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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5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브리핑을 마친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자료사진)
 지난달 25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브리핑을 마친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자료사진)
ⓒ 연합뉴스 박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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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1일과 4월 1일 이틀 동안, 청와대 기자실에선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소동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청와대가 31일 오전에 있었던 금융위원회 업무보고 내용을 설명하는 자료를 온라인으로 기자들에게 배포했습니다. 그런데 '보도자료'가 아닌 비공개회의 '녹취록' 전문을 내보낸 것입니다.

통상 업무보고의 비공개 부분은 청와대 대변인실이 녹취록을 만든 뒤, 청와대 수석실과 해당 부처 간에 협의를 거쳐 필요한 부분만 요약·정리해서 기자들에게 '보도자료' 형식으로 나눠줍니다. 녹취록 전문이 나간 것은 '실무적인 실수'였던 셈이죠.

청와대가 뒤늦게 이런 상황을 파악한 것은 'e-춘추관'(청와대 소식과 보도자료를 제공하는 사이트)에 업무보고 자료가 올라간 지 1시간이 훨씬 지난 뒤였습니다. 대변인실 관계자들이 부리나케 기자실로 뛰어들어와 "지금 올라가 있는 자료는 대변인실 관계자의 실수로 잘못 올라간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기사를 작성하지 말아달라"며 '비보도'를 요청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기자들이 자료를 내려받은 횟수가 20회를 넘었고, <이데일리>는 그 자료의 일부를 토대로 기사를 작성해 각종 포털사이트에까지 노출된 상태였습니다. 저 역시 자료를 곧바로 경제부에 넘겨서 기사를 작성하고 있었고요.

대변인실 측은 기자들을 상대로 거듭 '비보도' 요청을 했습니다. 대통령과 정부당국자들이 비공개 회의에서 새 정부의 금융정책에 대해 직접 거론한 것을 여과없이 보도할 경우 금융시장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대변인실측의 설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내용이 어떻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체 설명이 없이 무조건 '비보도'만 내세웠습니다.

대변인실 측으로서는 자신들의 '실수'를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조치일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 '실수'를 하게 된 동기라는 게 "기자들에게 좀 더 빨리 자료를 내보내기 위해서 서둘렀기 때문"이라고 하니, 한편 이해도 됐습니다.

저절로 굴러들어온 정보 '반납' 하자는 기자들

하지만 기자들로서는 그야말로 '제 발로 굴러들어온 떡'이었습니다. 그동안 청와대는 '관행'을 이유로 비공개 회의 부분을 자세히,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자기들 입맛에 맞게 가공해서 자료를 내놨기 때문에 기자들은 취재에 애를 먹어왔습니다.

그런데 비공개 회의내용 전문을 손에 넣었으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 내용을 보도함으로써 시장 질서에 나쁜 영향을 미치니, 안 미치니 하는 판단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언론사들도 그 정도의 판단 능력은 있습니다.

전 당연히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대변인실의 '비보도' 요청을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습니다. 대변인실의 요청이 있은 직후 기자들끼리 수용 여부를 두고 회의가 열린 것입니다. 회의 결과, 기자들은 대변인실의 요청을 받아들여 비공개 회의내용 전문이 아니라 대변인실이 뒤늦게 내놓은 '보도자료'에 <이데일리>가 이미 보도한 내용을 추가해서 기사를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데스크와 상의 끝에 기자단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청와대가 '회수'하려는 자료가 사실과 다른 엉뚱한 내용을 담은 것이 아니라 '진실' 그 자체를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자로서 일부러 취재를 해서라도 알아내야 할 내용이 저절로 손에 들어온 셈인데 그것을 청와대에 '반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오마이뉴스>의 '비보도' 요청 수용 거부로 청와대 기자실 2차 회의가 열렸습니다. 회의가 열리기 전 일부 기자들 사이에선 <오마이뉴스>에 대한 징계 운운하는 상식 이하의 발언도 나왔습니다.

2차 회의에서 저는 "청와대의 요청은 있었지만, 이번 사안은 '비보도'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녹취록 내용이 공개돼도 특별히 시장경제에 타격을 주거나 국익에 손상을 입힐 내용이라고 보지 않는다. 청와대가 우려하는 부분은 언론사의 양식으로서 적절히 소화해서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보도 여부에 대한 결정은 또 다시 미뤄졌습니다. 회의에서는 '도대체 어떤 부분이 시장 질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인지, 책임있는 금융 당국자의 설명을 듣고 결정하자'는 의견이 제기됐고, 결국 1일 오전까지 청와대측에 시간을 주기로 했습니다.

지난해 10월 국정홍보처의 폐쇄조치로 기자실에 들어갈 수 없게 된 외교통상부 출입기자들이 외교통상부 청사 2층 로비에 모여 기사를 송고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국정홍보처의 폐쇄조치로 기자실에 들어갈 수 없게 된 외교통상부 출입기자들이 외교통상부 청사 2층 로비에 모여 기사를 송고하고 있다.
ⓒ 이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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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출입하는 분들이니까, 협조를?"... '대못 정신'은 어디에?

그러나 1일 오전 기자실에 나타난 사람은 '책임있는 금융 당국자'가 아니라,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이었습니다. 이동관 대변인은 "(비공개 회의) 내용 자체가 (기사로) 나가서 크게 문제가 될 것이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참석자의 발언이 잘못 인용되서 증폭되거나 왜곡되면 시장이나 외국 투자자들에게 미치는 파장이 크기 때문에 대승적 차원에서 판단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청와대에 출입하는 분들이니까 잘 협조해주길 바란다"며 거듭 '비보도'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부분이 왜곡될 우려가 있는지에 대해선 설명이 없었습니다. 다음은 이동관 대변인의 설명이 끝난 뒤 기자들과 나눈 질의응답 중 일부입니다. 

이동관 대변인: 금융위 업무보고 문제에 대해서는 오마이뉴스도 동의해 주는 것인가?
오마이뉴스 기자: 동의할 수 없다. 어떤 부분이 나가면 문제가 되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해 달라.

이동관 대변인: 어떤 부분은 한쪽으로 땡겨서 의미를 해석하다 보면….
오마이뉴스 기자: 그런 것은 언론에서 알아서 판단해 쓰면 된다. 대변인 말대로 나가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내용인데, 왜 보도하지 말라는 것인지,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달라.

이동관 대변인: 굳이 나가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내용을 굳이 쓰겠다는 이유가 뭔가?
오마이뉴스 기자: 굳이 나가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내용을 굳이 못 쓰게 하는 이유는 뭔가?

이동관 대변인: 그렇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식으로 나가면 이야기가 어렵다. 일단 제 입장은 이렇다. 나머지는 기자단에서 결정해달라.

이 대변인은 "이후에라도 금융비서관 등 다른 금융 당국자의 설명을 들을 수 있느냐"는 기자들의 요청에 대해 "필요하다면 하겠지만 이미 우리 내부적으로 입장이 정리가 됐다"는 말을 남기고 기자실을 나갔습니다. 청와대는 처음부터 비공개 회의 내용이 왜 보도가 되어서는 안되는지에 대해 기자들에게 설명할 의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기자단 회의가 다시 열렸습니다. 그러나 기자들은 여전히 정부측 금융당국자의 설명을 듣고나서 판단하자는 의견이 우세했습니다. 다시 한번 청와대에 기회를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청와대는 전혀 설명할 의지가 없는데도 기자들이 계속 사정을 봐줘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답답함을 토로했습니다.

결국 기자들은 전날 결정을 모두 뒤집고, 애초 비공개 회의 내용을 전부 보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자칫 덮어질 수도 있었던 금융위원회 업무보고 비공개 회의 내용이 햇볕을 보는 데 꼬박 24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지난 겨울 찬 거리로 내몰린 기자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웠나.

기자들은 촌각을 다투며 삽니다. 애시당초 '비보도' 요건에 해당되지도 않는 사안을 놓고 무려 이틀에 걸쳐 회의를 하고 있는 기자들을 보며 청와대측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렇게 결론이 내려진 뒤 일부 언론사는 이 과정을 자신에게 유리한대로 가공해서 소개했습니다. 청와대의 '비보도' 요청에 아무 문제의식 없이 동조했던 것에 대한 반성문부터 올려야하는데도 말입니다. 제가 굳이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난 겨울, 기자들은 아스팔트에 있었습니다. 각 정부부처 건물 로비에서, 계단에서 웅크리고 앉아 기사를 썼습니다. 참여정부가 부처 기자실에 박아놓은 '대못'을 뽑기 위해 그렇게 싸웠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그 '대못'을 뽑기는커녕 덮어두고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대못'은 아닙니다. 기자들의 정보접근권을 구조적으로 차단하려는 권력의 의도, 그것이 바로 '대못'입니다.

그렇게 싸웠던 기자들이 정권이 바뀌자 저절로 손에 들어온 정보조차 권력에 '반납'하겠다고 합니다. 도대체 그 때 무엇을 위해서 싸웠는지 혼란스러워집니다.


태그:#청와대 기자실, #비보도(엠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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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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