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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혹시 임신 안 했니? 엄마 태몽 꾼 것 같은데…."

지난해 8월 출산한 우리 부부의 임신 사실은 산부인과 의사보다, 친정 엄마가 제일 먼저 알았다. 그리고 엄마는 '가지가 주렁주렁 달렸다'는 태몽을 근거로 뱃속 아이가 아들일 거라고 '성감별'까지 해주셨다.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지만, 평소 꿈이 잘 맞는 엄마의 이야기였던 터라 우리 부부는 굳이 이견을 달지 않았다.

엄마는 시간이 갈수록 손자임을 더욱 확신했다. 심지어 임신 초기 일어나는 내 신체적인 변화, 가령 심한 입덧까지도 뱃속 아이가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들을 바란 건 아니지만, 엄마 말에 살짝 솔깃한 건 사실. 그럴수록 태아의 성별은 더 궁금했다. 의사에게 두어 차례 넌지시 성별을 물어본 끝에 임신 5개월 무렵 겨우 "엄마 닮았네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복중 태아가 '손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친정엄마의 해프닝은 그제야 비로소 끝이 났다. 만약 의사가 '엄마 닮았다'고 우회적으로라도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친정엄마는 계속 남자아이 옷과 장난감, 신발 등을 사 날랐을 것이고, 우리 부부는 남자 아이에 맞는 '씩씩한' 태교를 멈추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행법상 의사의 '태아의 성감별 고지'는 불법이다. 담당 의사는 '의료인은 태아 또는 임부에 대한 진찰이나 검사를 통하여 알게 된 태아의 성별을 임부 본인 그 가족 기타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도록 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구 의료법 제19조의 2 제2항으로 인해 태아의 성별을 알려 줄 수 없다.

이 법은 지난 1987년 낙태로 인한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고, 남녀 성비의 불균형을 막기 위해 제정됐으나 20년이 지난 지금 그 목적성이 유효한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를 반영하듯, 지난 10일 오후 2시 헌법재판소 대법정에서 열린 '태아 성감별 고지 금지 사건에 대한 공개 변론'에서는 4시간여 동안 치열한 공방이 계속됐다.

[1라운드] 성감별 고지 금지, 효과 볼 만큼 봤다?

지난 10일 오후 2시 헌법재판소 대법정에서 열린 '태아 성감별 고지 금지 사건에 대한 공개 변론 모습. 4시간여 동안 치열한 공방이 계속됐다.
 지난 10일 오후 2시 헌법재판소 대법정에서 열린 '태아 성감별 고지 금지 사건에 대한 공개 변론 모습. 4시간여 동안 치열한 공방이 계속됐다.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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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인 정아무개씨 대리인 자격으로 참석한 박상훈 변호사는 "20여년 전에 비해 남아선호사상이 상당 수준 퇴색했고, 당시 우려했던 남녀불균형 성비도 2006년 기준 남아 107.4(여아 100 기준, 남아 103~105 정도면 자연성비로 인정)로 안정됐다"는 것을 근거로 모든 예비부모들의 행복권과 알권리를 박탈하는 성감별 고지 금지는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또다른 청구인으로 참석한 산부인과 의사 대리인 전병남 변호사도 "현재의 낙태는 원치 않은 임신으로 인한 경제사회적인 이유가 90% 이상이지, 성감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서 "성감별 역시 의사의 의료 행위 중 하나로, 산모에게 설명의 이행을 할 도리가 있다"고 '위헌'을 주장했다.

변론 어떻게 이뤄졌나
이번 공개변론은 지난 2004년 의사가 구 의료법 제19조의 2 제2항을 이유로 의사가 임신 8개월째인 아내에게 태아의 성별을 말해주지 않자, 남편인 정아무개 변호사가 이 법이 행복추구권과 산모의 알 권리를 제한한다며 위헌소송을 낸 것과 2005년 11월 같은 법에 의해 태아에게 산모의 성별을 알려줬다가 6개월간 의사면허 자격정지 처분을 당한 의사의 헌법소원에 따른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선고 결과는 추후 통보될 예정이다.

이에 '합헌' 쪽 대리인인 보건복지가족부 곽명섭 사무관은 "성감별이 낙태로 이어지는 경우는 아직도 많다"며 "지난 2005년 34만명이 낙태를 했고, 이중 2500여건이 성감별에 의해 이뤄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예비부모의 알권리와 행복추구권이 생명권과 비교될 수 있나"라고 물으며 "국가는 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약자인 태아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항변했다.

곽 사무관은 특히 셋째아이의 경우, 여아 대 남아 비율이 121.8로 여전히 선별적 낙태가 이뤄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2라운드] 낙태 보다 성감별이 더 엄한 처벌?

성감별 형량이 낙태죄 보다 엄하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전병남 변호사는 "성감별을 한 의사는 3년 이하의 징역에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는 반면, 낙태한 의사는 2년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며 성감별에 대한 과도한 법 집행을 지적했다.

청구인 측 박상훈 변호사도 낙태가 우려되어 법 폐지를 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낙태죄를 엄격히 적용하면 될 것이며, 일부의 경우를 이유로 모든 예비부모들에게 이같은 법을 적용하는 것은 문제라고 '위헌'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청구인 측 참고인으로 나온 양현아 서울대 법대 교수 또한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여 적당한 임신 시기(임신 28주 정도)에 성별을 고지하되, 불법 낙태는 처벌을 지금보다 더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시 참고인인 이승우 경원대 법대 교수도 "지금의 성감별 형벌은 과도하며 '낙태할 수 있다'는 개연성만을 가지고 성감별을 처벌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거들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가족부 곽명섭 사무관은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으며, 의견 수렴의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고 답했다.

[3라운드] 태아의 '살권리'와 산모의 '알권리'

태아 성감별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높았던가? 이날 방청석엔 70~80여명의 사람들이 몰렸다. 대부분 기자들로 보였지만.
 태아 성감별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높았던가? 이날 방청석엔 70~80여명의 사람들이 몰렸다. 대부분 기자들로 보였지만.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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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변론장에서는 청구인 측 대리인들과 보건복지가족부 곽명섭 사무관 외에, 참고인들의 공방 또한 뜨거웠다.

참고인은 모두 네 명이 출석했는데, 위헌을 주장하는 세 명의 참고인 외에 합헌을 주장하는 보건복지가족부 측 참고인 박상은 안양샘병원 원장은 상식적이지 않은 법률을 대상으로 논의해야 하는 현실을 개탄하며 "낙태 현실은 통계로 나온 수치보다 훨씬 많다"고 운을 뗐다.

그는 "예비부모가 아이의 성별을 먼저 알아야 더 행복한 것은 아니지 않나"라고 물으며, "부모에게 알권리가 있다면 태아 역시 살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28주 이후에는 성감별을 하도록 하자는 청구인 측 주장에 대해서도 박 원장은 "성감별에 의한 낙태는 오히려 후기에 더 많이 이뤄진다"며 "이를 악용하여 최근에는 31주에 불법 낙태를 한 의원이 적발되는 일도 있었다"고 한순간 잘못된 판단이, 낙태 남용을 부를 수도 있음을 경고했다.

우리 모두 낙태에서 자유로울 수 있나

태아 성감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걸까?  네 시간여의 공방을 듣는 것이 곤혹스럽기도 했다. 슬슬 하품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가볍게 넘길 문제만은 아니었다. 또 멀리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우리 부부가 책임져야 할 생명의 문제기에 더더욱 그렇다. 내가 이쪽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래 맞아', 저쪽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래 맞아' 하고 줏대 없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으리라.

대한의사협회 쪽을 변론한 전종관 서울대 의대 교수는 자신이 한 설문조사 결과를 근거로 "태아 성별을 이유로 낙태할 수도 있다는 산모는 매우 적었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현재 낙태는 원치 않은 임신으로 인한 경제사회적인 이유가 90% 이상'이라는데, 원치 않은 성별의 아이는 원치 않은 임신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걸까?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딸아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 시아버지는 "둘째 낳아야겠네"라고손자에 대한 기대를 우회적으로 말씀하셨다. 우리 부부는 원래 둘째도 낳을 계획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뒤로 내 마음 한 켠에는 '둘째는 아들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런데 만약 성감별 고지 금지 규정이 없고 경제사회적인 이유까지 생긴다면 나는 과연 낙태의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것이 비단 나만의 고민일까.


태그:#태아 성감별, #헌법재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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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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