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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중심 경제구조를 갖고 있는 한국은 교역국과 '신뢰'가 중요하다. 한국 신인도(信認度)를 떨어뜨릴 쇠고기 재협상이 바람직하지 않은 건 그 때문이다. 이러한 국가적·국민적 리스크에 대한 고려 없이 국민 건강성 포기하는 주장이 정부를 압도하고 있다. '재협상'만이 해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명박 무력화가 현실이 됐을 때 국민 건강권은 100% 지켜지고 민생은 새로운 희망의 궤도에 올라가는 것일까."

 

2008년 6월 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칼럼 '칼집 속 재협상 유효한가'의 주요 논지다. 그러나 이 칼럼은 허술한 논리로 독자를 우롱한다. 이 글을 쓴 배인준 논설주간에게 기자 지망생이 '정중하게'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재협상하면 외국과 교역할 수 없다?

 

배 논설주간은 "법적으로 재협상이 가능하지도 않지만 설사 정치적으로 가능하다 해도 우리나라는 앞으로 외국과 어떤 협상도 하지 못 할 것"이란 익명의 통상전문가 말을 인용하면서 "재협상을 하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가 불가능해 질 것이고, 제3국들도 한국을 믿을 만한 협상 상대국 리스트에서 지울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재협상 사례가 없는 건 아니다. 1989년 이뤄진 '외국산 담배수입합의'가 불평등하다는 불만에 따라 정부는 94년 미국과 개정협상을 시작했고, 96년에 재개정에 합의했다.

 

2002년 3월 29일 한미 양국 정부가 서명한 '연합토지관리계획(LPP)'은 2002년 10월에 국회 비준을 받아 발효가 됐다. 연합토지관리계획은 한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미군 기지를 통폐합하는 방안이다. 그러나 국외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에 따라 개정이 불가피해졌고, 양국은 다시 협상을 벌여 2004년에 재합의를 이뤄냈다. 재협상은 '정부의 의지' 탓이지 법적·정치적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유무역협정(FTA)도 마찬가지다. 찰스 랑겔 미국 세출 위원장과 샌더 레빈 무역소위원장은 "한미 자유무역협정에서 자동차·공산품·농업·서비스 시장의 체계적 장벽 문제가 다시 다뤄져야 한다"고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요청한 바 있다.

 

또 미국 협상 대표인 웬디 커틀러는 헤리티지 재단 주최 토론회에서 "미국 의회와 행정부가 노동조항 및 다른 자유무역협정 조항들에 대해 보다 광범위한 논의를 하고 있다"며 "이런 협의들이 끝나면 향후 방안을 한국측과 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 밝힌 바 있다.

 

재협상 요구뿐만이 아니다. 미국은 재협상을 벌인 선례도 있다. 2006년 당시 페루 의회는 미-페루 FTA를 비준절차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신통상정책이 추진되면서 미국이 재협상을 요구, 지난해 6월 개정된 비준안을 통과시켰다.

 

배 논설주간의 말마따나 재협상이 국가 신인도를 떨어뜨린다면, 미국의 재협상 선례와 재협상 요구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과연 미국이 페루와 재협상 이후 다른 나라들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지 못 했나, 국가 신인도가 떨어졌나, 협상 상대국 리스트에서 지워졌나. 모두가 아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시장이 생겨나듯, 이익이 나는 곳에는 투자가 일기 마련이다. 인권 탄압국이라 손가락질 받고, 국가 신인도 역시 그리 높지 않은 중국에 자본과 기업이 몰리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한국 신인도가 떨어지고 외자 유치도 어려워 질 것"이란 배 논설주간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견강부회(牽强附會)다.

 

숫자놀음, 이건 아니잖아

 

 

배인준 논설주간은 '한국이 얻을 것과 잃을 것'이란 소제목에서 "2006년 기준으로 한국의 무역의존도는 71.6%로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라며 "그러나 최근 2년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두 단계 밀려 13위로 평가된다, 그나마 아직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라 할 수 있는 힘은 무역에서 나온다, 무역 증대가 경제성장의 절대적인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몇 년째 저성장이 국민을 힘들게 하지만 개방경제를 접어버리지 않는 한 세계화 흐름을 거부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11위에서 13위로 밀려난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순위를 내세우며, 한국 경제가 추락할 것인 냥 말하고 있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을 꾸미는 '그러나 아직은'이란 수식어가 그렇다. 하지만 한국의 국내총생산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2005년 국내총생산은 전년보다 15.7% 증가한 7875억 달러였고, 2006년엔 8880억 달러, 2007년엔 9570억 달러였다.

 

2006년 9.4%의 고성장을 하며 국내총생산 세계 12위에 오른 인도의 경우, 구매력 평가 기준(PPP)로 본 국민소득은 3800달러로 13위인 한국의 2만4500달러에 한참 못 미친다. 국내총생산이 절대적인 경제적 지표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배 논설주간은 국내총생산 증가에 대한 고려 없이, 단지 떨어진 순위에만 주목함으로써 통계를 왜곡하고 있다. 숫자놀음인 셈이다.

 

기본적인 사실 역시 틀렸다. 그는 '몇 년째 저성장'이라 말했지만, 한국의 성장률은 OECD 국가들의 평균 이상이다. 2002년 이후 OECD 국가들의 평균성장률은 2~3%였지만 한국은 4.3%였다. 국민을 힘들게 하는 건 저성장이 아니다.

 

 

정작 국민을 힘들게 하는 건 '고용 없는 성장'이요, '사회 양극화'다. 통계청이 발표한 '2007년 가계수지 동향'을 보면 소득 격차는 1999년 이후 최대로 벌어졌다. 상위 20%의 1인당 연간 소득은 2만 5667달러에 이르지만, 하위 20%는 5982달러 수준이다. 하위 20%는 아프리카 가봉 수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소득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 역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부의 사회적 재분배 없이 세계화의 흐름 아래 무역 자유화만을 외친다고 될 일이 아니란 말이다.

 

배 논설주간의 순진한 억측

 

배 논설주간은 또 "국제수역사무국(OIE)은 미국을 광우병위험통제국으로 인정하고 있다"며 "건강권 포기라는 주장에 미국보다 통제능력이 떨어지는 나라의 교민들까지 국내의 촛불시위에 동조해 시위를 벌일 정도"라 말한다.

 

3일자 <경향신문> 9면 기사 '파리…베를린…촛불, 바다를 넘다'를 보고 생각해볼 때, 그가 말한 '미국보다 통제능력이 떨어지는 나라'는 프랑스와 독일인 듯하다. 프랑스와 독일이 과연 미국보다 광우병 통제능력이 떨어질까. 배인준 논설위원은 잘 못 알아도 한참 잘 못 알고 있다.

 

1991년 광우병이 처음 발견된 프랑스는 그 이후에 쇠고기와 동물성 사료 판매를 금지하고 있으며, 30개월 이상 소를 대상으로 매주 광우병 감염 여부를 검사하고 있다. 독일은 24개월 이상 소를 도축할 때는 광우병 검사를 의무화하고 있다. 광우병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었던 영국은 육골분 사료를 제한하고 있으며, 소의 뇌와 척수·비장·편도선 등 모든 내장은 식용 금지 대상에 뒀다.

 

미국은 2004년에서 2006년까지 2년 동안 도축 소의 1%에 대해서만 광우병 검사를 했다. 그나마 2003년 최초로 광우병 소가 발견된 후 광우병 검사 시스템을 강화한 결과다. 그 이전에는 도축 소의 0.4%만 검사해왔다. 그러나 미국은 2006년 10월 이후 이를 다시 전환, 도축 소의 0.1%만 광우병 검사를 하고 있다.

 

소의 이력 역시 대부분이 기록되지 않아 광우병특정위험물질(SRM)이 국내에 들어오더라도 확인하기가 어렵다. 다시 한 번 배 논설위원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유럽이 미국보다 광우병 통제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 근거는 뭔가.

 

이러한 질문에 그는 국제수역사무국(OIE) 기준을 근거로 들는지도 모르겠다. 광우병위험통제국이니 안전하다는 것. 하지만 주미 EU대사인 존 브루턴의 말은 미국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지난 5월13일 방송된 <PD수첩>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2'에서 존 브루턴은 "미국은 30개월 이하의 뼈 없는 쇠고기에 광우병 위험이 없다고 아시아 시장에 압력을 가하고 있으면서, 30개월 이하의 아일랜드와 유럽산 뼈 없는 쇠고기를 미국시장에 허가할 의사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미국 스스로가 국제수역사무국 기준을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칼집 속 재협상 유효한가'란 그의 칼럼 중 "추후 미국 소에서 정말 단 한 건이라도 광우병이 발견된다든지 하면 사실상의 재협상 카드를 꺼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대목에선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해진다. 재협상에 대한 이해조차 없는 듯하기 때문이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재협상을 원하는 건 '검역주권'을 위해서다.

 

'전염병의 퍼짐을 막기 위하여 선박·항공기·차량 및 그 승객·승무원·짐 등에 대하여 전염병 유무를 검사하고 소독하는 일'이란 사전적 의미에서 보듯 검역은 '사전예방'이 그 목표다.

 

<경향신문> '美도 광우병 의심… 정부만 "없다"'(5월19일자)에 따르면 광우병 걸린 소 1마리는 5만 5000마리의 소를 감염시킬 수 있고, 광우병 원인물질인 프리온은 0.01g만 섭취해도 광우병에 유발할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광우병이 발견된 후 검역주권을 운운하는 배인준 논설주간의 주장은 사후약방문일 따름이며, 수많은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한 협정이다. 국민적 패닉 상태에서 과연 제대로 된 협상이 가능하기는 하겠는가.

 

설령 백번 양보한다하더라도, "한·미 간 쇠고기 협상은 과학적 근거에 기반해 잘 이뤄졌으며 재협상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버시바우 미국 대사나 "현재 합의된 틀 안에서 얼마든지 쇠고기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며 재협상을 거부한 수전 슈워브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의 말에서 보듯 이들에게 소중한 건 한국 국민의 건강권이 아니라 미국 목축업자의 이익이다.


태그:#동아일보, #광우병, #쇠고기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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