 아닌 소련제 구형 심장박동기와 아스피린을 권고하지 않은 소련 의료진 탓에 김 주석이 급사했다는 것이다.

김정일 "내가 상주인데 안 가시겠습니까?"

김 위원장이 평양 순안공항에 직접 영접을 나와 두 정상이 포옹하는 역사적인 장면을 지켜보면서도 공동선언이 나오기 전까지 그에게는 미해결된 세 가지 난제가 있었다. 김 대통령의 금수산궁전 방문 문제와 '특정기자 입북 거부' 문제 그리고 남북공동선언문 작성·합의 문제였다. 특히 김 위원장은 금수산궁전 참배를 강하게 고집했다.

2000년 6월 3일 정상회담 의제를 최종조율하기 위해 두번째 비밀방북한 임동원 특사를 영접나온 임동옥 통전부 부부장.
▲ 임동원 특사의 비밀방북 2000년 6월 3일 정상회담 의제를 최종조율하기 위해 두번째 비밀방북한 임동원 특사를 영접나온 임동옥 통전부 부부장.
ⓒ <피스메이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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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서부터 여러 차례 김일성 주석의 유해가 안치된 금수산 궁전에 김 대통령이 참배할 것을 요구해 왔다. 임 전 장관은 회담 전인 6월 3일 대통령 특사로 방북해 중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있던 김 위원장을 신의주 부근에서 만났다. 임 전 장관이 "금수산궁전 방문은 국민 정서상 앙금이 남아 있어 어려우니 양해해 달라"고 설명하자 김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아예 내가 공항에 직접 나가 김 대통령을 영접하고, 자동차를 함께 타고 곧바로 금수산궁전으로 모시고 가는 방법은 어떻겠습니까? '내가 상주인데 안 가시겠습니까?' 하는 식으로 정중히 요청하고, 김 대통령께서는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방문하는 형식을 띠면 남쪽 국민들도 양해하지 않겠습니까."

임 전 장관은 "저는 대통령의 금수산궁전 방문이 정상회담의 의의를 퇴색시키고 많은 후유증을 초래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라며 "금수산궁전 방문은 김 위원장께서 서울을 방문하시는 제2차 정상회담으로 남북관계를 급진전 시키려는 김 대통령의 구상에도 많은 차질을 야기하게 될 것"이라고 거듭 양해를 구했다.

김정일 "나도 서울을 방문하면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겠다"

그러자 김 위원장은 불쑥 "나도 서울을 방문하면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겠다"고 말했다.

"나의 서울방문 문제를 벌써부터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이지만,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먼저 서울을 방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게 하겠습니다. 물론 나도 서울을 방문하면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겠습니다."

지난 2005년 6월 14일 오후 북측 당국 및 민간 대표단이 동작동 국립현충원 참배를 위해 입장하고 있다(가운데 김기남 북측 단장과 그 왼쪽으로 보이는 안경을 쓴 사람이 임동옥 노동당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 서울방문 약속은 안지켰지만 현충원은 참배 지난 2005년 6월 14일 오후 북측 당국 및 민간 대표단이 동작동 국립현충원 참배를 위해 입장하고 있다(가운데 김기남 북측 단장과 그 왼쪽으로 보이는 안경을 쓴 사람이 임동옥 노동당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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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어 "박 대통령이 유신으로 정치 탄압을 한 것은 나쁘지만 새마을운동을 전개하고 경제개발을 하여 남조선을 발전시킨 데 대해서는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은 서울을 방문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임동옥 통일전선부장의 국립현충원을 참배토록 했다.

임 전 장관은 2002년 4월 대통령 특사로 다시 방북해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재차 요청했다. 김 위원장은 이렇게 답변했다.

"사실 2001년 봄에 서울을 방문하려 했다. 그런데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 우리를 적대시 하는 부시의 대통령 당선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남쪽의 우익세력이 6·25 전쟁에 대해 사죄하라, KAL기 폭파사건을 사죄하라며 위해를 가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는 판에 내가 서울에 가는 것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게 된다고 주변에서들 만류한다."

부시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가로막은 셈

부시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가로막은 셈이다. 그러면서 김 위원장은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에서 만나자"며 "필요하다면 러시아 대통령과의 3국 정상회담을 통해 시베리아 철도 연결 문제도 협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밖의 제의를 했다.

이르쿠츠크 정상회담 제안이 이번에 처음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회담 제안의 주체에 차이가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해 2월 5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측의 제안으로 이르쿠츠크에서 김대중, 김정일, 푸틴(러시아 대통령)의 3자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을 논의했으나 무산됐었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이 남쪽으로 내려와야 한다, 서울에 오지 못하면 제주도나 휴전선 가까이라도 와서 해야 한다며 내가 (러시아측의 제안을) 거절해 진전이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임 전 장관은 우리 측은 서울이 어려우면 제주도나 판문점에서 만나자고 수정 제의를 했으나 북측은 수용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HEU 의혹으로 다시 한번 위기 맞은 '임동원 프로세스'

2002년 4월 당시 임동원 특사가 방북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뒤로 9·11 테러를 계기로 냉각기를 갖던 남북관계가 다시 활성화되어 ▲ 북한 선수단 및 응원단의 부산 아시안게임 참석 ▲ 남북 철도-도로 연결 착공식 거행 ▲ 북한, 신의주 특별행정구역 지정 발표 등으로 이어졌다.

또한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부시 행정부의 제동에도 불구하고 그해 9월 17일 평양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갖고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을 10월 중에 재개하기로 합의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한 '평양선언'을 채택해 북일관계도 이미 북미관계를 앞질러 갈 태세였다.

지난 2001년 9월 임동원 장관 해임안 통과에 항의하며 국회의원회관 117호실에서 규탄 철야농성에 들어간 민주당 의원들.
▲ 도전받은 '6.15 선언'과 '햇볕정책 설계사' 지난 2001년 9월 임동원 장관 해임안 통과에 항의하며 국회의원회관 117호실에서 규탄 철야농성에 들어간 민주당 의원들.
ⓒ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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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01년 9월 당시 한나라당의 두번째 통일부장관 해임건의안에 가세한 '원조보수'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DJP공조' 파기로 국내에서 위기를 맞은 '임동원 프로세스'는 HEU 의혹으로 다시 한번 미국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2002년 10월 당시 미국이 북한의 HEU 프로그램(HEUP) 문제를 제기한 배경에 대해 지난해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부시 행정부가 94년 클린턴 행정부 때 북미간에 체결한 제네바합의를 깨기 위한 정보조작에 우리가 놀아난 것"이라고 말해 '정보조작'임을 분명히 했다.

"부시 공화당 행정부는 집권하기 전부터 제네바합의를 인정하지 않고 호시탐탐 이를 파기하려고 했으나 명분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2002년 여름부터 남북간의 교류협력이 전례없이 강화되는 가운데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방북(2002. 9. 17)으로 북일관계까지 급진전할 조짐을 보이자 당황한 네오콘 세력이 HEUP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결국 부시 행정부는 9·11 테러를 계기로 북한을 이라크·이란과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해 이라크는 WMD(대량살상무기)를 구실로 침략하고 북한은 HEUP를 구실로 제네바합의 틀을 붕괴시켜 결국 핵개발 재추진이라는 외길 수순으로 몰아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이번 회고록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는 "북핵 문제는 한미 정보기관의 최우선 관심사로 정기적으로 기술적인 정보교류와 공동분석평가 작업을 통해 꾸준히 검토돼 왔다"며 "특히 북한의 HEU 계획 의혹은 그동안 한미 양국 정보기관의 최대 관심사로서 계속 긴밀하게 정보협력을 해왔는데 아직은 특이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미국은 HEU를 거론하면서 남북간 철도·도로연결 착공식의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고 "이에 우리는 HEU 의혹은 확증정보 확보 후에 대응책을 강구하자"는 입장을 견지했다고 임 전 장관은 회고했다.

'자주국방의 설계사'에서 '햇볕정책 설계사'로

김대중 정부 말기에 그가 맡은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 자리는 '위인설관'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그 직함에 걸맞은 인물은 찾기 어렵다.

육군사관학교(13기) 출신으로 서울대(철학과)에서 수학한 그는 평생 군인과 외교관 그리고 정무직 고위공직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그는 한국군 장비 현대화사업인 '율곡사업'을 입안한 '자주국방의 설계사'로, 혹은 '햇볕정책 설계사'로 불렸다.

그의 말대로 그는 "국제냉전시대에는 군인으로서, 외교관으로서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지키는 '피스키퍼'로서의 시대적 사명을 수행"했고, "국제냉전이 종식되고 난 지난 20년간의 전환기에는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한반도 냉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협상자로서, 정책 설계자요 집행자로서, 또한 평화를 만들어나가는 '피스메이커'로서의 역사적 소명을 다한 것"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2000년 6월 14일 정상회담 당시 임동원 국정원장의 안내로 남북한의 정상들이 남쪽에서 보내온 신문을 보며 정상회담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보도 2000년 6월 14일 정상회담 당시 임동원 국정원장의 안내로 남북한의 정상들이 남쪽에서 보내온 신문을 보며 정상회담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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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에서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민족의 희망을 세운 10년'이라고 표현했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역사학자들은 해방 이후 분단의 역사를 2000년 6·15 이전의 '불신과 대결의 시대'와 6·15 이후의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또 6·15 공동선언은 남과 북의 정상이 직접 만나서 합의 서명한 최초의 문건이며, 또한 합의에 끝나지 않고 실천에 옮겨진 최초의 합의서이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를 위한 '임동원 프로세스'와 '6·15공동선언'은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적대정책과 이에 맞선 북한의 핵개발, 그리고 국내의 반북·보수화 흐름 속에서 도전과 시련을 겪어왔다. 그는 6·15공동선언을 통해 남과 북이 힘을 합치면 민족의 장래를 스스로 결정하고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6·15선언 합의과정에 개설한 남북한 정상간의 '핫라인'으로 6·15선언을 지켜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는 이명박 정부의 도전을 받고 있다.

임동원 회고록 출판기념회가 열리는 10일과 2002년 촛불집회를 점화한 효순·미선양 사망 6주기인 13일, 서울에서는 보수단체들이 주최하는 '법질서 수호 및 한미FTA 비준 촉구 국민대회'와 '6·15선언 폐기 촉구 규탄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그가 설계한 '6․15 촛불'은 계속 타오르지만, 평화는 여전히 도전받고 있다.


태그:#임동원회고록, #6.15공동선언, #피스메이커, #햇볕정책설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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