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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열흘도 더 지났습니다만, 함평 땅에서 시작된 쿠하의 '나비 타령'은 끝날 줄 모릅니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함평, 나비, 사슴벌레, 장수풍뎅이, 에콰도르" 등의 단어를 들먹입니다. 전라도 광주에 있는 시댁에서 일주일을 보내면서, 돌아오기 전날, 막 개장한 2008함평세계나비·곤충엑스포(4월 18일부터 6월 1일까지)에 다녀왔습니다.

맛난 고기 반찬을 좋아하는 엄마에게 함평은 나비 축제보다는 '함평 천지 한우'로 더 익숙한 고장입니다. 입 안에서 살살 녹는 함평 한우는 좋아하지만, 함평 땅을 밟아본 것은 난생 처음입니다.

행사장으로 향하는 길에는 새로 단장한 가로등이 나비 무늬 장식을 달고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버스정류장도 커다란 나비 모양으로 장식돼 있고, 벽화며 엑스포 행사 깃발까지, 가는 곳마다 나비 이미지들이 넘쳐납니다. 한적한 농촌 마을에 형형색색의 페인트로 치장한, 그린 지 좀 오래 돼 보이는 나비들이 10년 전부터 이곳이 나비의 고장이었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생태공원을 곁에 둔 엑스포 행사장.
 생태공원을 곁에 둔 엑스포 행사장.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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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흐르는 생태공원을 끼고 있는 '함평 나비, 곤충 엑스포' 현장에 도착한 저는 전국 각지의 번호판이 쓰여진 관광버스들과 멀리 서울에서 내려온 듯한 어린이집 차량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개장 첫 날(4월 18일)인데다 평일 오후라 한가할 줄 알고 떠난 길이었는데, 줄을 서서 관람하는 사람들과 방송사마다 경쟁하듯 촬영하는 스태프들이 너른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간혹 눈에 띄는 외국인은 취재차 온 외신기자들이 많았고, 공연을 위해 멀리 에콰도르에서 온 밴드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다양한 악기를 만져보게 하던 에콰도르 밴드 멤버.
 다양한 악기를 만져보게 하던 에콰도르 밴드 멤버.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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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후에 구경하던 관객들에게 야크 발톱으로 만든 악기며 동물 가죽으로 만든 마라카스를 직접 연주해 볼 수 있게 하는 배려에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더 좋아합니다.

쿠하는 이것 저것 만져보더니, 에콰도르에 가있는 이모를 찾습니다. 한국어를 잘 하는 밴드 멤버들은 유모차에 타고 있는 작은 꼬마가 "우리 이모는 에콰도르 살아요"라고 하니까, 엄마인 저더러 정말 에콰도르에 있냐고, 어느 지역에 갔냐고 되묻습니다.

"끼또와 푸힐리, 과야낄에 왔다갔다 하나봐요"라고 대답하니, 쿠하에게 더 많은 악기를 보여주며 반가워 합니다. 신이 난 쿠하도 마라카스를 흔들기도 하고, 팬플룻에 '후~' 하고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기도 합니다.

검은 야크 톱으로 만든 악기는 싫었는지 만지기를 꺼려하다가, 아저씨들이 흔들어 소리를 내주니까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 듯 살살 만져 봅니다.

너른 행사장을 아장아장 걷는 아이와 다니려면 유모차 대여가 필수입니다. 꼼꼼하게 모두 보려면 4시간이 소요된다는 안내 책자의 설명을 무시하고,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보는 '선택과 집중'도 필요합니다. 괜히 욕심 내다가는 엄마도, 아이도 지쳐서 기분 좋은 나들이를 망치기 십상이니까요. 행사 부스 안에서 구경하는 시간만 걸려도 아이에게는 피곤한 일정입니다. 따라서 건물과 건물 사이는 아이가 걷겠다고 우겨도 무조건 유모차에 태워서 이동했습니다.

여름 날씨로 계절을 당긴 실내 나비 체험관
 여름 날씨로 계절을 당긴 실내 나비 체험관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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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하가 제일 좋아한 곳은 역시 국제나비생태관과 국제곤충관입니다. 살아있는 애벌레를 만져볼 수 있고, 비록 온실 밖에서 볼 수밖에 없지만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국제나비생태관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바쁩니다. 하마터면 촬영 중인 방송사의 카메라 줄에 걸려 넘어질 뻔 했는데도 아랑곳 않고 처음 보는 꽃과 호랑나비가 신기한지 정신 없이 달려갑니다.

개장 첫 날, 여러 방송사가 경쟁하듯 취재하네요.
 개장 첫 날, 여러 방송사가 경쟁하듯 취재하네요.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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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행사가 끝나면 이 많은 곤충이 다 폐기처분 된다는군요. ㅠㅠ
 이번 행사가 끝나면 이 많은 곤충이 다 폐기처분 된다는군요. ㅠㅠ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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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상태로 수입해서 이번 전시 행사가 끝나면 전량 폐기처분한다는 공고문을 보니, 꼭 그렇게 처리해야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에게 책에서만 보던 나비와 곤충, 농산물들이 자라는 모습을 구경시켜 줄 요량으로 나선 길에서 만난 이 빨간색 안내 문구는 좀 충격입니다.

일회성 행사를 위해 잡혀 죽는 곤충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평소 바퀴벌레 새끼만 봐도 사정없이 꾹 눌러 죽이고, 꿀병에 침입한 개미떼가 얄미워 개미 박멸제를 온 집안에 붙여두기도 했던 사람인데 말이지요. 문자로 명확하게 정리하겠다는 계획과 처벌 규정을 읽고 나니, 축제장이 그저 눈요기를 위한 대규모 살생장이라는 생각으로 번집니다.

기념품으로 나비가 된 아이.
 기념품으로 나비가 된 아이.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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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글씨를 읽을 줄 모르는 쿠하는 마냥 즐거워 합니다. 한복을 입고 기념품 가게에서 나비 날개를 사서 달고 다니는 언니를 발견하더니 졸졸 따라갑니다. 한복과 색이 잘 어울리는 분홍 날개로 걸어다니는 예쁜 나비가 보는 이를 즐겁게 합니다. 쿠하 눈에도 언니의 날개가 몹시 마음에 든 눈치입니다만, 너무 크기도 하고, 또 집에 가져가면 곧 쓰레기로 버려질 것 같아서 '언니들만 하는 것'이라고 거짓말로 둘러댑니다. 이제 곧 이런 거짓말도 통하지 않은 날이 올테지요.

자연관찰 책에서 보여줄 때보다 직접 보니 더 좋아하네요.
 자연관찰 책에서 보여줄 때보다 직접 보니 더 좋아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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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를 무서워하는 쿠하지만 유리관 안에 갇혀 있는 개미는 만만해 보이는지 오래 관찰합니다.
 개미를 무서워하는 쿠하지만 유리관 안에 갇혀 있는 개미는 만만해 보이는지 오래 관찰합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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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곤충 외에도 친환경 농법으로 짓는 벼농사를 비롯해 갖가지 먹을거리들이 자라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친환경 농업관'과 '국제 나비, 곤충 표본관'도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전시장이었습니다. 쿠하도 귀여운 인형들이 놓여 있는 '친환경 농업관'에서 한참을 놀았습니다. 실제로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도 신기할 따름인데, 거기에 인형작품들이 재미를 더하니 어른들도 인형 앞에 앉아서 카메라 셔터를 누릅니다.

농작물 사이에 군데군데 귀여운 인형을 두어 관람객의 시선을 끕니다. 수박서리하는 모습을 설명해 줬는데 알아들었나 모르겠습니다.
 농작물 사이에 군데군데 귀여운 인형을 두어 관람객의 시선을 끕니다. 수박서리하는 모습을 설명해 줬는데 알아들었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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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할미꽃을 전라도에서 만나니 더 반갑네요.
 동강할미꽃을 전라도에서 만나니 더 반갑네요.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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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서 만나는 야생화도 예쁘지만, 꽃과 잘 어울리는 화분에 심어둔 야생화는 슬쩍 들고 가고 싶어질 정도로 마음에 쏙 듭니다. 시내 꽃집에서 야행화 화분 한 개에 2-3만원을 호가하는 것을 보고 비싸서 우리 집에는 못 들여 놓다가, 인사동에 새로 카페를 창업한 지인께 선물한 적이 있는데, 함평에 와서 보니 화분도, 꽃도 너무 바가지를 쓴 느낌입니다. 꽃집 주인보다는 계절따라 피고 지는 야생화조차 돈주고 사서 선물하겠다는 제 스스로 쓴 바가지일 테지만요.

함평나비엑스포 입구.
 함평나비엑스포 입구.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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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진귀한 나비와 곤충들을 볼 수 있고, 도시에서 사먹을 줄만 알았지 줄기나 잎새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채소들을 마음껏 볼 수 있는 함평 나비, 곤충 엑스포는 지금껏 다녀본 여느 지역 축제보다 남는 게 많은 시간이었습니다. 더구나 자연관찰 책으로만 보여주던 나비와 애벌레,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를 실컷 구경시켜 준 것만으로도 뿌듯한 오후였습니다.

나비들을 등지고 돌아오는 길. 까칠한 쿠하엄마 눈에 까만 양복들이 띕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폭력적인 이미지로 그려지거나, 동대문 의류 상가나 최근 뉴타운 재개발 조합 행사장에서 자주 보던 캐릭터라 반가울 리 없습니다.

나비와 곤충을 보러 많은 아이들이 오는 행사장에 굳이 각 잡고 서 있는 경호요원들을 세워둘 필요가 있나 싶은 마음에 한 컷 누릅니다. 내년부터는 고운 갑사 한복에 나비 날개 달고 반갑게 맞아주는 예쁜 언니들이 서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요?


태그:#함평, #쿠하, #나비, #곤충,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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