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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하고 싶은 목록이 매달 늘어가는 <즐거운 불편>
 따라하고 싶은 목록이 매달 늘어가는 <즐거운 불편>
ⓒ 달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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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여행가에서 지금은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으로 일하는 한비야는 종이컵을 쓰지 않는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 아마존 정글을 베서 햇빛을 과다하게 받은 정글 사람들이 반 장님이 돼 있기 때문이다. 종이컵 하나를 쓰는 것이 곧 남미 밀림 사람들의 눈을 빼오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면, 쉽게 종이컵을 사용하지 않게 된다고.

무의식적으로 뽑아 마시는 자동판매기 음료와 딸아이가 요로감염에 걸릴까봐 오줌 한 번만 싸도 즉각즉각 갈아준 무수한 일회용 기저귀가 떠올라 정신이 뻔뜩해지는 순간이었다. 한비야 외 여섯 사람의 강의를 담은 <21세기를 바꾸는 상상력>을 읽은 뒤로 나는 종이컵을 거의 쓰지 않게 됐고, 집에 있을 때는 기저귀를 아예 벗겨 놓는다.

밖에 나가서도 두 시간 단위로 소변을 보게 하여 2-3일에 기저귀 한 개로 버티는 날들이 점점 늘고 있다. 하루에 열 개씩 아낌 없이 쓰던 날들을 반성하며, 둘째 아이는 신생아 시기가 지나고 이유식을 시작하게 되면 큰아이때 선물로 받은-그러나 단 한 장을 단 한 번 사용한- 묵혀둔 천 기저귀로 바꿀 생각이다. 

게으른 내가 천 기저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마트보다는 시장에서 파는 노지 배추를 사먹고 싶게 된 데는 일본인 기자 후쿠오카 켄세이가 쓴 <즐거운 불편>이라는 책 공이 크다. 물론 이전에도 친환경적인 태도나 유기농스러운 생활에 대해 동경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물질 소비 문명에 찌든 저자가 1년 간 르포 형식으로 실천기록을 담아낸 이 책을 보면서 약간의 용기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의 시대

<즐거운 불편>은 1부 '소비와 행복의 관계'에서 매달 지켜나간 불편 목록과 즐겁게 불편을 감내하는 생활 이야기와 다양한 실천가들을 만나 인터뷰한 대화편이 2부로 이어진다.

바쁜 분들은 그냥 1부만 읽어도 되겠지만, 대화편에도 밑줄 긋고 메모할 만한 내용들이 꽤 많이 나온다.

마이니치 신문 기자인 후쿠오카 켄세이는 서른여섯 살이던 지난 98년, 가족들의 양해를 구해 1월부터 12월까지 매달 조금씩 불편한 생활을 늘려간다.

직업이 글쓰는 기자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설득력 있는 말솜씨로 쓴 생활 일기들을 읽다 보면, 현재 내 생활에서 시도해 볼 수 있는 불편들은 뭐가 있는지 점검해 보게 되고 그가 실천한 목록 가운데 일부는 금방 따라해 보고 싶어진다.

오래 전부터 먹을 거리를 직접 생산하고 싶었던 내게 주중에는 글 노동자로 일하고, 주말에는 농부로 제 식구들 먹을 거리를 직접 일궈 낸 이야기는 무척 부러웠다.

전업 농사로 전향하기 전에 그처럼 주말을 활용해 농사를 배우고, 직접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 긍정적인 답안으로 여겨진다. 주말마다 가족과 함께 오리 농법으로 유기농 쌀농사를 짓고, 열아홉 가지의 채소와 두 가지 제철 과일을 노지에 심어 먹는 이야기는 언젠가 꼭 도전해 보고 싶은 불편 목록으로 기억해두려 한다.

내가 즐겁게 참을 수 있는 불편은?

지은이가 98년 1월부터 12월까지 꼭 1년 간 생활 속에서 즐겁게 때로는 괴롭게 버텨낸 불편들은 전염성이 은근히 강한데, 7월에 실행했던 불편 목록들을 살펴보자.

7월 실행 중인 불편
1. 자전거로 통근하기
2. 자동판매기에서 음료수를 사지 않는다.
3. 외식하지 않기
4. 제철채소나 과일이 아닌 것은 먹지 않는다.
5. 목욕하고 남은 물을 전동펌프가 아닌 손으로 세탁기에 퍼 담는다.
6. 설거지할 때 뜨거운 물을 쓰지 않는다.
7. 커피, 홍차를 마시지 않는다.
8. 마요네즈, 된장, 매실 장아찌를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
9. 엘리베이터, 이불건조기, 다리미, 티슈, 샴푸, 린스, 식기용 세제를 쓰지 않는다.
10. 도시락과 물통 갖고 다니기.
11. 사용한 알루미늄 호일은 씻어서 재활용한다.
12. 목욕은 원칙적으로 격일제.
13. 병은 버리지 않고 재활용한다.
14. 음식찌꺼기는 퇴비로
15. 열아홉 가지 채소와 두 가지 과일, 쌀을 재배
16. 고장이 나면 수리해서 쓴다.
17. 원칙적으로 잔업을 하지 않는다.
1월부터 점차 늘려온 목록이 꽤 길어졌고, 여름이 되면서 중독성 높은 금지사항도 여럿 눈에 띈다. 자동판매기에서 음료수를 사먹지 않는 것이나 이틀에 한 번 목욕하는 것(습한 여름에는 지키기 어렵기도 하겠지만…), 병 재활용, 설거지 할 때 뜨거운 물을 사용하지 않는 것, 엘리베이터나 다리미를 안 쓰기 등은 나도 지킬 수 있다.

또 알루미늄 호일이나 랩은 아예 쓰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커피와 홍차를 참고, 외식하지 않기, 도시락과 물통을 들고 다니기, 샴푸와 린스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지키기 어려울 것 같다.

십수 년 전, 중국에 두 달 간 머물렀을 때 실험삼아 재미삼아, 그 동네 사람들처럼 머리를 한 달 가까이 감지 않은 적이 있다. 처음 일주일은 그야말로 가렵고 찝찝해서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다 보름이 넘어가니까 약간 무거운 느낌 말고는 나름대로 버틸만 했다. 나중에 엄청난 양의 샴푸로 네 번이나 빨아야 했던 기억이 나는데, 습관이라는 게 무서워서 매일 샤워를 하다 보면 하루라도 견디기 어렵게 된다.

이 책은 신문기자가 생활 속에서 작은 불편을 감수하며 물질과 소비 중심에서 문화, 시간, 가족 중심의 가치로 삶을 바꿔보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특히 집 근처 밭과 논에서 직접 먹을 식재료를 기르는 과정이 흥미로운데, 야근이나 잔업을 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직장에 다니는 자의 특권으로 보이기도 했다.

내 남편의 경우 새벽에 나가면 밤이 돼야 돌아오는 한국의 평범한 회사원이라 그런 불편은 감내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괜한 딴지를 거는 것은 아니고, 제발 불편해도 참을테니 회사와 사회 분위기가 불편할 시간을 좀 허락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선진국 사람들의 생활상을 개발도상국의 국민 대다수가 텔레비전이나 광고, 영화를 통해 알게 되고, 그에 대한 동경을 키우고 있다. 옛날 일본인이 미국 사회의 풍요를 선망하고 목표로 삼았던 것처럼, 선진국 사람들이 구가하는 소비문명은 이미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목표가 됐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은 소비문명을 맘껏 누리면서 개발도상국 사람들에게만 인내하고 소비를 억제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윤리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남은 길은 오직 하나! 선진국 국민들이 에너지와 물자의 소비량을 줄이는 길뿐이다. (이 책 17 쪽)

책에는 저자가 5년쯤 사용한 자전거가 고장났을 때 버리지 않고 수리해서 쓰는 대목이 나온다. 1만 엔만 줘도 새 것으로 살 수 있지만 9500엔을 주고 고치는데, 그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 경제시스템의 본질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대량으로 생산해서 단가를 낮추면, 소비자들은 싼 값에 좋은 물건을 새로 살 수 있다. 굳이 비슷한 돈을 들여 수리할 필요를 못 느끼도록 하는 것이 대량소비 사회의 유지 비결이다.

유행에 맞춰 핸드폰을 바꾸거나 1-2년 지나면 단종된 제품이라 고치기도 어려워지는 요즘. 기술이나 서비스에 돈을 쓰지 않게 하는 대신, 물질에 쓰게 만드는 지금의 경제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전 지구적인 환경문제를 극복하기 어려워 보인다. 세태만 한탄하고 있다가는 대량 소비 사회에 수몰되기 십상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자기가 실천할 수 있는 불편부터 시작하자. 최소한 자기가 하기로 한 것을 1년쯤 끝까지 해보는 것부터 말이다. 내가 종이컵과 일회용 기저귀의 편리한 유혹을 언제까지 무시할 수 있을지 나는 지금 실험 중이다.


즐거운 불편 - 소비사회를 넘어서기 위한 한 인간의 자발적 실천기록, 개정판

후쿠오카 켄세이 지음, 김경인 옮김, 달팽이(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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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는게 아니라 즐기라구

태그:#환경, #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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