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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어체를 사용한 문체, 동일한 논지의 무한 반복 등 거슬리는 점도 있지만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만큼은 100% 공감이 갔다.
▲ 우리 사발 이야기 경어체를 사용한 문체, 동일한 논지의 무한 반복 등 거슬리는 점도 있지만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만큼은 100% 공감이 갔다.
ⓒ 가야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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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어느 휴일에 거실 청소를 하다가 그만 그릇 하나를 깨뜨렸다. 차 마실 때 쓰는 사발이었는데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깨진 조각들을 내다 버렸다.

나중에 아내가 얘기를 듣더니 그게 꽤 유명한 도예가가 빚은 ‘사발’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작은 주전자와 찻잔 대여섯 개가 세트로 구성되어 있던 건데 이제 이가 하나 빠진 격이니 더욱 아쉽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이 바로 <사기장 신한균의 우리 사발 이야기>였다. 내가 깨뜨린 그 그릇과 비슷하게 생긴 사발 이야기이니 참으로 공교롭다고나 할까. 이미 깨져서 내다 버린 사발, 잊어버릴 만하니까 다시 아쉬움의 상처를 들쑤시는 꼴이니 말이다.

책 표지 사진과 같은 사발 하나의 가격이 상상을 초월한다. 만들기는 우리나라에서 만들었지만 일본으로 건너가 국보가 된 것도 있다. 일본인들의 논리는 조선에서 밥그릇으로 쓰던 막사발을 일본에서 우아한 차사발로 승화시켜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해냈기 때문에 일본의 국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임진왜란 전후 경상도 진주 인근에서 사용되던 제사용 멧사발, 즉 제기라는 주장이다.

일단 이런 국보급 사발은 돈 가치로 환산이 불가능할 정도라고 한다. 어느 사발은 그 엄청나다는 오사카성과도 바꾸지 않는다 하고, 또 어느 사발 하나를 팔아서 대규모 사찰을 중건했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니 대체 얼마짜리라는 건지 감을 잡지 못하겠다. 예술품을 앞에 두고 돈 가치 생각부터 먼저 하는 이 천박함을 용서하시라.

아무튼 책 속에는 다도나 도예 문화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도저히 다 알아들을 수 없는 수많은 논리와 학설 그리고 사진들이 실려 있었지만 저자의 일관된 논리는 단 하나, ‘일본으로 건너가 국보가 된 사발은 우리나라 민가의 제기였다’는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종교철학자 야나기 무네요시가 이 사발들을 밥그릇으로 쓰던 막사발, 즉 별로 가치가 없는 잡기로서 막 사용하던 사발이라고 했던 것이 그동안의 통설이었고, 이를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였던 식민사관의 망령이 오늘날까지도 도예업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밥 공기였던 이 사발을 우아한 차 사발로 승화시켜 조선인들이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움을 찾아낸 것은 그들 일본인의 뛰어난 심미안이라고 자랑하는 일본인들의 논리는 모두 날조된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작년인가 광화문 근처 일민미술관에서 야나기 무네요시 소장품 전시회가 있었는데 때를 놓치고 말았다. 우리나라의 문화재 보호를 위해 애쓴 약간의 공로도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 일본인은 조선 공예의 미를 ‘애상미, 비애미’라고 정의했다.

한 마디로 ‘불쌍해 보이는 아름다움, 죽음을 향해가는 자의 쓸쓸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건강미를 ‘다 죽어가는 쓸쓸한 아름다움’이라고 했던 그의 억지에 문외한인 나부터도 반감이 드는데, 우리 도예계는 아직까지도 그의 주장에 부화뇌동하고 있다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는 야나기를 비롯한 일본인들 모두가 우리나라의 문화재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조상들은 예부터 선대의 묘에서 부장품을 훔친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패륜이라 여겼기 때문에 위로는 시대를 짐작할 수 없는 옛 무덤으로부터 가야, 신라, 고려를 지나 조선시대의 무덤까지 도굴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의 무덤이 도굴되기 시작한 것은 일본인들이 부장품을 훔쳐가기 시작한 바로 그때부터이고, 그렇게 도굴된 무덤이 수 만여 기에 달해 이제는 성한 무덤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홀에 잘 모셔져 있지만, 그동안 이러저리 옮겨다니며 마구 다뤄지고, 함부로 방치되는 등 참으로 많은 수난을 겪었다.
▲ 경천사지10층석탑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홀에 잘 모셔져 있지만, 그동안 이러저리 옮겨다니며 마구 다뤄지고, 함부로 방치되는 등 참으로 많은 수난을 겪었다.
ⓒ 김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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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박물관 중앙 홀에 있는 ‘경천사지10층석탑’도 마구잡이로 뜯어 훔쳐갔었다가 내외의 여론에 밀려 되돌려 준 게 바로 일본인들이다.

석탑을 통째로 훔쳐갈 수 없음을 알고는 그 속에 사리장치라도 훔쳐갈 생각으로 탑을 무너뜨린, 그것도 주민들이 알아챌까봐 천둥 번개가 치는 밤에 다이너마이트로 석탑을 폭파시킨 자들이다.

남의 나라 옛 절에서 훔치고, 남의 조상 무덤에서 파낸 물건들을 제 정원에 세워 놓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들이 감히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할 자격이나 있는가?

아직까지도 종군위안부는 스스로 지원한 여자들이고, 임진왜란 때 조선의 도자기 장인들도 자진해서 일본으로 건너왔으며, 일본인 성주를 흠모한 조선인 도예가는 성주가 죽자 뒤따라 할복했다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역사 왜곡을 일삼고 있는 자들이 과연 ‘무지한 조선인들이 밥그릇으로 쓰던 사발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은 일본인의 뛰어난 심미안’이라는 소리가 가당키나 하냐 말이다.

책을 읽고 보니 내가 깨뜨린 그 사발이 예사로운 물건은 아닌 듯, 어쩌면 우리 사발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려 일생을 바친 어느 장인의 역작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더욱 아쉽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말 그대로 깨져버린 사발이니, 유씨 부인의 ‘조침문’처럼 나도 ‘조기문(弔器文)’ 하나 쓸까 보다.

“오호 통재라, 사발이여!”


우리 사발 이야기 - 사기장 신한균의

신한균 지음, 가야넷(2005)


태그:#책,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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